그녀들은 행복해 보였다. 인터뷰 시작 전,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밝게 웃는 그녀들의 모습은 특유의 젊음이 지닌 발랄함으로 가득 찬 듯 했다. '십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받아온 이들의 모습이 이렇게 밝다는 사실은 언뜻, 믿기 어려웠다.

십대 레즈비언과 만나다

 <아웃(Out)-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 포스터
ⓒ 여성영상집단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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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Out)-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이하 <아웃>). 그녀들은 여성영상집단 '움'이 지난해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며, 연출자며, 작사가이다.
<아웃>은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세 명의 십대 레즈비언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셀프 카메라로 직접 찍은 옴니버스식 다큐멘터리. 자신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회 속에서 상처받으면서도, 각자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결국 긍정하는 청소녀들의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웃>은 또한 십대들의 감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랩'을 선택했는데, 그녀들은 각자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가사를 직접 쓰고 불렀다. 음지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반(동성애자들이 '일반'과 구분해 스스로 지칭하는 호칭) 청소녀들의 목소리를 '참여 제작 방식'으로 생생하게 전달한 이 다큐는 자연히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고, 지난 5월 11회 인권영화제에서 '올해의 인권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녀들이 도대체 누구냐고? 이들의 실명은 3시간여의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도 알지 못한다.

'아웃팅(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동성애자임이 밝혀지는 일)'의 위험 때문에 세 청소녀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카메라에 완전히 노출시키지 않았고, 실명 대신 각각 '천재' '꼬마' '초이'라는 애칭을 사용했으니.

각종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계속 거절해온 그녀들이었다. 총연출을 맡은 '움'의 이영(32) 활동가는 "이번같이 주인공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일은 <오마이뉴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6월 초,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천재(18)·꼬마(19)양이 이영 활동가와 함께 참석했으며, 올해 대학생이 된 초이(20)양은 학사 일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인터뷰 내내 그녀들은 놀랍도록 진솔하게 다큐와 관련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이는 '아무런 계산 없이 솔직하게' 셀프 카메라를 찍은 그녀들의 자세와 통해있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 복기한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수많은 '아웃'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스피크 아웃' 하고 있는 이 소녀들의 이야기를.

#1. 커밍아웃 - 천재(18·고2)

 <아웃> 스틸 사진. 포스터 촬영을 위해 소녀들은 가면을 써야 했다.
ⓒ 여성영상집단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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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중1 때 여자친구와 '첫사랑'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정말 진지하게 사귀었고, 헤어지고 나서 너무 슬픈 내 감정을 느끼면서 알았죠.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요."

그러나 소녀의 이 감정은 그녀를 '가르치는' 학교로부터 처절하게 짓밟힌다. 소녀가 당시 다니는 중학교의 '이반검열' 때문이다.

소녀는 시도 때도 없이 교사들에게 불려간다. 교사들은 "네가 아는 선배가 누군지, 얼마만큼 친한지를 다 적어내라"고 강요한다. '머리길이가 짧은' 다른 소녀들과 함께다. '색출된' 소녀들은 그 후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다. 복도에서 선배들과 잠깐, 인사를 해도 교무실에 불려간다.

"매일같이 가방검사를 당했어요. 편지라도 발견되면 관련된 친구들을 모두 불렀죠. 등교도 교무실로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반에 대한 학교의 탄압은 가히 검열 수준이었고, 소녀들은 이것을 '이반검열'이라고 부른다.

 <아웃> 스틸 사진.
ⓒ 여성영상집단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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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에 자신의 하루 생활을 매일 적어서 제출하고, '풍기문란'이라는 '죄목'으로 교내 청소를 강요당했던 소녀는 괴롭다. 수업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교사들이 툭하면 던지는 "니네 레즈냐?"라는 조롱도 견디기 버겁다. 하지만 소녀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외로움이다. 학교는 이반 청소녀들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을 막는다.

"하교길,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아이들은 간격을 두고 한 명씩 내보냈어요. 공공연하게 다른 아이들에게 '저 아이들과 놀지 말라'는 말을 했죠."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려 놀고 싶었던 소녀는, 왜 이런 억압을 당해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시름시름 앓아간다. 소녀는 자해하기 시작한다. 천재의 손목에는 열 개가 넘는, 선명한 '금'이 있다.

그렇게 중학교의 마지막 해를 맞고 있던 소녀는 청소녀 이반들의 이야기를 다루려 하던 여성영상집단 '움'과 만난다. 그리고 소녀의 손에 카메라가 쥐어진다.

'천재'는 2005년, 셀프 카메라 형식의 다큐 <이반검열>을 찍었다. 앞서 전한 청소녀 이반들에 대한 학교의 탄압과 더불어 소녀들의 "화나고 분한 심정"을 솔직히 담았다. 25분 정도의 짧은 작품이었지만 소녀의 삶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제가 전혀 비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고, 학교의 행동들이 옳지 않다는 사실도 확실히 깨달았어요."

무엇보다 소녀에게는 '카메라'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친구'가 생긴다. 그 '친구'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소녀는 학교 방송국 동아리에 들어간다. 학교 방송국의 '분위기 메이커'가 된다.

그리고 작년, 소녀는 다시 '움'과 작업을 한다. 이번에는 두 명의 레즈비언 언니들과 함께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큐가 <아웃>. 천재는 <커밍아웃(Coming Out)>편에서, 남자친구가 생긴 변화에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내가 과연 레즈비언이 맞을까?' 하지만 천재를 인정한다고 한 남자친구는 사실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녀는 '당연히' 그 남자친구와 헤어진다.

여자를 사랑하는 나는 과거일 뿐이다 이제 상관없다 그건 한때일 뿐이었다 고쳐주겠다
자꾸 고쳐라 고칠 수 있다 지랄하는데 레즈비언이 병이냐? 옮을까봐 무서워?
- <아웃> OST - 'Coming Out' 중(천재 작사)

 서울여성영화제 상영 당시, 자신의 어머니와 포옹하는 천재
ⓒ 서울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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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검열>을 찍으며 소녀는 외친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단순히 '여자끼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압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아웃>를 찍으며 소녀는 또한 외친다. '십대'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한때' 혹은 '탈선'으로 치부하지 말아달라고. 우리들끼리 좋아하는 당연한 감정을 이제 '인정'해 달라고.

소녀의 이 외침은 공허하게 끝나지 않는다. 지난 봄에 열린 9회 서울여성영화제, <아웃>이 상영된 후 열린 GV(감독과의 대화)시간. 모두들 가면을 쓰고 질문을 주고받던 그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한 여성이 손을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습니다…. 다른 말은 모르겠고요, 천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소녀의 어머니였다. 스크린 앞으로 걸어나간 어머니와 딸은 서로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린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엄마가 저를 정말 인정해준다는 생각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소녀는, 천재는 이제 비로소 행복하다.

#2. 아웃사이더 - 꼬마(19·고3)

여기에 또 다른 소녀가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연애편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못한 열아홉 소녀. 소녀는 13세에 짝사랑을 하며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자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릴 수 없다. 알리기가 두렵다. 소녀의 첫째 동생이 소녀가 쓴 일기장을 읽으면서부터 겪은 '아웃팅' 경험 때문이다.

소녀의 동생은 계속 "엄마에게 일러바치겠다"는 말로 소녀를 떨게 한다. 어려서 비롯된 단순한 장난이었을까?

"식사시간, 제가 동생 몫의 수저를 놓을 때마다 동생은 일어나서 수저를 다시 씻더라고요. 저의 손이 닿는 어떤 것도 동생은 경멸하면서 대했어요."

그것은 곧 '레즈비언 언니'에 대한 지독한 혐오였다.

소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가족마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두렵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의심'하면 덜컥 겁이 난다. 말수가 줄어들고 어두워지는 그녀는 자연스레 '아웃사이더'가 된다. 사회의 차가운 시선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녀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연애편지조차 건네주지 못한다.

 <아웃> 스틸 사진. 주인공 세 명이 나란히 모였다.
ⓒ 여성영상집단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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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꼬마는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아웃사이더(Outsider)>편에 담았다. 다분히 암울한 자신의 일상을 그린 이 다큐를 찍으며 꼬마는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가장 큰 변화는 '독립'한 것이다. 현재 학교와 가까운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는 그녀는 자유로워 보였다.

"집에서는 숨겨야만 했던 레즈비언 책이랑 영화 포스터랑… 마음껏 펼쳐볼 수 있으니 너무 좋아요."

그녀가 대학을 가려는 이유도 여느 고3들과는 다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다양한 자양분을 습득해서, 제 언어로 사회를 설득시킬 수 있기 원해요."

꼬마는 자신의 고시원 방에 '침묵은 곧 죽음이다'는 표어를 붙여놓았다. 소녀는 이미 전부터 사회를 설득시키는 운동을 해오고 있다.

"지금은 입시공부 때문에 쉬고 있지만 그동안 계속 '한국 레즈비언 상담소'에서 활동을 했었죠."

1년이 넘게 활동을 했지만 수시로 그녀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인식의 벽에 부딪히는 소녀는 조금 답답하다.

"남자들이 전화를 걸어 와 '당신들이 레즈비언이야?'라며 욕설을 할 때… 너무 고통스러웠네요."

힘들면서도 소녀가 상담소에서 '최연소'로 활동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십대 레즈비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편견은 두 가지가 얽혀 있어요. '십대'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편견이죠. 허나 만약 제가 남자친구랑 사귀고 있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탈선'으로 치부할까요? 그 굳은 인식을 깨고 싶어요."

소녀가 찍은 셀프 카메라 후반부에는 희망적인 장면이 나온다. 둘째 동생이 자신에게 미안하다며 편지를 보낸 장면이다. 가슴을 찡하게 하는 장면도 있다. 소녀가 독백으로 소녀의 어머니에게 말한다.

"엄마, 나 레즈비언이야. 가슴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그거, 나쁜 거 아니야… 사랑해 엄마."

소녀는, 꼬마는 희망한다. 언젠가 모두 어우러질 수 있기를. 또한 소녀는 희망한다. 언젠가 자신의 여자 친구와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예쁜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난 너희들이 만든 저 시시한 틀에 갇혀 살진 않지
나만의 길을 찾아 아직 잘 모르지만 아마,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 <아웃> OST - 'Outsider' 중(꼬마 작사)

#3. 또 한 명의 소녀, 그리고 꿈꾸는 그녀들

 소녀들을 촬영하고 있는 여성영상집단 '움' 제작진들
ⓒ 여성영상집단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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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은 작년에 촬영됐다. 당시 19살이었던 초이는 지금 대학생이 됐고, 학사 일정으로 인터뷰에 참석하지 못했다. 초이는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레즈년"이라고 '아웃팅'을 당했고, 그 상처를 견디지 못해 자퇴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초이는 <아웃팅>편의 랩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아니다 정신이 나갔다 레즈년 레즈레즈레즈…(중략)…지금 하는 이 이야기가 나만이 아는 자퇴의 진실. 내게 고스란히 남은 상처.
- <아웃> OST - 'Outing' 중(초이 작사)

소녀들은 상처투성이다. 친구들과 웃으며 뛰놀아야 할 십대 시절을, 이 세 명의 이반 청소녀들은 온갖 상처를 받으며 보냈다. 그런데도 기자가 만난 그녀들이 행복해 보였던 이유는, 바로 카메라를 만났기 때문이리라.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고 자신을 긍정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그 상처를 '치유'했기 때문이리라.

두 편의 다큐를 찍으며 카메라를 좋아하게 된 '천재'의 꿈은 '예쁜 레즈비언 극영화'를 찍는 것이다.

"어두운 얘기 말고, 행복하고 밝은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꼬마'의 꿈 또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영상이나 소설이나, 혹은 직접 참여하는 운동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비주류'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소녀들은 자연스레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연대의 눈길을 건넨다.

이영 활동가는 "장애인이나 노숙자 등, 고통받는 다른 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이 이 아이들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한다.

물론 소녀들의 미래는 평탄하지 않아 보인다. 소녀들은 자신들의 영화가 인권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어도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없다. <아웃>이 연세대 총여학생회가 주최한 레즈비언 문화제에서 상영됐을 때, 꼬마의 학교 친구가 문화제에 찾아와 꼬마는 굉장히 두려웠다고 회고한다.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어려움을 소녀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소녀들은 입 모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고, 내가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너무 기뻐요."

그리하여 이제 소녀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소녀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다른 이들에게도 심어주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덧붙이는 글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리는 '다큐 플러스 인 나다' 영화제에서, 오는 7월 4일(수) <아웃-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를 상영합니다.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아웃 이반검열 동성애 레즈비언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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