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월드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올림픽을 통해서 전 세계의 축구가 하나가 되어 챔피언을 가리고 있다. 월드컵이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문이 열려있는 반면 올림픽은 프로 선수의 참여를 제한하고 있다. 나이 또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23세 이하만 참가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부터는 24세 이상의 선수(와일드카드) 3명이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아마추어 대회로, 월드컵보다는 비중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오늘날 올림픽 축구가 세계의 모든 나라가 치열한 지역예선을 거쳐 본선에 참가하기를 희망하는 국제적인 대회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 역사를 되돌아보면 수많은 진기명기가 펼쳐졌고, 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냈으며, 스포츠에 절대 강자가 없듯이 이변을 거듭하며 전 세계 축구팬들을 흥분시켜왔다. 올림픽 축구 역사상 많은 이변이 발생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 이변 중 이변은 오늘날 역사상 최강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브라질이 한 번도 올림픽에서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축구는 제2회 1900년 파리 올림픽과 제3회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그리고 중간 올림픽인 1906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선을 보였지만 그 당시에는 정식 종목이라기보다는 시범적인 경기로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대표가 참가해야 하는데, 당시에 참가했던 팀들은 '국가대표'라고 부르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축구는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졌지만 앞서 언급한 올림픽 기간에는 아직 국가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단계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국가들이 대표팀을 구성하여 참가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자금 부족과 선수 선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 세 팀 참가해 단 두 경기 파리 국제 박람회를 올림픽 활성화 도구로 이용하려던 쿠베르탱의 소원에 따라 제2회 올림픽은 쿠베르탱의 조국 프랑스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파리 국제박람회의 열기에 묻혀버린 올림픽은 장장 5개월간의 지루한 여정 끝에 폐막식도 없이 조용히 끝나버렸다. 각국의 대표팀 구성이 어려운 상황에서 올림픽 준비위원회는 유럽의 각국의 클럽 챔피언을 초청하려고 시도했으나 모두들 참가하기를 꺼렸다. 근거리에 있는 벨기에의 브뤼셀 클럽조차도 파리 여행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벨기에는 브뤼셀대학(Université de Bruxelles)이 중심이 되어 선수를 선발하였으나 쉽지는 않았다. 결국 신문에 광고까지 내며 선수를 보충한 벨기에 대표팀에는 네덜란드의 반 휴켈륨(van Heuckelum)과, 영국의 에릭 토른톤(Eric Thornton)이 포함될 정도였다. 프랑스 대표인 클럽 프랑세즈(Club Français)는 다른 클럽에서 몇 명의 선수를 빌려서 팀을 조직할 수 있었고, 영국의 대표로 참가한 업톤파크FC(Upton Park FC)는 당시에 영국 아마추어에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실력을 갖고 있는 정도였다. 이렇게 어렵게 팀을 구성한 세 나라(벨기에, 영국, 프랑스)는 1900년 9월에 단 두 차례의 경기로 순위를 결정지어버렸다. 9월 20일에 열린 프랑스의 클럽 프랑세즈와 영국의 업톤파크FC의 경기에서는 영국의 업톤파크FC가 4-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3일 후인 9월 23일에 프랑스의 클럽 프랑세즈와 벨기에 브뤼셀대학이 경기를 치렀는데, 이 경기에서 후반에 집중력을 발휘한 프랑스가 6-2로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과 벨기에의 경기는 치러지지 않은 상태로 영국이 1승, 프랑스가 1승 1패, 벨기에가 1패를 기록한 상태로 제2회 올림픽은 마감되었다. 국제 박람회를 통해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겠다는 쿠베르탱 남작의 야심찬 계획은 산만하고 지루한 경기 진행으로 역효과를 일으키며 끝나버렸고, 축구 종목은 그저 시범적인 친선 경기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미국·캐나다 대학선발팀 급조
1904년 제3회 올림픽에서 우승한 캐나다의 Galt FC 1904년 제3회 올림픽에서 우승한 캐나다의 Galt FC

▲ 1904년 제3회 올림픽에서 우승한 캐나다의 Galt FCⓒ IFFHS


제3회 올림픽에서 축구는 제2회 대회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제3회 올림픽은 제2회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국제박람회 기간과 같이 진행되었다. 당시에 유럽 국가들이 올림픽을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는 것이 쉽지 않은 선택이었는데, 축구와 같은 단체 구기 종목의 경우에는 선수를 불러모아 팀을 구성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참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는 북중미의 캐나다와 미국에서 급조된 두 개의 대학 선발팀(Christian Brothers College, St. Rose Parish)이 참가하는 초라한 대회가 되었다. 캐나다 지역 선발 갈트FC는 11월 16일 미국의 크리스찬 브라더스 칼리지에게 7-0, 그 다음날 세인트 로즈 패리시와의 경기에서 4-0으로 승리를 거두며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우승을 확정지었다. 캐나다가 2승으로 우승을 확정한 이후, 미국 선발 두 팀이 두 번째 자리를 놓고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미국 선발팀의 득점력은 형편없었다. 이전에 치른 캐나다 지역 대표와의 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한 양 팀은 서로 대결에서도 좀처럼 골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11월 20일과 21일에 치러진 두 번의 경기에서 득점 없이 비긴 양 팀은 11월 24일에 세 번째 경기를 치렀는데, 이 경기는 전·후반 30분씩 진행되었다. 결국 이 경기에서 크리스찬 브라더스 칼리지가 2-0으로 승리하며 2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을 돌아보면, 축구는 더욱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진행되었다. 참가한 팀들 역시 공식적인 국가대표가 아니었으며 제2회 대회와 마찬가지로 친선경기의 성격이 강했다. [1906년 10주년 기념 아테네 올림픽] 도시대표팀도 참가 허용
1906년 중간올림픽(아테네)에서 우승한 덴마크 코펜하겐팀 1906년 중간올림픽(아테네)에서 우승한 덴마크 코펜하겐팀

▲ 1906년 중간올림픽(아테네)에서 우승한 덴마크 코펜하겐팀ⓒ IFFHS


근대 올림픽이 출범한 이후 그리스는 계속해서 아테네가 올림픽을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기 위해서 그리스는 그 주장을 양보해야만 했다. 대신에 근대 올림픽 출발 10주년이 되는 해인 1906년을 기념하여 아테네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렇게 1906년에 열린 올림픽은 특별한 올림픽(중간 올림픽, 1906 Intercalated Games)으로 구분되었다. 1906년 4월 22일부터 5월 2일까지 20개국 900여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축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축구에 유달리 적극성을 보인 덴마크 역시 팀 구성부터 어려움을 겪었으며, 개최국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아테네 클럽이 어렵게 참가를 결정했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영토이지만 그리스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두 개의 팀(Thessaloniki, Smyrna)이 조직되어 참가했는데, 국가대표는 아니었지만 대회를 성사시키려는 올림픽위원회는 도시 대표의 참가도 환영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4월 23일, 덴마크는 Smyrna를 5-1로 이겼고, 그리스의 아테네 클럽은 Thessaloniki를 6-0으로 이겼다. 4월 24일, 두 경기의 승자들끼리 맞붙은 결승전이 진행되었는데, 덴마크가 전반전을 9-0으로 크게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테네 클럽 선수들은 후반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경기를 포기했다. 그들에게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스포츠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덴마크를 우승으로 결정한 대회 조직위원회는 그리스의 아테네 클럽에게 준우승을 허락하지 않고 Thessaloniki와 Smyrna의 승자를 2위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에 4월 25일, 2위 결정전이 거행되었고 이 경기에서 Smyrna가 Thessaloniki를 3-0으로 이겨 2위를 차지하였다. 올림픽 축구, 실패를 딛고 가능성을 보이다 1900년부터 세 번에 걸친 올림픽에서 축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어렵게 성사된 경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함이 많이 있었다. 세 번의 올림픽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그때까지 치러진 축구 경기가 공식적인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아니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점차 해를 거듭하며 축구는 전 세계로 빠르게 보급되고 있었으며, 국제축구연맹(FIFA)의 창설(1904년) 이후, 유럽의 각 나라에서는 자국의 축구협회를 통해서 국가적 규모와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음번 올림픽에서는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IFFHS, FIFA 그 밖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904년, 1906년, 1908년 올림픽 축구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한 글은 '오마이 블로그'에서 참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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