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전>의 연출을 맡은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
박승필은 조선인의 손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단성사 내에 영화촬영반을 만들어 <장화홍련전>의 제작에 들어갔다. 연출은 박승필과 동업 관계에 있던 영사기사출신 박정현이 맡았고, 시나리오는 단성사의 유명 변사 김영환과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를 세워 배우를 양성하고 있던 이구영이 맡았다. 촬영과 편집 등 기술부문은 조선인 최초의 카메라맨으로 일본 니카츠(日活)의 촬영기사로 활동했던 이필우가 책임을 졌는데 박승필은 거액의 제작비가 드는 영화 제작의 위험을 줄이고자 이필우에게 동아일보 주최 조선정구대회의 촬영을 시킨 후 그 결과를 보고 그에게 영화의 촬영을 맡겼다. <장화홍련전>은 단성사 전속 변사인 최병룡, 우정식이 장쇠와 사또 역을 맡았고 광무대 무대에 선 경험이 있는 김옥희, 김설자가 장화, 홍련 역을 맡아 연기했다. 또한 그 외 광무대의 유명 전속배우들을 총동원하여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했다. 1924년 9월 단성사에서 개봉한 <장화홍련전>은 <춘향전>을 능가하는 흥행 성과를 올렸다. 조선극장에서는 <장화홍련전>의 개봉에 맞춰 맞불작전으로 <춘향전>을 재개봉하기도 했으나 단성사로 몰려드는 관객의 행렬은 막을 수 없었다. <장화홍련전>은 관객들의 열화 같은 성원으로 상영일자를 이틀간 연장하였다. 서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박승필은 조카들과 자식들을 총동원하여 필름을 들고 전국을 순회하며 흥행을 이어갔다. <장화홍련전>은 박승필에게 큰 돈을 벌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에서 최초로 순전 조선인들의 힘으로만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박승필은 <장화홍련전>의 흥행 성공을 기회로 영화로의 진출을 더욱 꾀하게 된다. 현철과 이구영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와 더불어 합작을 도모했다. 현철과 이구영은 동국문화협회를 조직하고 1회 작품으로 <숙영낭자전>의 제작을 준비했으나 이익 배분의 문제로 현철이 단성사와의 합작을 거부하자 합작은 틀어졌다. 박승필은 현철을 배제하고 이구영과 이필우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어 이들이 고려영화제작소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1925년 9월, 박승필의 재정적 후원을 받던 고려영화제작소는 기쿠치 유우로우(菊池幽芳) 원작 <나의 죄>를 조중환이 번안하여 매일신보에 연재한 <쌍옥루>를 가지고 영화로 만든다. 전, 후편으로 나뉜 이 영화에는 일본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김택윤, 강홍식이 출연하였으며 감독은 이구영, 촬영은 이필우가 맡았다. 단성사에서 개봉한 이 작품은 흥행에서 성공했지만 이 작품을 만든 이구영과 이필우는 서로 트러블이 생겨 헤어지고 고려영화제작소는 문을 닫았다. 이구영은 박승필의 단성사에 입사했다. 이구영의 가세로 <장화홍련전> 이후 별다른 활동이 없던 단성사 영화부는 금강키네마사로 간판을 바꿔 달고 <낙화유수>, <세 동무>, <종소리> 등을 제작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다. 1927년 10월 6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낙화유수>는 변사 김영환의 원작을 이구영이 연출하고 복혜숙, 이원용 등이 출연한 영화로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이란 가사로 시작되는 <낙화유수>의 주제가는 최초의 한국영화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윤백남 프로덕션에서 나와 일본인 요도가 만든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 입사한 일군의 영화인들이 <농중조>에 이어 그 두 번째 작품으로 <아리랑>을 만든다. 나운규가 연출, 각본, 주연을 도맡은 이 작품은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였고 세상을 뒤 흔들 정도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승일은 별건곤에 실린 자신의 글에서 "사실상 영화는 소설을 정복하였다"라고 외쳤을 정도였다. 나운규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박승필은 나운규라는 재능 있는 젊은이를 눈여겨본다. 박승필은 <야서>, <금붕어> 등의 흥행실패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위치가 불안했던 나운규에게 재정적 후원을 약속하고 독립을 부추겼다. 재정적 후원을 약속받은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탈퇴하고 동 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모든 인원들을 데리고 나와 나운규 프로덕션으로 독립한다. 나운규와 함께 한 인원은 이창용, 이명우, 윤봉춘, 주삼손, 이금룡, 이경선, 홍개명, 전옥, 김연실 등이었다. 나운규는 박승필의 재정적 후원 하에 <잘 있거라>, <옥녀>, <사나이>, <벙어리 삼룡>, <사랑을 찾아서> 등의 작품을 계속 제작할 수 있었다. 나운규에게만 박승필의 지원이 돌아 간 것이 아니었다. 윤백남 프로덕션에서 <심청전>, <개척자> 등을 감독한 이경손의 영화 활동도 지원하여 이경손 프로덕션의 설립을 도왔다. 하지만 이경손 프로덕션은 몇 편의 작품 제작을 준비만 했지 실제로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다. 조선 흥행계의 대부로 활약하던 박승필도 그 기운이 다 되어 갔다. 1927년 봄, 자신이 일으켜 키운 광무대의 운영을 인척인 박승배에게 넘기고 자신은 단성사의 운영만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 단성사의 운영은 쇠약해진 박승필이 아니라 지배인인 박정현이 도맡아 했다. 박정현은 극장의 운영뿐만 아니라 금강키네마와 나운규 프로덕션의 총지휘자로 있으며 이들 영화사의 자금 지출을 담당했다. 박정현은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과 연이은 흥행실패로 적자가 누적된 나운규 프로덕션을 단성사 영화부로 흡수하여 원방각사라는 새로운 제작사로 재탄생시킨다.
 동아일보에 실린 박승필과 박승희의 단성사 운영권 다툼
1931년 6월, 토월회를 이끌던 박승희가 단성사의 운영권을 인수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박승희는 극단 대장안을 조직하고 단성사의 건물주인 다무라 미네에게 찾아가 극장운영권을 넘겨받기로 계약을 채결한다. 신문에서는 이 내용을 보도했고 이 사실에 격분한 박승필이 박승희를 명예회손 및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하였다. 이에 박승희는 건물명도소송으로 대응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쇄약해진 상태에서 돌출적으로 나온 단성사 인수사건은 박승필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박승필은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1932년 1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단성사의 운영권을 두고 소송을 벌였던 박승희는 단성사를 포기하고 1932년 종로5가에 있던 미나도좌를 중심으로 태양극장을 설립했다. 단성사주 박승필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는 신문마다 크게 실렸다. 장례는 단성사장으로 치러졌으며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하루 동안 극장 문을 닫았다. 매일신보에는 신문화의 개척자인 윤백남의 애도 기사가 실렸는데 "싸움의 마당에서 후생을 위하여 피 흘리다 화살이 다 떨어져 명예의 전사를 하고 말았다"고 박승필의 죽음을 애도했다. 박승필이 떠난 단성사는 이후 지배인 박정현이 맡아 운영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약초좌, 명치좌와 같은 최신 시설의 상설영화관이 등장하면서 재개봉관으로 그 명성이 추락했으며 일제 말기 일본인 운영자들에 의해 일본의 대륙침략을 동조하는 의미의 대륙극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본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은 해방이 되고 나서 처음 맞는 3·1절인 1946년 3월 1일이었다. 박승필은 광무대를 운영하면서 전국의 명창들을 세상에 불러내어 판소리와 같은 전통 연희의 계승 보급에 앞장섰다. 또한 신극과 영화의 도입과 발전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아서 임성구, 김도산 등을 재정적으로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김도산의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제작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여 한국영화 탄생의 산파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손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순전히 조선인으로의 힘으로만 제작된 <장화홍련전>을 만들었으며 나운규와 같은 유능한 영화인들을 지원하면서 무성영화시기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박승필의 이러한 행동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험난한 선구자적인 길을 걸었던 것으로 애정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길을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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