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초창기의 공로자 단성사주 박승필
서울에 있는 영화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은 단성사는 1907년 개관하여 2007년 개관 100주년을 맞았다. 100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화재와 전란, 변화된 시대에 맞춰 수차례 신축과 수리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단성사는 2005년 3년여의 공사 끝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2005년 2월 3일, 단성사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탄생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한국영화를 빛낸 100명의 영화인을 선정하여 이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한 것이었다. 선정된 100명의 영화인에는 임권택, 안성기, 강수연 같이 친숙한 이름에서부터 신상옥, 유현목, 최은희, 신성일 등 50~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들과 한국영화를 개척한 윤백남, 나운규까지 한국 영화의 대표 인물들이 두루 망라되었다. 특히 이 명단에는 한국영화 탄생의 산파였으며 단성사를 한국영화의 상징 같은 존재로 만든 한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초창기 한국영화의 버팀목으로 조선 사람의 손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단성사 지배인 박승필이 바로 그이다. 박승필의 초기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부고 기사를 통해 1875년에 출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성사에서 선전을 담당했던 이구영의 증언에 의하면 박승필은 삼형제 중 셋째 아들이었다고 하며, 촬영기사 이필우는 삼형제 중 둘째였다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형제를 비롯하여 조카들까지 박승필이 주도하던 흥행계에서 활약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제강점기 영화전문잡지인 <영화시대>를 발간한 바 있는 박누월이 있다. 박누월은 박승필의 조카이다. 박승필이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광무대를 인수하여 구극 전용 극장으로 운용하면서부터이다. 초기 극장 중 하나인 광무대는 활동사진상영관으로 이용되던 한성전기회사의 창고를 연극 상연을 위해 개조한 것이었다. 이곳은 1903년 경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영화가 공개 상영된 곳이기도 했다. 한성전기회사 동대문 발전소 근처에 있던 광무대는 상설관으로 동대문 발전소의 전기를 이용하여 야간에 영화 상영과 연극 공연을 할 수 있었다. 1908년 박승필은 한성전기회사의 소유주인 미국인 골브란에게 200원을 주고 광무대를 임대하였다. 그는 전국의 유명한 명창들을 광무대에 모았는데 박기홍, 이동백, 김창환, 송만갑 등이 광무대에 전속으로 활약했고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인기 명창들이 공연할 때는 많은 관객들이 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관객이 들지 않았다. 들쭉날쭉한 수지로 인해 경영난에 직면한 박승필은 지방순회에 나서기로 하고 당시 서울 인근인 뚝섬(현 서울 성동구)으로 지방공연을 나섰다. 짐꾼도 없이 일행 십여 명이 한보따리씩 짐을 들고 장터를 찾아 공연을 했으나 아침 끼니 거리도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도 쫄쫄 굶고 다음 공연을 위해 찾아간 마을에선 온 동네 사람들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날이 바로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일본에게 빼앗긴 바로 그날이었던 것이다. 박승필은 중외일보에 게재된 글에서 그날 단원들과 시장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광무대의 공연과 지방순회공연을 병행하면서 전통연희인 구극을 부흥시키며 일약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 낸 박승필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한일합방 직후 골부란이 일본인에게 한성전기회사의 소유권을 넘겼고 얼마 있지 않아 광무대는 간판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박승필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부린다. 1913년 현재 을지로3가 근처에 있던 황금유원지 안의 일본인 소유 극장인 연기관을 임대하여 광무대로 간판을 바꿔달고 공연을 재개했으며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하고 스타를 만들어 내면서 광무대를 구극의 메카로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극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임성구, 김도산 등이 이끄는 신극 단체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새롭게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영화의 흥행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955년경의 단성사의 모습
1917년 박승필은 일본인 다무라 미네가 소유한 단성사를 임대하여 활동사진과 신극 전용관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1년여의 공사 끝에 1918년 12월 21일 확장 개관한다. 광무대에 이어 단성사를 임대한 박승필은 구극과 신극, 영화를 아우르는 흥행계의 패자로 우뚝 솟아오르고 있었다. 박승필은 자신의 극장을 풍성하게 채워줄 예술가들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면서 그 영향력을 키웠다. 신극의 개척자인 임성구와 김도산의 재정적 후원자였으며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적인 판단으로 흥행이 될 만한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박승필은 일본인 극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연쇄극의 제작을 김도산에게 권유하였다. 연쇄극은 연극의 일부 장면을 영화로 촬영하여 공연 중 상영하는 것이었다. 박승필은 김도산이 공연한 바 있는 <의리적 구토>의 몇몇 장면을 영화로 촬영하여 공연에 삽입시키게 하고 그 비용을 모두 내었다. 유명한 요릿집인 명월관, 청량리 근처의 홍릉, 장충단 공원, 한강철교 등지에서 몇몇 장면이 촬영되었다. 1919년 10월 27일,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공연되었다. 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익숙한 조선의 풍광이 상영되었다. 관객들은 조선의 풍광 속에서 무대의 배우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신기해했으며 열광적으로 호응하였다. 단성사는 몰려드는 관객들로 연일 만원이었다. <의리적 구토>는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 상영한 최초의 영화였다. 현재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1919년 10월 27일을 한국영화의 탄생일로 삼고 있다. 2, 3년간의 짧았던 연쇄극의 전성기가 지나갔다. 관객들은 더 이상 연쇄극에 열광하지 않았다. 극장에는 외국에서 수입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박승필은 연쇄극이 아닌 단성사에서 상영하고 있는 외국영화와 같은 진짜 영화의 제작을 원했다. 조선극장은 단성사의 라이벌 극장으로 현재 인사동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1923년 10월, 조선극장의 소유주인 일본인 하야가와가 영화제작사인 동아문화협회를 만들어 우리의 대표적 고전인 <춘향전>을 제작, 상영했다. <춘향전>은 조선극장의 유명 변사 김조성이 이몽룡 역을 맡고 기생 한용이 춘향을 맡아 연기 했을 뿐 일본인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잘 알려진 조선의 고전을 영화화 한 <춘향전>은 조선극장에서 8일 동안 무려 1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구극 전용극장 광무대를 운영하면서 우리 전통연희를 지켜온다고 자부했던 박승필에게 일본인, 그것도 라이벌 극장인 조선극장의 일본인이 만든 춘향전은 큰 충격이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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