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화의 개척자 윤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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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중세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조선에 근대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통해 도입된 근대의 문물은 선진문물로 소개되었고 중세의 삶에서 탈피해야 하는 조선에 있어 빨리 흡수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근대문물에는 서구의 근대문화 또한 포함되었다. 근대문화는 조선에서 신문화로 불렸다. 조선에 들어온 신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대중매체인 신문과 잡지였다. 신문과 잡지는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는 기본적인 임무 외에 쉬운 말, 쉬운 글로 쓰여 우리 말, 우리글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의 문화를 소개하는 창구였으며 근대문학인 소설을 탄생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근대를 대표하는 문학이 소설이었다면 근대를 대표하는 예술은 연극과 영화였다. 극장에 관객을 모아놓고 무대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는 연극은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대중여흥이었다. 또한 기계문명의 발달로 만들어진 영화는 근대의 결정판이자 대표적 오락거리였다.

20세기 초, 조선에는 신문, 소설, 연극, 영화 이 모든 것이 거의 동시에 도입되어 성행했다. 신문화의 국내 유입에는 일본 유학 출신들의 지식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

신문화의 개척자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윤백남이다. 그는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했으며 귀국 후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인으로 활동하며 이 땅에 신문화 전파에 힘썼다. 또한 최초의 연극단체 중 하나인 '문수성'을 조직하였고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세>를 만들어 이 땅의 연극과 영화를 개척하였다.

연극과 영화에서 손을 뗀 후에는 <월간 야담>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야담을 발굴, 전파하는데 힘썼으며 최초의 대중무협소설인 <대도전>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방송인으로서 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데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의 조선어방송과장으로 직접 마이크 앞에서 야담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윤백남은 20세기 초반 신문화의 도입과 개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소설, 연극, 영화, 방송의 맨 윗자리에 그가 있기에 한국 신문화의 개척기가 곧 그의 생애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BRI@윤백남은 1888년 10월 4일 무관이던 윤시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교중이다. 백남은 그의 호로 일본 유학시절 조선인을 뜻하는 태백남인(太白南人)이란 필명을 사용했는데 조선에 들어온 후, 이를 줄여 백남으로 사용한 것이 이름을 대신하게 되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으며 13세 때 현재 명동 중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일본어 학교인 경성학당 중학부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백남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15세에 조혼하였다. 결혼 직후 신학문을 더 배울 목적으로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가진 돈이라고는 백동전 20원뿐이었던 그는 제물포항에서 일본인 선원에게 붙들렸으나 유창한 일본어로 그 선원을 설득하여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다.

객지서 무일푼으로 고생한 끝에 16세 때인 1903년 후꾸시마현(福島縣) 다히라시(平市)에 있는 반조우(盤城)중학 3학년에 보결로 입학할 수 있었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똑똑한 백남은 반조우중학의 일본인 교장선생이 매우 아꼈다.

이듬해 도쿄의 철도학교에 유학 온 사촌형과 상의 끝에 와세다실업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되는데 반조우 중학 교장선생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와세다실업학교 졸업 후 윤백남은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진학했으나 국비유학생이 되기 위해 동경고등상업학교로 옮겨 상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사촌형이 매달 보내주는 12원의 돈은 학업을 잇기에 빠듯했다. 그때 조선에서 일본유학생 50명을 선발했는데 선발인원 중 8명은 일본에 체류 중인 유학생으로 채웠다. 윤백남이 그 8명의 한 명으로 선발되어 매달 28원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정경과는 국비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통고를 받자 부득이 학교와 전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동경고등상업학교에서 백남은 자신보다 6~7세 연상이었던 모리 고이찌(森吾一)라는 일본인 친구를 사귀었다. 1909년 동경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백남은 귀국 후, 관립한성수형조합의 이사로 있던 모리의 주선으로 관립한성수형조합의 부이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기 직전 일제에 의해 한성수형조합이 조선식산은행으로 개편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인 간부인 윤백남은 강제퇴직 당하였다.

한성수형조합을 나온 윤백남은 경성고보 교사와 보성전문의 강사로 교직에 몸담았고 수형조합의 부이사였던 자신의 경력을 살려 매일신보의 경제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연극에 관심이 있던 백남은 이때 매일신보 지상에 미봉(眉峰)이라는 필명으로 <함루희락>이란 희곡을 게재하였다.

그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자칭 극광이라고 부를 정도로 연극광이었던 그는 일본에서 조선루(朝鮮樓)라는 요정을 운영하고 있던 이인직과의 교류를 통해 문학과 연극에 관한 관심을 키웠다. 백남보다 먼저 귀국한 이인직은 <은세계>, <귀의성>과 같은 신소설을 창작하였고 자신의 소설을 원각사 무대에서 공연하여 최초로 근대식 연극을 소개했다.

백남이 매일신보에 재직할 당시에는 조선 최초의 연극단체인 임성구의 혁신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연흥사, 단성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혁신단은 일본인 밀집지역인 남촌에 있던 일본 극장의 신파극을 그대로 따와 공연했다.

윤백남은 혁신단의 공연이 너무 유치하고 저급하다고 생각했다. 윤백남은 경성학당 동창이며 매일신보 동료기자인 조일제와 이 땅에 제대로 된 연극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자 혁신단의 대표인 임성구를 찾아가 도움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임성구와의 담판은 실패로 끝났다.

 최초의 연극이 공연된 극장 원각사. 윤백남이 조직한 문수성의 전속극장이였지만 화재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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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2월, 윤백남은 매일신보를 퇴사하고 조일제와 함께 극단 문수성을 조직한다. 일본극장의 심부름꾼으로 곁눈질로 일본신파를 따라했던 임성구의 혁신단에 비해 일본 유학 출신의 지식인 윤백남과 조일제가 이끄는 문수성은 문사극단이라 불리며 대우를 받았다. 문수성은 조일제가 번역한 <불여귀>로 창단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에서는 백남이 배우로 무대에 섰다.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원각사를 인수하여 문수성의 전용극장으로 사용하는 등 출발은 산뜻했으나 이는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다. 전용극장이었던 원각사가 곧 화재로 소실되었다. 또한 <송백절> 등의 공연이 호응을 얻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은 피할 수 없었다. 1년간 열심히 공연을 한 문수성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백남은 1년 후 재기를 시도해 보지만 얼마 가지 못해 재정난에 직면하여 다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개성에서 유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친구 이기세가 통합을 제의해 왔다. 백남과 이기세는 극단 명칭을 예성좌로 짓고 단성사를 근거지로 창단했다. 예성좌에서는 <콜시카 형제>, <카츄사> 등을 현대식 무대장치와 효과음을 사용하여 공연했다. 그러나 조혼하여 처자식이 딸린 백남은 가정을 이끌어야 했기에 다시 매일신보에 입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아일보가 창간하면서 백남은 동아일보의 창간에 관여한다. 1920년 5월, 갓 창간한 동아일보에 <연극과 사회>라는 장문의 논문을 게재했다. 논문에서 연극운동가답게 연극을 통해 민풍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얼마 있지 않아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다시 연극계로 발을 돌렸다.

1921년 10월 예성좌를 같이 만들었던 친구 이기세와 예술협회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그간 일본의 신파극이나 서양의 희곡을 번역하여 그대로 무대에 올리던 것에서 벗어나 창작희곡을 상연하기 시작했다. 백남 자신의 창작 희곡인 <국경>, <운명>, <등대지기>, <기연> 등의 작품이 예술협회에서 공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극사상 최초의 후원회인 간친회를 만들어 모금에도 나섰다. 이런 백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는 없었다. 백남은 예술협회에서 손을 떼고 본격적인 연극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2년 민중극단을 조직한다.

당시는 신파극의 한 장면을 영화로 찍어 보여주는 연쇄극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연쇄극은 1919년 신극좌를 이끌던 김도산이 단성사주 박승필의 재정적 후원으로 <의리적구토>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의리적 구토>가 대성공을 거두자 각 신파극단에서는 연쇄극을 쏟아냈다.

민중극단이 창단된 1922년은 일본식 신파극에 연쇄극까지 유행하던 시기였다. 민중극단의 윤백남은 식산은행의 일본인 친구 모리에게서 저축 장려를 위한 계몽영화의 제작 의뢰를 받는다.

백남은 그 의뢰를 받아들여 민중극단 단원들을 동원 희극물 저축 계몽영화를 만든다. 영화인으로서 첫 출발이었다. 제목과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 희극물에 대해 <한국영화측면비사>를 쓴 안종화는 "비록 감칠맛은 없었으나 당시로서는 그럭저럭 볼 만한 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

 1923년 4월 11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월하의 맹세> 시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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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인연이 되어 1923년 총독부 체신국에서는 저금의 장려와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극영화의 제작을 백남에게 의뢰하게 된다. 민중극단을 운영하며 자금난에 시달리던 백남은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메가폰을 쥔다.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영화감독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최초의 극영화로 인정받고 있는 <월하의 맹세>는 2000척 길이로 1923년 4월 9일 경성호텔에서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적인 시사가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순이라는 약혼녀가 있는 영득이란 청년이 주색잡기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다. 마음을 다잡아보려 해도 파멸의 수렁에 빠질 뿐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넉넉지 않은 생활을 하는 정순의 아버지가 한푼 두푼 저축한 돈으로 영득의 빚을 청산해 주며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영득과 정순은 달이 휘영청 뜬 밤길을 거닐며 결혼하여 알뜰하게 생활하고 저축하여 행복한 삶을 살자고 서로 다짐한다.

<월하의 맹세>에서 윤백남은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았으며 촬영은 일본인 오오따가 맡았다. 배역은 민중극단 소속 배우들인 이월화, 권일청, 문수일, 송해천 등이 출연했는데 이중 이월화는 여배우가 귀하던 시절 <월하의 맹세>와 이어 <해의 비곡>에 출연하여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가 되었다.

※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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