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후, 중년의 황철 월북 후, 중년의 황철
 월북 후, 중년의 황철
<김옥균>으로 최고의 해를 보내던 황철에게 한 해가 저물기 직전 암운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1940년 12월 22일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되어 아랑도 총독부의 통제 하에 움직이게 되었고, 12월 24일에는 청춘좌에서부터 호흡을 함께 맞췄던 아랑의 간판 여배우 차홍녀가 북선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천연두로 사망한 것이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황철에게 차홍녀의 죽음은 동료를 잃은 것 이상의 아픔이었고, 조선연극협회의 가입은 씻을 수 없는 친일 부역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1941년 1월 27일 아랑에서는 일제의 국민연극인 <인생설계>를 공연했다. <인생설계>는 과학자들이 출연하여 과학의 중요성을 선전하는 연극이었다. 황철은 과학자 중 한 명을 맡아 연기했다. 배우로서 친일 부역의 시작이었다.

1942년 초에는 총독부 국책연극인 <삼대>에 출연했다. 카프 출신인 송영이 쓰고 안영일이 연출한 <삼대>는 일제의 전쟁 상대국인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저지를 악행을 고발하는 내용의 연극이었다. <삼대>의 남선 순회공연이 끝나고 황철은 영화에 출연한다.

생애 두 번째 영화 <젋은 모습> 출연

@BRI@1943년 개봉된 <젊은 모습>은 황철의 생애 두 번째 영화 출연이었다. 당시는 일제의 국책영화만이 만들어지던 시절이었다. 영화의 통제는 1942년 총독부 주도로 조선 내 모든 영화사를 통폐하면서 시작되었다.

<젊은 모습>은 총독부 통제회사인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제작하고, 일본인 감독 도요다 시로(豊田四郞)가 연출한 작품이었다. 황철은 이 작품에서 학생들에게 철저한 황국신민이 되라고 가르치는 조선인 중학교 수학선생 역을 맡았다. 함께 출연한 배우는 문예봉, 복혜숙, 이금룡, 서월영, 최운봉 등 조선 영화계의 대표 배우들과 일본인 배우들이었다. 황철의 두 번째 영화는 그의 친일 경력의 결정판으로 시대를 탓하기에 씁쓸한 맛을 남긴다.

영화산업의 통제와 마찬가지로 무대예술 부문의 통제 또한 강화되었다. 총독부에서는 1942년 7월,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하여 '조선연극문화협회'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총독부와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의 '국민연극경연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황철이 이끄는 아랑도 매회 참가했다. 참가만 한 것이 아니라 매회 상을 휩쓸어 갔다. 특히 황철은 세 번의 대회에서 모두 남자 연기상을 수상했다.

1942년 1회 대회 출품작은 김태진 작, 안영일 연출의 <행복의 계시>이었다. 무의촌을 배경으로 의료보급을 선전하는 작품이었다. 1943년 2회 대회에는 박영호 작, 안영일 연출의 <물새>를 출품했다. 어촌을 배경으로 해군 지원병제를 찬양하는 작품이었다. 1945년 3회 대회에 출품한 작품은 김승구 작 김영일 연출의 <산하무정>이었다. 순박한 산골의 삶을 따뜻하게 그린 작품이었다.

1930년대, 동양극장이 상업극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1940년대 아랑은 당대 최고의 작가, 연출가, 배우가 어우러져 최고의 앙상블로 수준 높은 연극을 만들어냈다. 그중 친일 연극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 말기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아랑에서 친일 연극을 만들었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아랑을 수준 높은 연극 단체로 만드는 데에는 극단을 이끈 황철의 힘이 컸다. 그는 낙천적이고 원만한 성격으로 단원들을 융화시켜 최고의 극단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황철에게 여자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였다. 인기스타로 여자가 끊이지 않았고, 바람기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생들과의 관계라면 당시의 관례상 의례히 넘어갈 문제였지만 선배 양백명의 아내이자 부인 이정순의 친구인 문정복과 바람이 난 것은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조선연극문화협회가 나서서 문정복을 제명시키고, 황철은 그의 인기를 감안하여 시말서를 제출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여자 문제로 인해 망신을 톡톡히 당한 것이다. 황철은 후에 문정복과 결혼한다.

해방의 공간, 조선 제일의 배우 황철의 선택은?

북한에서 무대에 선 황철 북한에서 무대에 선 황철
 북한에서 무대에 선 황철
1945년 8월, 해방이 됐고 아랑은 해산했다. 해방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었고 이는 여러 정당 및 사회단체의 조직화로 나타났다. 최초 해방공간의 주도권은 짧은 기간 조직화를 이룬 좌익에게 돌아갔다. 좌익연극인들은 연극건설본부,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 연극동맹 등의 단체들을 조직하면서 목소리를 키웠다.

황철은 극작가 함세덕, 배우 서일성 등과 1945년 9월 낙랑극회를 조직했다. 창단 공연은 11월 1일 독일의 극작가 쉴러의 작품을 함세덕이 번안하고 연출한 <산적>이었다. <산적>의 성공에 힘입은 낙랑극회에서는 김사량 극본의 <호접>, 함세덕 극본의 <기미년 3월 1일>, 중국 작가 조우의 <뇌우> 등을 제작했다.

그러나 신파조의 작품과 미국영화가 범람하면서 낙랑극회의 이러한 작품은 관객의 외면을 받았고, 급기야 극장 대관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연극 공연이 어려울수록 연극인들은 좌익으로 쏠렸고 극장을 연극인들에게 준다는 소문이 돈 북한을 동경했다.

조선 제일의 배우라는 황철은 좌익 연극인들의 대표기관이던 연극동맹에 그 이름을 올렸다. 1946년 11월, 황철이 남로당 결성대회에 연극인 대표로 축사를 하자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해 12월에는 연극동맹 서울지부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3월, 황철은 파업 선동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고, 1947년 7월에는 좌익문화단체를 아우르고 있던 문화단체총연맹에서 조직한 문화공작대로 지방 순회를 다녔는데 춘천 공회당에서는 우익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면서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시작되었다. 연극동맹과 같은 좌익 단체에 가입한 혐의만으로도 체포되었다. 황철은 연극동맹 가담 혐의로 체포된 후, 경찰청에 다니는 친구의 도움으로 정치집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그리고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여 북한을 시찰한 후 8월 월북한다.

월북 후에도 여전한 인기... 6·25 전쟁 때 문화공작대 활동하다 오른팔 잃어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공산주의 사상은 티끌만큼도 없었던 황철은 월북 후, 사리원 형무소에 수감되어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 몇 개월간의 교육 후, 북한의 국립극장에 배속되어 연기를 재개했다.

평양에서도 황철의 인기는 대단했다. 같은 배역을 황철과 배용이 번갈아 가며 공연했는데 황철이 공연할 때는 표가 없어 입장할 수 없을 정도로 매번 만원이었던 것에 반면 배용이 공연하는 날은 객석이 절반은 비었다.

평양에서 황철은 1949년 <을지문덕>, <어느 한 나라>, <백두산> 등에 출연했다. 특히 코르네추크 작, 최건 연출의 <외과의 크레체트>에서 시당 위원장 역을 연기하여 배용, 이단, 박영신과 함께 공로메달을 수여 받았다. 1950년에는 신고송 작, 김순익 연출의 <불길>에 황인성 역으로 출연했다.

황철은 1950년 6월부터 촬영이 시작되는 국립영화촬영소의 영화 <땅>에 주인공 곽바위 역으로 출연한다. 그의 세 번째 영화출연이었다. 소련정부의 다대한 지원으로 건설된 평양의 국립영화촬영소는 최신식 스튜디오와 녹음실 등을 갖추고 최신식의 기재를 보유한 최신의 영화촬영소였다. 1947년 공사가 시작되어 <땅>이 제작되던 1950년에는 대부분의 시설이 완성되었다.

영화 촬영이 한창이던 6월, 전쟁이 터졌고 7월초에는 서울해방 공연을 위해 영화촬영이 중단되었다. 촬영이 잠시 중단된 황철의 마지막 영화는 끝내 제작되지 못했다.

황철은 서울해방공연에서 서울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황철은 훗날 "박수 소리라기에는 너무 크고 열광적이어서 마치 극장이 무너지는 듯한 음향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해방공연 후 예술인들은 문화공작대로 편성되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황철은 평택에서 수원으로 가는 도중 비행기 폭격으로 오른팔을 잃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황철은 1951년 4월 국기훈장 2급을 수여 받는다. 문화예술인 중 오직 7명에게만 수여된 것으로 함께 수여 받은 이는 이기영, 한설야, 이태준, 임화, 조기천, 최승희로 해당분야의 최고들이었다.

친일과 월북, 두 가지 금기로 전설이 된 황철

오른팔을 잃고 <이순신 장군>에 출연한 황철 오른팔을 잃고 <이순신 장군>에 출연한 황철
 오른팔을 잃고 <이순신 장군>에 출연한 황철
황철은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헝가리에서 제작된 의수를 착용하여 무대에 다시 섰다. 1953년 조영출 작 <이순신 장군>에서 황철은 이순신 역을 맡아 의수를 낀 채로 연기하였다. 관객들이 황철의 오른팔이 의수임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열연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투지로 1955년 8월,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다.

이후, 황철은 국립극장 총장과 교육문화성 부상으로 행정에 관여했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서 정치에도 관여했다.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면서 평양연극영화대학교 겸임교원으로 강의도 하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연극이론서인 <무대화술>과 <분장론>을 저술했다.

1960년에는 영화 <춘향전>에서 변학도 역을 맡아 생애 마지막 영화 출연을 한다. 오른팔을 잃은 후 출연하는 것임으로 황철은 영화배우로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영화 출연 다음해인 1961년 6월 9일, 황철은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53년의 남로당 숙청과 1956년의 종파 숙청도 무사히 살아남았고, 최고의 위치에서 사망했기에 월북 예술인 중 편안한 말로라 할 수 있다.

황철의 생애는 우리의 현대사만큼이나 굴곡이 많았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는 법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황철을 끄집어내어 되새기는 것은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동양극장의 화려함을 추억하기보다는 친일과 월북이라는 우리 사회 두 가지 금기를 극복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황철은 전설이 아니라 평가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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