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이승엽과 마해영의 동점과 역전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한국시리즈를 제패하기까지, 라이온즈는 또 다른 의미에서 불운한 팀의 대명사였다. 최강의 전력을 가지고도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컨대 인천처럼 80년대와 90년대 내내 우승권 근처에도 접근하기 어려웠던 지역의 야구팬들에게 '한국시리즈의 불운'이라는 라이온즈의 푸념은 사실 배부른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를 거쳐 우승하지 못했을 뿐, 이미 우승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사상 가장 압도적인 우승을 만들어낸 것은 85년의 삼성 라이온즈였다.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우승팀이 한국시리즈를 치러 우승팀을 가리던 그 해, 라이온즈는 전기와 후기를 모두 석권함으로써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를 무산시키며 9월 17일에 재빨리 우승컵을 가져가버렸다. 적어도 그 해 만큼은 어느 팀도 '가을에 야구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 해 라이온즈가 110경기에서 올린 77승 1무 32패, 0.706의 승률은 그 앞과 뒤를 통틀어 가장 높은 승률이었다. 그나마 전기리그 우승으로 이미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은 후기리그에서는 2진급 선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페이스조절을 했기 때문이지, 전기리그만의 승률은 0.725에 달했다. 그 해 라이온즈 거침 없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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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라이온즈의 영웅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마운드의 쌍두마차와 타선의 쌍두마차로 구성된 '4인방'이었다. 마운드에서는 각각 25승을 올린 공동다승왕 김시진과 김일융, 타선에서는 홈런, 타점, 승리타점 3관왕 이만수와 타격, 출루율 2관왕 장효조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그 해 다른 어느 팀보다도 날카로운 창과 강한 방패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가을 야구의 무산'이라는 허탈한 결과를 가져온 '모순'이었다. 그 해 그들은 정말 거침없이 내달렸다. 4월 11일부터 27일까지 11연승을 내달린 끝에 6월 12일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고, 8월 25일부터 9월 17일까지는 다시 13연승을 기록하며 후기리그와 통합우승 축포를 쏘아 올렸다. 심지어 한국시리즈를 준비하기 위해 2진급 멤버들을 대거 가동하며 여유를 부리던 후기리그에서는 8월 6일부터 4.5경기차로 앞서던 선두 롯데 자이언츠와의 5연전에서 생각지 않은 5연승을 거두고 반경기차 선두로 나서면서 '내친 김에'를 떠올리기 시작했을 정도로, 그들의 페이스는 '스스로도 주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어쩌면 그 해라면 김시진과 김일융, 장효조와 이만수 중 한두 명이 중간에 부상으로 이탈했다고 하더라도 라이온즈가 우승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넷을 제외한 다른 선수 중에 누군가가 이탈한다는 것은 별 신경 쓸 것도 없는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프로야구에서 처음 나타난 전문마무리 권영호가 없었다면, 그 해 역시 20승으로 '짱짱'했던 최동원의 롯데 자이언츠와 만났을 한국시리즈 결과를 장담하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대개 토너먼트로 치러졌던 고교와 대학야구, 그리고 기껏해야 한두 바퀴를 돌아가는 풀리그 방식의 실업야구에서 '투수분업'이란 의미 없는 일이었다. 당장 한 경기를 놓치면 짐을 싸야 하는 판에, 어떤 상황이든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가장 실력 있고 컨디션 좋은 투수'를 투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팀은 가장 믿을만한 투수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공을 던지고, 한계가 오면 그 다음으로 실력 있고 컨디션 좋은 투수가 이어받는 식이었다. 이는 프로야구가 개막된 뒤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로 원년 박철순은 팀당 80경기밖에 치러지지 않는 시즌에서 224.2이닝을 던지며 24승을 도맡았고, 83년에는 장명부가 혼자 427이닝을 던지며 30승과 16패를, 84년에는 최동원이 혼자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를 합쳐 31승을 따내는 슬픈 투혼을 토해냈다. 그나마 84년의 자이언츠에서 최동원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무쇠팔' 때문이기도 했지만 임호균, 배경환, 박동수가 '바람잡이'로 등판해서 승기를 잡을 때까지 쉴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한 몸으로 마운드를 지켜냈던 박철순과 장명부의 전성기는 단 한 해의 신화적인 폭발 속으로 사라져갔다. 85년에 나타난 '전문 마무리'란 그런 시행착오로부터 한국야구가 배운 한 가지 교훈이었다. 한 경기를 이겨도 다음 경기에서 지면 제자리걸음이 되는 장기레이스 그리고 전 시즌 우승팀이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꼴찌로 가라앉는 일이 되풀이되는 프로리그에서 한 명의 에이스에게 의존하는 방식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원년 개막전과 최종전에서 이선희라는 영웅에게 매달렸다가 매몰찬 만루홈런의 쓴맛을 본 적이 있는 라이온즈로서는 '마무리'라는 영역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김시진과 김일융의 쌍두마차가 든든했던 선발진이 수준급 투수 한 명을 마무리로 돌리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도 했다. 마무리로 낙점된 권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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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원년 15승으로 다승 공동 2위에 올랐던 권영호가 마무리로 낙점되었다. 무엇보다도 두둑한 배짱에 언제든지 마음먹은 곳에 공을 넣을 수 있는 안정된 제구력이 믿음직했다. 거기다 당시로서는 동료 투수들에게조차 낯설었던, 직구와 똑같은 궤적으로 느리게 기어들며 타이밍을 빼앗는 체인지업 같은 신구질을 결정구로 가지고 있다는 점도 위력적이었다. 물론, '잘 하는 투수는 선발, 못 하는 투수는 구원'이라는 공식이 상식처럼 통하던 그 시절, '전문 마무리'라는 보직이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년 이후 허리 부상을 겪으며 6승대로 추락, 위기감을 느끼던 권영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85년, 그가 거둔 성적은 두 번의 구원승을 포함한 6승과 26세이브. 대성공이었다. 팀의 77승 중 40% 이상이 그의 손을 거쳤다. 물론 그 대부분이 살얼음 승부였다는 점에서 비중은 더욱 컸다. 그리고 그의 존재가 가져온 심리적 여유와 자신감은 그 기록으로 표현되는 것 이상이었다. 본격적으로 연승행진이 이어질 때 선발로테이션에 생긴 구멍을 메우기 위해 몇 번 선발등판을 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시즌 내내 불펜을 지키며 매 경기 한두 이닝을 책임졌다. 그 덕분에 다른 모든 투수들이 한두 이닝의 휴식을 나누어가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김시진과 김일융은 혼자 한 경기를 모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을 뿌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김시진이 거의 처음 필생의 라이벌 최동원을 누르고 승자의 미소를 지을 수 있게 했던 5승의 격차는 권영호라는 조력자의 몫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만큼이었다. 물론 그가 최고의 자리를 오래도록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프로 개막 때 서른 줄을 넘어선 권영호는 선구자였다고는 해도 지는 해였을 뿐이었다. 86년, 청룡의 투수 김용수가 전문마무리로 전업하며 곧장 구원왕을 물려받았고, 권영호는 2인자로 물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사라져간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 뒤로도 해마다 20세이브 포인트 이상을 기록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투구 수는 줄었지만 평균자책점은 낮아지는 관록을 발휘했다. 한국 타자들을 상대로 한 실습으로 자신감을 얻은 김일융이 일본으로 화려하게 복귀하고, 원년 15승 트리오의 다른 한 축인 황규봉이 은퇴한 데다가 김시진이 '한국시리즈 무승'이라는 지긋지긋한 불운에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동안에도 삼성 마운드를 든든히 떠받친 것은 바로 권영호였다. 89년, 권영호는 은퇴를 예약한 '말년고참'이었다. 그러나 김시진과 장효조를 내보냈지만 대신 받아온 최동원과 김용철도 이름값을 해내지 못했던 그 해, 삼성 라이온즈는 그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수렁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삼성 마운드를 떠받친 '말년고참'
 100세이브 달성 기념으로 명예소방수로 위촉된 권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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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를 제외한 85년 우승주역 셋이 떠난 데다가 성준과 김성래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생긴 전력의 빈틈은 생각보다 컸다. 그 결과 7월에는 선동열에게 당한 0-10 노히트노런 패배와 태평양 돌핀스에 당한 4-23의 기록적인 참패를 비롯한 5연패의 치욕을 당해야 했고, 선수와 감독이 성난 관중들에게 사로잡혀 즉석 청문회를 치러야 하기도 했다. 그 해 기록한 0.496의 승률은 94년 이전까지 라이온즈가 기록한 최악의 성적이었다. 그 총체적 난국 속에서도 라이온즈가 끝내 무너져내리지 않고 4위로 중위권에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김성길과 권영호 두 노장과 신인 류명선의 눈물겨운 분투 덕분이었다. 그 해 권영호는 4승과 19세이브를 올렸고, 그 열 아홉 번째 세이브로 통산 100세이브를 완성해냈다. 그 해를 끝으로, 권영호는 마무리의 무거운 짐을 후배 김상엽에게 넘기고 명예롭게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는 라이온즈의 첫 번째 전성기를 소리 없이 지켜낸 주인공이었고, 그 마지막을 마무리한 증인이었다. 그 순간까지 통산기록은 3.06의 평균자책점과 56승 49패, 그리고 100세이브였다. 그가 거둔 100세이브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한국야구사의 중요한 이정표다. 그것은 한 개인의 초인적 능력과 의지로 만든 기록은 아니지만, 박철순과 장명부와 최동원, 아니 거슬러 올라가면 무리한 기대와 요구 속에 사라져간 수많은 고교무대의 명투수들의 희생을 거름삼아 세워진 한국야구의 새로운 자각과 혁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하나의 모험이었던 마무리 보직에서 그가 혹 실패했다면, 또 몇 년 동안 젊은 대투수들이 어깨로 값을 치러야 했을지 모를, 역사의 한 고비를 잘 넘겨준 공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토)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권영호 원조 소방수 마무리 투수 100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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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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