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온즈는 언제나 강팀이었다. 그리고 대개는 최강팀이었다. 그리고 최근 5년 동안 3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명실상부한 최정상의 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라이온즈는 우승과 지독하게 인연이 없는 팀이기도 했다. 무려 여덟 번이라는 최다 준우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팀. 한국시리즈 우승컵 앞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팀. 그것이 바로 라이온즈였다. 물론 '만년 준우승 라이온즈'의 야구에는 매력이 있었다. 라이온즈의 상징인 이만수와 양준혁이 보여준 모습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만수(좌)와 양준혁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라이온즈의 역대 선수들 중에서 이만수를 능가하는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만수가 위대한 성적을 남긴 선수여서만은 아니다. 물론 최초의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비롯해 그가 우리 야구사에 남겨놓은 업적을 일일이 떠올린다는 것이 오히려 새삼스러운 일일 정도다. 그러나 140개로 통산 4위에 올라 있는 병살타가 말해주듯 이만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한 번씩 '김을 빼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오히려 지금 떠올리면 이만수의 매력이란 홈런을 치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겅중겅중 뛰어오르다가도, 다음 수비 때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면 자신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얼굴을 구기던 그 천진한 표정이었다. 현역 선수 중 팬들의 절대적 지지라는 면에서 이만수에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인 양준혁 또한 그렇다. 사실 열 두 시즌이나 3할 대를 치고 있는 정교한 타자인데도 그의 이미지는 '무지막지한 도끼질'이다. 그것은 데뷔 첫 해 홈런 2위에 올랐던 그 무지막지한 홈런포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고, 공을 맞추든 비켜가든 보는 즐거움을 주는 그의 '만세타법'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그 역시 조만간 선배 이만수의 기록을 넘어설 것이 확실한 병살타 행진을 벌이고 있기도 하지만(통산 134개 6위), 어쨌든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투박한 이미지가 그의 중요한 인기비결 중 하나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라이온즈는 압도적인 힘으로 리그를 지배했지만 마지막 순간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달려드는 배고픈 도전자에게 무릎을 꿇는 '빈틈이 있는 강자'의 모습으로 우리 야구사의 드라마에서 항상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왔다. 김유동 앞에 무릎 꿇은 이선희가 그랬고, 최동원 앞에 무릎 꿇은 김시진이 그랬다. '최강 라이온즈를 꺾은 투혼의 드라마'가 한국 프로야구리그를 열광시킨 에너지였다면 마지막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최강자가 남몰래 훔쳐내는 눈물은 그 온기를 전해주는 페이소스였다. 그래서 라이온즈는 최강의 팀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팀이었다. 라이온즈가 초조해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불운은 10년이 넘도록 반복되었고 라이온즈 선수들 스스로 그것을 '불운'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세월이 흘렀다. 최강자의 눈물에 보내던 위로와 격려의 박수는 이제 '배부른 사자'와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비아냥거림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 선동열이라는 절대강자를 앞세운 해태타이거즈의 벽은 더 단단해졌고 라이온즈의 라인업은 예전 같지 않았다. 이만수와 장효조의 자리를 김성래와 강기웅, 양준혁이 이어간 타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원년 황규봉, 이선희, 권영호의 '15승 트로이카'에서 85년 김시진, 김일융의 '25승 원투펀치'로 이어지던 압도적인 마운드를 대신하기에 김상엽과 성준은 부족했다. '반칙'이라는 평가까지 듣던 선수구성이 이제는 '마운드만큼은 기우는 감이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까지 낮아져 있었던 것이다. 93년 한국시리즈는 라이온즈가 '객관적 전력 면에서 열세'라는 평가를 받으며 임한 첫 번째 한국시리즈였다. 그 해 타격, 홈런, 타점 부문을 경쟁적으로 휩쓴 김성래와 양준혁을 앞세운 타선은 훌륭했다. 그러나 다승왕 조계현을 필두로 송유석, 김정수, 이강철, 이대진까지 5명의 선발투수와 완벽 마무리 선동열까지 6명의 10승대 투수를 배출한 해태타이거즈의 마운드는 김상엽, 김태한, 박충식으로 맞서는 라이온즈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야구는, 특히 한국시리즈는 투수놀음이 아니던가.
 박충식 선수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1차전과 2차전을 각각 나눠가진 두 팀이 각기 승부의 고비라고 생각하며 맞선 대구구장 3차전 양팀의 선발은 문희수와 박충식이었다. 그 해 14승을 올린 신인 박충식의 성적이 나았지만 '가을까치' 김정수에 버금가는 한국시리즈의 사나이 문희수 쪽의 경험도 만만치 않았다. 결과는 6회까지 1-1의 팽팽한 균형이었다. 그 때 해태 김응용 감독은 선동열을 마운드에 올리는 강수를 두었다. 삼성의 덕아웃과 응원석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TV 앞의 삼성 팬들은 '김응용'과 '선동열'이라는 이름이 뒤섞인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선동열은 단 한 개의 공도 던지지 않은 순간부터 이미 경기의 흐름을 움직이는 투수였다. 더구나 93년은 선동열이 가장 빛났던 해였다. 92년 부상 때문에 85년부터 91년까지 7년간 독식해오던 방어율 타이틀을 내놓았던 그는 93년 바로 그 시즌 126.1이닝동안 0.78이라는 비현실적인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되돌아왔다. 게다가 세이브 포인트 부문에서 최초로 40을 돌파해 41을 기록하면서, '더 강해져서 돌아온' 선동열이었다. 그런 선동열의 공을 때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타자도, 맞상대해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투수도 없었다. 상대팀 감독으로서 최선의 대안은 '선동열이 없는 사이에 승부를 결정짓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드라마다. 박충식은 선동열이라는 이름 자체를 모른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공을 뿌려댔고 타이거즈 타자들은 차례로 공 서너 개에 한 명씩 타석을 돌아 벤치로 향했다. 어떤 이는 '화랑 관창이 백전노장 계백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저렇지 않았겠느냐'고 표현하기도 했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에게 위축된 것은 오히려 선동열이었다. 선동열은 7회에 먼저 한 점을 실점하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10회가 끝난 뒤에는 어깨통증을 호소하며 먼저 마운드를 내려갔다. 박충식도 8회에 한 점을 내줘 점수는 2-2. 그러나 삼성 응원석은 완승의 분위기였다. 선동열에 맞서서 지지 않은 경기라면 누가 올라오든 이길 수 있다는 것이 모두의 확신이었다. 반대로 타이거즈 쪽은 불안의 그림자가 감돌았다. 그 순간 선동열도 고개를 젓고 내려간 해태 마운드에 올라온 것은 '마당쇠' 송유석이었다. 버둥거리는 듯한 어설픈 동작으로 던지는 송유석의 공은 선동열의 공에 비해 너무 쉬워 보였다. 라이온즈 응원석은 연신 '날려버려'라는 함성으로 넘실댔고 그것이 김성래든 양준혁이든 혹은 이종두나 강기웅이든 한 번만 걸리면 경기가 끝나리라는 확신이 전염되었다. 그런 승기를 업고 11회 마운드에 오른 것은 또다시 박충식이었다. 응원석에서는 환호성과 함께 걱정스런 수군거림이 낮게 깔려 들었다. "쟤, 괜찮을까?" 이미 권영호 투수코치는 두 번이나 마운드에 올랐다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돌아선 뒤였다. 박충식은 마저 던지겠다고 고집했고 구위도 좋았다. 바꾼 투수가 더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마음을 결정하기 쉽지 않은 것이 코칭스태프다. 게다가 그냥 경기가 아닌 한국시리즈였다. 싱커를 주무기로 하고 직구는 기껏해야 140을 넘기지 못하는 잠수함 투수였지만 박충식은 보기 드물게 공격적인 투수였다. 그래서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순간 유인구를 생략하고 3구를 가운데로 찔러 넣는 버릇이 있었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3구 삼진'이었다. 물론 그런 섣부른 승부가 노련한 상대에 걸리면 아쉬운 굿바이홈런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 못 말릴 근성으로 그는 11회 마운드에 올랐다. 11회부터 15회까지 대구경기장은 침 한 번 삼킬 겨를이 없는 진공상태였다. 회가 갈수록 박충식의 손을 떠난 싱커는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꿈틀거렸고 쉴 틈 없이 공략해대는 세 개의 스트라이크에 호흡을 놓친 해태의 타자들은 제 방망이에 화풀이를 하며 돌아섰다. 송유석 역시 이날의 숨은 주인공이었다. 그의 '만만한 공'을 삼성의 타선은 홈런은커녕 단 한 개의 안타로도 연결하지 못했다. 그 날 선동열을 압도한 공을 던진 투수는 박충식 외에도 송유석이 있었다. 그런 숨 막히는 투수전 끝에 15회말 라이온즈의 공격이 마무리되고 경기는 무승부로 결정났다. 3차전까지 두 팀 모두 1승 1무 1패. 그러나 라이온즈 선수들은 승리 못지않은 자축의 악수를 나누었다. 100개가 넘는 공을 던진 선동열은 이제 최소한 두 경기는 나오지 못할 것이었고 매 경기 선동열이 나타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는 조바심에서 일단 해방될 수 있었다. 게다가 문희수도, 송유석도 당분간은 만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온즈가 소모한 것은 오직 박충식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이온즈는 3차전의 기세를 몰아 4차전을 승리하며 먼저 2승 고지에 올랐지만 5차전부터 다시 살아난 선동열과 야구천재 이종범, 해결사 김성한의 활약에 내리 세 판을 내주며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박충식의 투혼으로 채 따라잡을 수 없는 타이거즈의 저력이었다. 그러나 3차전에서 박충식이 무려 181개의 공을 던지며 불사른 투혼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라이온즈가 우승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했고, 승부가 갈리는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고 힘을 낼 수 있는 하나의 역사이며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박충식의 투구모습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뒷날 라이온즈가 우승 고지에 올라섰을 때도 그 과정은 항상 치열하고 험난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던 6차전에서 이승엽과 마해영이 9회말에 연출했던 동점과 역전 홈런쇼, 비록 준우승이었지만 2004년에 연출한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노런과 현대와의 9차전 혈투 그리고 이번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한화와 연출한 명승부. 단순히 강한 전력만으로 올라설 수 없는 것이 한국시리즈 정상의 자리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한 호흡이 필요한데 그 호흡을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집념이며 내공이다. 이제는 최강자일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강한 집념을 놓지 않는 사자들의 마지막 호흡에 겹쳐지는 것은 언제나 이선희와 김시진의 눈물과 한이기도 하지만 박충식의 거친 호흡이기도 하다. 그 해 박충식에게 붙은 별명은 '아기사자'였다. 곱상한 외모로 이 악물고 던져대는 투혼의 공에서 멀지 않은 미래에 세상을 호령할 사자왕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아마도 94년도에 상영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이 한 해 앞당겨 개봉했더라면 훗날 이승엽에게 붙을 별명 '라이언 킹'이 그의 것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포효해 잠든 사자들을 깨운 아기 사자, 박충식. 박충식은 다음 해인 94년 이후로도 다섯 시즌 연속 10승 안팎의 활약을 이어나갔고(방위병으로 복무했던 95년과 96년에도 9승과 8승을 올렸다) 팀의 중심투수로서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별명은 끝내 사자왕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아기사자'에 머물렀다. 그것은 9시즌 만에 은퇴하고 투수코치로 변신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십 년 쯤 후배들과 뒤섞여 있어도 눈에 띄는 앳된 얼굴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제까지나 팬들과 후배 선수들의 기억 속에 살아 기억될 그 패기 넘치는 181구 때문이다. 잠자는 사자를 일깨워 '21세기 최강팀'으로 군림하게 한 것은 수십억짜리 선수영입 이전에 93년 겁 없는 아기사자가 던졌던 무모한 181구였다.

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토)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