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프로야구선수로 등록된 사람은 5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매년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700명 이상의 야구선수들이 각 구단의 낙점에 목을 매달며 그 중에 70명 안팎의 선수들이 지명을 받아 프로선수가 된다. 물론 매년 그 숫자만큼의 선수들이 자의로, 혹은 타의로 유니폼을 벗는다. 그리고 그 중에 1군에 등록되어있는 선수가 200여명이고, 그 중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다시 그 절반을 조금 넘는다. 그 중에 잘해서든 못해서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이름을 남기는 선수가 다시 절반 쯤 될 것이고, '성공적인 선수생활'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선수가 또 그 절반쯤이 된다. 이쯤 되면 프로야구선수란 한국사회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치열한 경쟁의 무대에서 '신인왕'이라는 타이틀이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다. 그것은 서울대에 합격했다거나, 고시를 패스했다거나, 혹은 어느 대기업 창사 이래 최연소 과장 승진을 했다거나 하는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눈부신 훈장임이 틀림없다. 선수들이 MVP보다도 탐을 내는 것이 신인왕이라는 말도 있다. MVP야 몇 번이라도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신인왕이란 일생에 단 한 번 노려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인왕을 수상하는 이동수 선수 신인왕을 수상하는 이동수 선수
 신인왕을 수상하는 이동수 선수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이동수라는 선수가 있었다. 1995년 신인왕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아주 특이한 신인왕이었다. 프로선수가 된 지 5년 만에 받은 신인왕이었고, 고졸 타자 출신으로는 첫 번째 신인왕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특별히 '중고신인왕'이라고 불렀다. (프로선수가 된 지 5년이 넘지 않았고, 그 사이에 60타석이나 30이닝 이상 뛰지 않은 타자와 투수는 신인왕 자격이 유지된다.) 그러나 어느 해 신인왕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성적과 묵직한 존재감으로 얻은 성적이었다. 그 해 그가 남긴 성적은 화려했다. 거의 전경기에 나서 2할8푼8리의 타격에 홈런 22개를 기록했다. 홈런이 흔치 않던 시절, 25개를 때린 김상호에 이어 2위의 기록이었다. 게다가 홈런 하나하나의 무게감도 신인답지 않았다. 꼭 필요한 순간, 극적인 순간에 그의 홈런은 작렬했다. 라이온즈 팬들이 결코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95년 7월 25일 대구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는 빙그레 이글스 투수 이상목의 구위에 눌려 3-6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새 9회말 체력이 다했는지 무사 1, 2루에 주자를 남겨놓은 채 내려간 이상목을 대신해 마운드에 올라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패의 신화'인 구대성이었다. 구대성은 주자를 2, 3루로 진루시키는 대신 아웃카운트 두 개를 뺏어냈고, 껄끄러운 3번 타자 양준혁에게 유인구를 연달아 던진 끝에 볼넷으로 내보내 만루를 만들었다. 이제 이동수의 차례였다. 3점차로 뒤진 9회말, 투아웃 만루.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 구대성과 맞선 타자. 비록 세대교체 바람을 타고 4번을 차고는 있었지만 2군에서만 4년을 보내고 올라온 무명신인 이동수의 이름값이 너무 가벼웠다. 이따금 '동수야, 날려버려라'를 외치는 대구 아저씨들의 객기어린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역시 삼성 응원석에서도 감히 홈런까지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저 안타 한개, 그리고 다음 타자에게서 동점의 기회를 노린다면…. 어쨌거나 죽지만 말았으면…. 홈런이 아닌 어떤 것으로도 승부를 직접 뒤집을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살아나가지 못한다면 그대로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 그나마 조금 마음 넉넉한 쪽은 빙그레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양쪽 모두 손에 땀을 쥐며 숨을 죽여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긴 생각에 오래 가슴 떨 필요도 없다는 듯, 시원스럽게 휘두른 방망이는 '딱' 하고는 첫 번째로 날아든 구대성의 공을 펜스 너머로 날려버리고 말았다. 굳이 따지자면, '투아웃 상황에서 나온 1점차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 패배의 절망감을 일순간 승리의 마침표로 뒤집어버리는, 그야말로 극적인 그런 장면은 이전까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던 진풍경이었다. (그로부터 일곱 해가 지나서야 롯데의 김응국이 한 번 더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 해 삼성 최고의 영웅 이만수는 프로 14년차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는 포수 대신 지명타자나 대타로만 출장하고 있었다. 10년을 넘기면서 뚝 떨어진 페이스는 헐크(이만수의 별명)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도 비슷한데다 몸집이며 얼굴까지 꼭 닮은 이동수라는 신인이 나타나, 마치 이만수의 '기'라도 물려받았는지 꼭 닮은 꼴의 극적인 홈런포를 터뜨려댔던 것이다. 그래서 삼성 팬들에게 이동수는 단순히 '꽤 잘하는 신인'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만수와 이동수가 나란히 홈런이라도 터뜨려 이긴 날이면, '만수가 북치고 동수가 장구쳤다'며 흐뭇해했고, 항간에는 이만수와 이동수가 형제라거나 사촌간이라거나 하는 소문이 끈질기게 흘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아온 봄날이 그리 길지는 못했다. 그 해 겨울, 길었던 2군 시절 아버지고 형이고 선생님이었던 2군 감독 김충이 방출되자, 의지할 곳을 잃은 이동수는 심리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때맞춰 잠시 자리를 내주었던 김한수가 방위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고, 이런저런 부담 속에 이동수의 3루 수비는 실책을 남발했다. 애초에 너무 강한 경쟁자들 때문에 1루수에서 밀려나 3루수로 전향했던 이동수는 그나마 3루라는 수비위치마저 잃게 되자 경기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지명타자는 아직은 '썩어도 준치'인데다 실력을 떠나 함부로 넘보지 못할 이만수가 버티고 있었기에 이동수에게 허락되는 자리는 고작 하루 건너 한 번 쯤 대타 역할이었다. 당연히 출장시간은 줄었고 감각이 흐트러진 방망이도 들쭉날쭉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겪는다는 '2년차 징크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동수의 경우 주변의 과도한 기대와 상대팀들의 집중분석이라는, 남들 다 겪는 요인보다는 심리적 동요와 수비력의 한계라는 근본 원인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진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다.
기아 시절의 이동수 선수 기아 시절의 이동수 선수
 기아 시절의 이동수 선수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결국 삼성은 97년 시즌 중 롯데로 이동수를 넘겼고, 롯데는 이듬해 그를 다시 쌍방울로 되팔았다. 당시 쌍방울은 모기업의 부도로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었고, 박경완, 김기태, 조규제, 김현욱 같은 주축 선수들을 팔아치워 근근이 선수단을 꾸리고 있었다. 숙박비를 아끼느라 원정 경기날은 당일에야 버스로 이동했고, 경기 후에는 마음 편하게 샤워 한 번 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아직 보호받고 지도받으며 성장해야 할 이동수는 거친 들판에 홀로 내던져졌다. 끈질긴 재기의 노력 끝에 작은 결실도 없지 않았다. 99년 시즌, 그는 그 산만한 환경에서 3할 2푼의 타격에 19개의 홈런을 날리며 부활했고, 첫 해의 활약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입증했다. 그러나 여전히 수비력의 빈틈 때문에 그의 몫은 지명타자 외에는 없었고, 100kg에 육박하는 거구 때문이겠지만 일 년에 한 개 나올까 말까 한 도루 때문에 기동력이라든가 작전수행능력과는 상극인 선수였다. 그래서 그의 존재는 어느 감독이 보나 '내가 쓰기에는 어렵고, 남 주기에는 아까운' 계륵이기 쉬웠다. 역시 쌍방울을 사들인 SK는 곧 이동수를 해태로 넘겼고, 해태는 하필 두 해 전의 쌍방울처럼 모기업 부도를 겪고 있었다. 해태를 사들인 기아는 새 팀을 정비하면서 다시 이동수를 두산으로 넘기게 된다. 글로 쫒기에도 정신없는 그 세월 속에서 이동수라는 능력 있는 선수는 정체했고, 무뎌졌고, 결국 퇴보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저니맨(떠돌이)'이란 '무능'한 선수가 아니라 '불운'한 선수의 운명이다. 그들은 여러 번 버려지지만 그것은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다른 선수와 바꿀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딱히 맞는 수비위치나 타순이 없거나 있어도 그 팀과 궁합을 맞추지 못한 '팔자'가 불운의 빌미가 될 뿐이다. 그래서 '중고신인왕'과 '저니맨'이라는 뚜렷한 기억 사이에서 이동수라는 선수가 걸었던 세월들을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초년의 성공에 도취해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도 아니고, '우연한 성공을 이어갈 능력과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14년간의 프로생활동안 2군 맨 밑바닥에서부터 망해가던 두 팀의 땀내 나는 라커룸을 전전하면서도 동시대 500여명의 프로야구 선수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눈물겨운 노력과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신인왕 트로피는 그 막막한 고행의 과정에서 운 좋게 마주한 짧은 위로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내일의 영광을 꿈꾸며 오늘의 고통을 감수한다. 그러나 애초에 내일의 영광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도전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삶을 돌이켜 원 없는 도전이고 노력이었다고 느낀다면 그걸로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4년간 이어진 이동수의 거친 도전이 단 한 해 신인왕의 업적 때문에 거꾸로 폄하되기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억울하고 불공평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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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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