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5월 5일 광주구장. 9회 초 투아웃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4번 타자 김진우가 타석에 들어섰다. 스코어는 5-0. 볼넷이 세 개 있기는 했지만 점수를 한 점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안타도 내주지 않았다. 분명히 말로만 듣던 '노히트노런'의 상황 직전까지 와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홈의 광주 팬들마저 '하나만, 하나만'하는 기도보다는 '설마, 설마'하는 혼잣말을 흘려대고 있었다. 마운드에 선 투수가 강속구 투수 이상윤도 아니고 일본에서 모셔온 주동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태 타이거즈 마운드에 선 투수는 '패전 처리 투수' 방수원이었기 때문이다. 방수원은 고등학생 시절 꽤 이름을 날리던 변화구 투수였다. 순진한 고등학생 타자들은 던질 때마다 휘고 꺾이고 흔들리며 들어오는 그의 공에 연신 헛방망이를 돌렸고 '구질구질한 공'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 '구질구질한' 공으로 당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던 동기 이상윤과 함께 광주일고를 전국적인 야구명문으로 끌어올린 주역이었다. 특히 젊은 투수들은 '빠른 공'에 대한 환상을 갖게 마련이다. 시속 150km짜리 강속구를 던져 타자를 멍청하니 선 채 삼진으로 잡아내는 꿈을 꾼다. 그러나 원체 왜소하고 허약했던 방수원은 아무리 기를 쓰고 던져도 남들 몸 푸느라 던지는 속도 밖에는 나오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별 수 없이 그 시절부터 힘 대신 요령과 수싸움으로 타자를 잡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익힌 것이 이런저런 변화구들이었다. 그러나 프로무대의 타자들은 고교시절과 달랐다. 아무리 현란한 변화구라도 한두 번 접한 뒤 눈에 익히면 어김없이 담장 너머로 날려 보낼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프로무대에서 방수원의 공이 갖는 효용은 '타순이 한 바퀴 돌기 전까지'였다. 말하자면 완벽히 막으면 3이닝, 안타 한 두 개라도 맞으면 2이닝이 그의 시간이었다. 80년대는 선발 - 계투 - 마무리라는 투수들의 역할분담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선수는 선발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불펜에서 '대기조'가 되어야 했다. 물론 방수원도 당당하게 선발투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해태 김응룡 감독은 입버릇처럼 '너는 2회만 던져'를 되풀이했다. 그래서 그는 성적이 좋을 때는 계투요원, 나쁠 때는 패전 처리 투수였다. 그러다가 모처럼 잡은 기회에 실력발휘를 채 못했다 싶은데도 야속하게 공을 뺏으러 감독이 나오면 이번 회라도 마무리해보겠다고 통사정을 하곤 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역시 두 이닝을 근근히 던져대던 방수원이 이제 한계에 왔다고 판단한 김응룡 감독이 마운드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수원 본인은 아직 한참은 더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더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기 시작한 것이 2루 베이스에 뒷꿈치가 걸리고야 멈춰 서게 되었다. 난감한 것은 김 감독이었다. 투수교체 하려고 나왔다가 이리저리 투수를 잡으려고 내야를 헤매다 보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대 쥐어박으려다 생각하니 마침 TV 카메라가 비추고 있다는 생각이 나서 간신히 참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 난감한 꼴을 다시는 당하지 않으려고 대신 투수코치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4년 5월 5일 어린이 날. 모처럼 관중이 경기장에 가득 들어찬 날 투수코치는 방수원에게 선발 등판 준비를 지시했다. 생각지 않게 그 날 선발진에 구멍이 생겼고 별 수 없이 방수원에게 '땜질'의 특명이 떨어진 것이다. 기껏 2, 3이닝을 던지는 게 전문인 데다가 경기 당일에야 통보받은 선발등판에서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웠다. 몸 상태도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감독과 코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해 방수원은 단 한 차례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3회 정도까지라도 막아내고 다음 투수에게 넘기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역시 4회 들어 볼넷을 연발해 상대팀 클린업트리오 앞에 주자들을 모아 두자 감독은 불펜 쪽을 돌아보며 금방이라도 마운드로 오를 듯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움직임이 굼뜨던 불펜 투수들은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다. 감독은 별 수없이 한두 타자라도 더 상대하도록 방수원에게 조금 더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방수원은 다시 마음이 급해졌고 얼른 그 회라도 마무리하자고 '맞춰 잡는' 피칭을 했다. 다행이 그 회는 땅볼과 뜬공으로 쉽게 마무리 되었다. 그는 혹 안타라도 한 개 맞으면 곧장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이를 악물고 '혹성탈출투'를 던져대다 보니 어느 새 7회를 넘기고 8회를 넘겼다. 그 사이 타선에서 다섯 점을 뽑아놓고 보니 한두 점 주더라도 큰 지장 없다는 마음에 감독의 모양도 느긋해졌다. 대신 웅성웅성 번잡해진 것은 중계진과 기록원들이었다. 기록지를 뒤적거리며 '노히트노런'이라는 말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혹시 노히트노런 나오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그러나 기어이 마지막 공이 방망이를 비켜 홈플레이트를 통과했고 포수 유승안이 마운드로 달려나왔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첫 노히트노런이었다. 그 대기록의 비참한 첫 희생자가 되고 만 삼미의 타자들은 '저 혹성탈출 같은 얼굴을 보면 우스워서 어떻게 방망이를 제대로 휘두르겠느냐'는 농담을 던지며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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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수원 투수의 투구모습 |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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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원의 별명은 '혹성탈출'이었다. 워낙 왜소한 데다 살집이 없어 광대뼈며 콧구멍 같은 굴곡이 두드러진 데다가 공을 던질 때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얼굴이 영화 <혹성탈출>에 나오는 고릴라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를 쓰고 던진 공이 아리랑 춤을 추듯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타자들을 허탈하게 했다. 방수원은 그 시즌이 끝날 때까지 더는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했다. 그 해 유일한 그의 승리가 바로 그 노히트노런 게임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학을 중퇴한 채 이른 나이에 올랐던 프로무대에서 불과 여덟 시즌을 던지는 동안 거둘 수 있었던 고작 열 여덟 번의 승리 중에 한 번이었다. 선동렬, 정명원, 김태원, 그리고 송진우, 정민철, 김원형 등 그동안 한국 프로무대에서 작성된 열두 번의 노히트노런은 대부분 불같은 강속구를 기본으로 갖추고 있던 투수들이 만들어낸 기록이었다. 한 경기를 완투하려면 반드시 같은 타선을 세 번 이상은 상대해야 한다. 그런데 그 세 번씩의 승부에서 상대 타자들을 한 번의 어김도 없이 속여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단 한 개의 안타와 점수도 내주지 않으려면 타자가 '알고도 못치는' 압도적인 공을 어느 정도는 섞어주어야만 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역사의 첫 기록은 최고시속 130km 남짓한 방수원의 '구질구질한 공'이 만들어냈다. 물론 그 기록에는 여러 가지 '운'이 겹쳐있었다. 상대가 극심한 타격부진에 빠져있던 최약체 삼미 슈퍼스타즈였다는 점도 그렇지만 좀처럼 선발로 등판하지 않았던 방수원이 필요했을 만큼 선발진에 구멍이 생겼다는 점 그리고 투수 교체 타이밍을 찾느라 부산했던 감독 때문에 간결하게 큰 욕심 없이 맞춰 잡는 빠른 템포의 투구를 할 수 있었다는 점들이 다 그렇다. 그러나 그 이전에 체격과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혹은 우회해보려고 변화구를 가다듬고 오기와 근성을 벼렸던 날들에 더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허약한 공 하나하나에도 온 힘을 집중해 '혹성탈출' 같은 표정을 만들어 상대 타자의 긴장을 무너뜨린 집념과 근성 덕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강속구로 타자들을 을러대는 투수를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그러나 역시 공격과 방어가 제대로 맞서고, 그것을 통해 머리와 머리가 맞서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또 그걸 즐기기 시작하면 승수가 몇이고 삼진 수가 몇이며 전광판에 찍힌 구속이 몇 km인가 하는 것 말고도 야구에서 즐길 거리가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방수원은 그런 아슬아슬한 야구의 재미를 알려준 투수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