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반도>,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한반도> 감상글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교묘한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나 또한 <한반도>를 보면서 닭똥같은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해서 다시 생각해보니, 강우석 감독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진화했다. 내로라하는 배우들과 그들의 연기를 동원해 낡고 폭력적인 주장을 교묘하게 전개했던 이전과는 달리, 민감한 폭발력을 가진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등장시키는 기교를 부린다.

이 과정은 너무 억지스러워서 다시 말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SF영화도 아닌 것이,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엄연한 현실을 너무 마음대로 뒤바꿔버렸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과정을 위해 선택한 설정은 굉장한 폭발력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반일', 그것은 그에게 달콤한 선택이었다.

7천만 한반도인의 가슴을 통쾌하게 만든다?

▲ 영화 <한반도>의 포스터. 이 영화가 과연 7천만을 통쾌하게 할 수 있을까?
ⓒ KnJ엔터테인먼트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기억하시는가? 이 소설에서는 일본이 '감히' 한국으로 쳐들어오는 괘씸한 짓을 한다. 어찌어찌하여 남북합작으로 개발된 핵폭탄은 일본 상공으로 날아간다. 이러니 일본 총리는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할 수밖에…. 그들의 처절한 사과를 본 남한의 대통령은 슬며시 핵폭탄의 낙하 방향을 돌린다. 이런 뉘앙스로 말이다.

"우리는 너희와 격이 달라. 다음부터 조심해"

문화평론가 진중권도 말했던 적이 있지만, 이 소설을 보면서 많은 독자들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린 일본을 이긴 것이다. 저 '악독한 쪽바리'들이 눈물을 흘리고 사죄를 한다.

하기야 그동안 일본인들은 너무 뻔뻔했다. 그 많은 죄를 어찌 갚으려는 것인지, 사과는커녕 잘못을 부인하기 바쁘며, 오히려 잘했다고 설쳐댄다. 이웃나라로 일본을 뒀다는 죄 하나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눈물을 흘린 한국인들, 자연스럽게 일본이 미워지는 것이다. 거기에 '친일파 청산 실패'라는 역사의 비극이 다시 추가되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이라는 말 한마디에 이성을 잃는다.

<한반도>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다를 게 없는 영화다. 일본인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면서 사죄도 시켰고, '친일파'라는 그들을 비판한다. <한반도>를 본 어떤 관객들은 <한반도> 속의 이런 설정들을 언급하며, "혹평의 배후에는 보수언론과 얼치기좌파들이 숨어있다"는 논지의 주장까지 이야기한다.

보수언론을 눈곱만치도 반갑지 않게 여기는 나, 이렇게 '친일친미사대주의자'나 '얼치기좌파'가 되는 것 같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역사 속의 '원죄'와 일본을 이기지 못했다는 강박관념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야를 좁게 만든다.

비판은 다양한 근거와 폭넓은 시각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일'이라는 단어의 위력, 그리고 토론 문화가 여전히 낯설은 한국인들은 비단 <한반도> 논쟁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분야에서 이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로 토론에 임한다. 그러니 어딜 가든 게시판은 불바다가 된다.

이 논쟁은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정리될 수 있다. 일본을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본을 극복하려면 그들이 자랑스레 여기는 분야에서 이기려는 노력이 필요한게 아닐까 싶다. "너는 왜 이런 민감한 시국에 일본만화 리뷰를 쓰느냐"는 핀잔을 들었던 내가 할 말은 아닌 듯싶지만, 당장 일본만화를 보라. '작품성있는' 일본만화를 보면 자세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장인정신'이다.

이거야말로 일본의 장점이다. 그렇듯 그들이 자신스럽게 여기는 분야를 이겨야 진정한 '극복'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장인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지며, 불량식품이 난무하는 한국의 '장인정신'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한국인의 '반일'은 늘 '반짝'에 그친다는 것,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의 장점을 이기려는 고민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역사의 비극을 느끼되, 그속에서 배우려는 것은 없다. '나쁜 놈'에 대한 증오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증오하려면 '꾸준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진정으로 이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래서야 "진정한 일제잔재는 냄비식 반일"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그러면서 친일파의 후예라 비판받는 '그들'이 선거에서 '싹쓸이'하도록 하면서 다시 정권을 노리도록 돕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언제까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이런 작품들에게서 '대리만족'만 느끼며, 늘 그래왔듯이 쉽게 사그라들 것인가? 아이러니의 악순환이다.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들의 근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일본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고찰'이다. "우리가 한 번도 이땅의 주인이 된 적이 없었다"는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장점을 추구하면서 더욱더 상식적인 국가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에 대한 증오, 그리고 강한 국가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 땅의 주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한 강한 국가'냐는 것이다.

▲ 이 총구,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향해 내밀어야 하는 것일까?
ⓒ KnJ엔터테인먼트

국가주의자, '반일'을 빌어 '기회주의자'를 비판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비판'은 저마다 다른 시각에 따라 폭넓게 전개될 수 있다. 국가에 죽고 사는 '국가주의자'도 '기회주의자'를 비판할 수 있다. '보수'를 자처하면서 기득권을 쥐고 있는 그들이, 왜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느냐는 비판도 할 수 있다.

<한반도>는 그들을 비판하고 뒤집으면서, 정부종합청사에 폭탄을 설치하고, 귀중한 문화재도 꺼리낌없이 파헤쳐놓는다. 그뿐인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도 마음대로 바꿔놓는다. 드라마 <궁>도 아니고, 이것 참 난감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작가에게는 창작의 자유가 있다지만, 그 자유에 따른 결과물에 대해서도 비판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한반도>의 '창작'은 도를 넘어섰다.

영화평론가 황진미가 마침 좋은 인용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황진미는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민족주의가 평화주의와 함께하지 않을 때, 그 민족주의는 곧바로 악으로 전환한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는 원래 비합리적이고 뜻도 다양한 개념이라, 함정의 여지도 많고, 방향 설정이 잘못됐을 때는 폭력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한반도>는 혹시 민족주의를 표방한 영화라 할지라도 비판은 얼마든지 전개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다양한 장면들 속에서 "대를 위해 소는 희생할 수 있다"는 폭력과 파시즘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이 반드시 옳기만 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민족주의의 단점이 극단적으로 드러났던 히틀러의 제3제국 역시 잊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강우석 감독은 전혀 변하지 않은 주장을 조금 더 효율적이고 넓게 전파시키기 위해 민감한 국제정세와 '민족의 비극'을 빌려왔다. 100여년 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비극을 바라본 분들이 흘렸던 '이유있는 눈물'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분노는 "강한 국가를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교묘한 주장에 이용당하고 있다. <한반도>가 말하는 우리의 자부심, 우리의 '진짜 국새'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그것을 찾았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이땅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2006-07-25 10:00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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