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화 <한반도>를 봤다. 저명한 감독에 화려한 출연진, 96억이나 하는 거금을 들였음에도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는 바로 그 영화.

내가 영화 <한반도>를 보게 된 이유

▲ 화려한 출연진들 보다 저 위에 붉은 글씨로 박힌 “우리는 한 번도 이 땅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 라는 글귀가 눈에 거슬린다.
ⓒ KnJ엔터테인먼트
솔직히 예고 등을 통해 접했던 영화 <한반도>는 처음부터 매력적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 제목과 카피에서 풍겨오는 짙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냄새가 의심쩍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번도 이 땅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

비록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과연 강우석 감독이 이를 얼마나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스러웠다. 영화 <실미도> 등에서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강우석 감독의 마초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사고가 또 다른 국가주의로 일관해 온 김진명 소설과 만났다면 영화 내용은 명약관화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선택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작년 일본의 독도망언 이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단번에 최고 작품으로 만든 바 있는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가 과연 남과 북, 미국과 일본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 영화를 통해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운 좋게도 영화 <한반도>는 지금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고,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비교적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뭐, 7월 영화 시즌임에도 볼 만한 영화가 변변치 않았다는 사실 또한 나의 <한반도> 선택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영화 <한반도>의 주인공은 대한제국 국새

역사는 반복된다는 전제 아래 구한말의 상황과 지금의 한반도 정세를 오버래핑시킨 후,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개의 현실 판단과 지향성을 대비시켜 민족적 자존심을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영화 <한반도>.

개봉 전 화려한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영화의 중심에는 과거 대한제국의 국새만이 있을 뿐이다. 100년 전 대한제국과의 조약을 근거로 남북 경의선 개통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나선 일본의 요구를 분쇄하기 위해 진짜 국새를 찾아 100년 전 협약들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겠다는 주인공들.

▲ 영화 초반 등장하는 북한은 들러리일 뿐이다. 대한제국의 정통성은 대한민국이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 KnJ엔터테인먼트
국새는 단순히 영화 속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만이 아니다. 감독이 그려내고 있는 국새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의 근간이며 대한민국 주권의 상징이다. 관객들이 그까짓 100년 전 협정 때문에 일본이 우리의 코앞에다가 군함을 들이댄다는 영화의 설정에 비웃다가도, 그와 같은 일이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바로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대한제국과의 연계성, 정통성 때문이며 국새는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경의선 개통의 또 다른 파트너였던 북한이 영화 초반 이후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대한제국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적자로서 대한민국만을 떠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영화 속 배우들의 호연은 영화의 어처구니없는 설정에 힘을 싣는다. 특히 강수연의 열연이 돋보였던 여우사냥, 즉 명성황후 시해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관객들의 감정을 휘몰아치기 위해 이 장면에 등장하는 모든 일본인들에게 한국어 구사 능력을 부여한다. 자막보다는 말이 자극적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드라마보다, 뮤직 비디오보다 사실적이고 잔인하게 묘사된 명성황후의 죽음. 따라서 교과서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익히 명성황후 사건을 알고 있는 관객들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라고 하지만 한 국가의 '국모'를 무참하게 죽이고 마는 일본 제국주의의 그 잔혹함에 관객들은 치를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강수연의 연기는 다행히(?) 영화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 KnJ엔터테인먼트
결국 감독이 기획했던 관객들의 분노는 현재의 일본, 그리고 이들을 돕는 우리 내 세력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만다. 감독은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100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우리들의 적을 직접 규정하고 나선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곧 우리가 배운 대한제국과 하나가 되며 국새는 그 속에서 생명력을 갖게 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고찰, 그 국가주의적 사고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감독이 말하고 있는 100년 전 사건과 지금의 우리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물론 명성황후의 죽음은 대한제국의 몰락을 앞당겼고 일제의 만행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 사건이, 혹은 대한제국의 존재가 결코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헌법은 분명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규정하고 있는바, 과거의 군주국이 현재 공화국의 전신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비록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 명성황후로 대표되는 위정자들은 일본과 청의 총칼을 빌어 오히려 이 땅의 많은 민중을 학살하지 않았던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

유구한 력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림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리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률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령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감독이 말하듯 결코 대한제국의 국새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국가의 정통성은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공동체의 연속성에 근거할 뿐이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우리의 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그 시대 위정자의 정통성 때문이 아니라 이 땅을 기반으로 살아냈던 수많은 민초들의 삶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화에 나타나는 감독의 애국애족은 매우 불편하기 짝이 없다. 감독은 배우들을 시켜 직설적으로 끊임없이 애국애족을 설교하지만 그 국가와 민족 속에는 정작 일상을 영위하는 보통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혹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역사에 관심 없는 불량한 '여편네'일 뿐이며 국새와 옥새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식한 노동자일 뿐이다. 감독은 이상적 민족주의자와 현실적 극우보수주의자를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있지만 그들 모두는 정작 누구를 위해야 할지도 모른 채 국가와 민족을 읊조리는 얼치기 정치꾼일 뿐이다.

<한반도>의 시대정신 어떻게 봐야 할까

▲ 감독은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관객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교한다.
ⓒ KnJ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보며 내내 중국의 장이머우 감독을 떠올렸다. <붉은 수수밭> <귀주 이야기> <인생> 등을 통해 체제를 넘어서는 희망을 이야기하다가 영화 <영웅>을 통해 중화주의자로 커밍아웃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배신감을 안겨 주었던 장이머우 감독. 그러나 그는 결코 변절하지 않았다. 다만 사회주의를 대체할 만한 사회 통합 이데올로기로 중화주의를 선택한 것이며 우리는 그 속에서 중화주의가 갖는 의의와 한계를 발견할 뿐이다. 어쩌면 이는 불온한 이 시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공통된 숙제일 것이다.

다만 강우석 감독이 제시하고 있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중국의 중화주의, 일본의 군국주의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우리는 현재 일본의 군국주의를 걱정하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그 '민족'의 광풍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성찰해야 하지 않겠는가.

글을 마치며 마지막 질문하나. 영화를 보고 나서면서 가장 궁금했던 점은 그 많은 배우 중 문성근의 출연이었다. 그가 맡았던 배역이야 영화에 진지함을 보태기 위해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는 개인적으로 영화 <한반도>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참여 동기는 무엇일까? 배우 개인에게 역사관이나 세계관 같은 거창한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겠지만, 최소한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바 있는 문성근 같은 행동하는 배우라면 한마디쯤 소회를 남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현재 영화 <한반도>는 8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순항 중이라고 한다.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모를 일이다.
2006-07-23 18:2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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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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