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2@한국야구위원회(KBO)는 지난 9일 프로야구 25주년을 기념해 실시한 '포지션별 올드스타' 인기투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포수 부문의 이만수가 2만8천62표(투표자 3만3천783명)를 얻어 전체 최다 득표자가 된 것을 포함해 지명타자 부문의 장종훈까지 10명의 선수가 선정됐습니다.

포지션별 올드스타는 *투수=선동열 *포수=이만수 *1루수=김성한 *2루수=박정태 *3루수=한대화 *유격수=김재박 *외야수=장효조 이순철 이정훈 *지명타자=장종훈입니다.

이들 외에 오는 22일 오후 2시 서울 잠실구장에서 벌어지는 2006 올스타전 식전 행사에 나설 감독 추천선수는 *투수=박철순 최동원 양상문 *포수=유승안 *내야수=김용희 서정환 유중일 *외야수= 김준환 김일권 *지명타자=김봉연입니다.

개인사정으로 출전하지 못하는 이만수를 대신해 포수 부문 2위자인 김경문이 마스크를 씁니다.

일주일이 넘는 기간 많은 야구팬이 참여할 수 있는 경로를 통해 실시한 투표 결과여서 한국프로야구 25년사를 대표할만한 선수들이 망라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선수들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한국프로야구사를 빛냈고,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프로야구도 없었을 것입니다.

25번째 시즌을 맞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한번 훑어보는 뜻에서 199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선수들을 살펴봅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니 빠뜨리고 가는 선수들도 꽤 있을 것입니다.

꼭 살펴봤어야 할 선수 가운데 빠진 선수가 있으면 독자 여러분께서 추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먼저 투수편입니다.

@IMG1@강만식 해태 타이거즈 창단 멤버. 커브가 좋았다.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1985년 선동열 입단전까지 해태 마운드의 한축을 맡았다. 1984년, 85년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계형철 OB 베어스 창단 멤버. 컨트롤에 문제가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장점인 강속구를 살리면서 1980년대 후반까지 OB 주력 투수로 활동했다.

권영호 삼성 라이온즈 창단 멤버. 프로야구 원년 황규봉, 이선희와 함께 나란히 15승을 거두며 삼성 마운드를 이끌었다. 연간 80게임을 한 1982년 시즌 삼성은 54승을 했는데 이 가운데 45승을 이들 3총사가 거뒀다. 1985년 시즌부터 마무리로 변신했다. 포크볼을 잘 던졌다.

김건우 1986년 MBC 청룡 입단. 그해 18승으로 신인왕. 그 때까지만 해도 인기가 있었던 고교야구(선린상고) 스타플레이어 출신. 입단 이듬해에도 12승으로 역투했으나 시즌 막바지 교통사고로 던지는 팔(오른쪽)을 다쳐 투수 생활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김시진 1983년 삼성 라이온즈 입단. 슬라이더가 주무기. 1985년 25승을 포함해 삼성에서만 111승을 거뒀다. 그러나 1988년 시즌이 끝난 뒤 허규옥 오대석 등과 함께 롯데로 트레이드됐다. 이때 최동원 오명록 등이 삼성으로 옮겼다.

김용남 해태 타이거즈 창단 멤버. 군산상고 시절인 1970년대 중반 경남고 최동원, 대구상고 김시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교야구 '투수 3총사 시대'를 펼쳤다. 이른바 '58년 개띠들'이다. 낙차 큰 커브가 일품. 1985년 시즌까지 해태의 주력 투수로 활약했다.

김용수 1985년 MBC 청룡 입단. 마무리와 선발을 오가며 MBC~LG 마운드를 지켰다. 빠른 공을 지녔지만 컨트롤도 빼어났다. 1986년, 87년 그리고 1989년 최우수구원투수. 1990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

김일융 1984년 삼성 라이온즈 입단. 프로야구 초창기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재일동포 선수 가운데 한 명. 1985년 25승을 포함해 3년 동안 54승을 올렸다. 일본 프로야구 명문 요미우리 출신으로 한국 생활을 마치고 다이요 훼일스로 이적했다. 커브를 잘 던졌다.

김정수 1986년 해태 타이거즈 입단. 한국시리즈만 되면 펄펄 날았다. 1986년 3승(시리즈 MVP)을 포함해 7승1세이브(3패)의 좋은 기록을 남겼다. 컨트롤이 다소 불안했지만 왼손투수의 장점을 살려 오랜 선수생활을 했다.

노상수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 프로야구 초창기 대표적인 언더핸드 투수 가운데 한 명. 첫해 14승, 이듬해 8승을 올리며 롯데 마운드의 한 축을 맡았으나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경기력이 갑자기 떨어져 이후 시즌 5승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문희수 1984년 해태 타이거즈 입단.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고졸신인'. 외모만큼 깔끔한 투구 폼으로 입단 이듬해 12승을 거뒀다. 1988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 작은 체격이었지만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

박상열 OB 베어스 창단 멤버. 프로야구 초창기 손꼽을만한 '잠수함' 투수 가운데 한명. 투구 템포가 빨랐다. 원년부터 1984년까지 3년 연속 두자릿 수 승리를 기록했다.

방수원 해태 타이거즈 창단 멤버. 단 한 차례도 시즌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둔 적은 없지만 해태팬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선수다. 1984년 5월 5일 삼미를 상대로 국내프로야구 첫 노히트노런 경기를 기록했다.

배경환 1983년 롯데 자이언츠 입단. 데뷔하던 해 올린 7승이 개인 시즌 최다승이지만 롯데 팬들은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며 역투하던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성 준 1986년 삼성 라이온즈 입단. 국내프로야구 역대 왼손투수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컨트롤이 뛰어 났다. 롯데 타자들이 매우 싫어했다. 오른손타자 바깥쪽에 걸치는 슬라이더가 볼만했다.

양일환 1983년 삼성 라이온즈 입단. 프로야구 초창기 수준급 '잠수함' 투수 가운데 한 명. 입단 첫해 9승이 개인 시즌 최다승이고 이후 시즌 5승을 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삼성 구단 초기 멤버 가운데 그의 존재감은 만만치 않았다.

오영일 1983년 MBC 청룡 입단. 인하대 시절 대학야구 정상급 투수였다. 프로야구에서도 그의 기량은 통했다. 데뷔 첫해 10승, 이듬해 15승 등 1980년대 중후반에 걸쳐 MBC의 주력 투수 가운데 한명이었다. 큰 키에서 내리 꽂는 빠른 공이 주무기.

유종겸 MBC 청룡 창단 멤버. 크지 않은 체격으로 온몸을 활용해 공을 던졌다. 1980년대 내내 꾸준히 마운드를 지켰다. 1987년 시즌을 빼고 1982년부터 1989년 시즌까지 해마다 100이닝 이상을 던졌다.

윤석환 1984년 OB 베어스 입단. 데뷔하던 해 시즌 25세이브를 올려 프로야구 출범 이후 3년 만에 시즌 20세이브 시대를 열었다. 황태환 선우대영 등과 함께 초창기 OB의 왼손투수를 대표한다.

윤학길 1986년 롯데 자이언츠 입단. 현역으로 군복무(상무)를 마치고 뒤늦게 프로에 입문했다. 최동원과 바통을 이어받으며 롯데 마운드를 지켰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던졌고, 이 같은 그의 고군분투는 1990년대 초에도 계속됐다.

이길환 MBC 청룡 창단 멤버. 프로야구 초창기에 활약한 '잠수함' 투수 가운데 한명. MBC가 1983년 시즌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데 한몫을 했다. 그해 15승.

이상군 1986년 빙그레 이글스 입단. '면도날' 제구력의 대표주자. 공의 절반을 스트라이크 존에 '넣었다, 뺏다' 할 수 있을 정도. 한희민과 함께 신생팀 빙그레의 마운드를 이끌었다. 데뷔하던 해부터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이상윤 해태 타이거즈 창단 멤버. 1983년 시즌 대포알 직구와 낙차 큰 커브로 무장하고 20승을 거뒀다. 그러나 팔꿈치가 좋지 않아 이후 해를 걸러 가며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이선희 삼성 라이온즈 창단 멤버. 프로에서보다 실업야구시절이 훨씬 더 화려했다. 한국야구가 처음으로 세계 정상에 선 1977년 슈퍼월드컵(대륙간컵 대회) 최우수선수이자 최다승(5승2패) 투수였다. 프로에서는 영광의 기억보다 아픈 기억이 많다. 1982년 3월27일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MBC 청룡 이종도에게 연장 10회말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았고, 그해 10월11일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초 OB 김유동에게 또 다시 만루 홈런을 내줬다.

임호균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입단. 프로 데뷔를 삼미에서 했고, 1987년 삼미의 후신인 청보로 이적했지만 1984년부터 3년 동안 뛴 롯데에서의 활약이 야구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상군이 1980년대 후반 컨트롤의 귀재였다면 1980년대 초반은 임호균이었다.

장명부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입단. 야구 올드팬들은 요즘 요미우리 이승엽 출장 경기를 보다가 상대팀이 히로시마 카프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장명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장명부는 1970년대 후반 히로시마 전성기의 주력투수였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선수생활의 위기를 맞자 한국행을 택했고, 1983년 시즌 30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장호연 1983년 OB 베어스 입단. '직구가 변화구'라고 할 만큼 다양한 변화구를 자랑했다. 힘들이지 않고 던지고 크게 무리하지 않았으니 선수생활 내내 '기본'은 했다.

정삼흠 1985년 MBC 청룡 입단. 명지고~고려대 출신으로 한 해 선배인 양상문(부산고~고려대)과 안경을 쓴 모습 등이 비슷해 '오른손 양상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야구팬들에게 영리하게 공을 던진 투수로 기억된다.

최일언 1984년 OB 베어스 입단. 센슈대학을 나온 재일동포로 일본프로야구 경험은 없었으나 특유의 적극적인 승부로 1980년대 중반 팀의 기둥투수로 활약했다. 1986년에는 19승에 1.58의 놀라운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나 그해 선동열은 더욱 놀랍게도 0.99의 평균자책점을 남겼고, 최동원도 1.55로 최일언을 앞섰다.

하기룡 1982년 MBC 청룡 입단. 듬직한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빠른 공이 인상적이었다. MBC 초창기 주력 투수였지만 전성기는 3년 정도였다.

한희민 1986년 빙그레 이글스 입단. 성균관대 시절 장채근과 배터리를 이뤄 대학야구 정상의 기쁨을 누려봤고, 프로에 와서는 이상군과 함께 신생팀 빙그레 마운드를 이끌었다. 1987년 시즌부터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올렸다. 198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잠수함'투수였다.

황규봉 삼성 라이온즈 창단 멤버. 프로 원년 이선희, 권영호와 최강의 마운드를 구축했으나 OB와 겨룬 한국시리즈에서 1승1무4패(이선희 2패 황규봉 1패 권영호 1패)로 밀린 뒤 1985년 삼성이 전후기 통합 우승할 때 14승으로 한 몫을 했다. 그해 김일융과 김시진은 각각 25승을 올렸고, 권영호는 6승26세이브를 기록했다. 삼성의 전후기 승수는 77승이었다.

황태환 OB 베어스 창단 멤버. 프로야구 원년 골든글러브 수상자다. 그해 6승에 그친 투수가 어떻게 골든글러브를 받았을까. 수비율(자살+보살/자살+보살+실책)로 수상자를 뽑았기 때문이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프로데뷔 때 이미 서른 줄에 들어서 있었지만 다부지게 던져 초창기 OB 마운드에 '감초'같은 구실을 했다.

*이상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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