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OB(두산 베어스 전신) 입단 후, 86년 해태로 이적한 첫해, 한대화가 거둔 성적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어서 마치 '한대화' 란 동명이인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격 전 부문에 한대화의 이름이 올려진 것이다.

86시즌 그의 최종 기록은 타율 0.298(5위) 홈런 14(5위) 타점 66(2위) 승리타점 16개(1위) 장타율 0.503(2위) 출루율 0.372(5위). 14 홈런과 66 타점은 지난 3년간 성적을 모두 합한 기록과 비슷했고, 승리타점 16개는 팀이 거둔 67승 가운데 1/4에 해당되니 그 만큼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조금씩 한대화의 마법 같은 결정력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프로야구 이력에서 최초의 개인 타이틀을 두 부문에서 거머쥐니 바로 승리타점과 골든글러브였다.

공·수 모든 부분에서 해결사였던 한대화

"그해 타격도 좋았지만, 수비가 더 훌륭했습니다. 이순철이 빠진 공백을 한대화가 그 이상으로 메운 것이지요. 온 몸에 센서가 달렸는지 공이 가는 방향을 제대로 짚었고 연결자세도 민첩했어요. 송구는 늘 빠르고 정확했습니다. 특히나 그의 승리타점처럼 그의 호수비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오곤 했어요. 그는 사실 공·수 모두에서 해결사였던 셈입니다."

한국 프로야구 전문가 임채왕의 증언이다.

많은 야구팬이 기억하듯 한대화의 수비는 그의 타격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필자가 지금도 그의 수비 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보노라면 마치 과묵한 목공이 나무에다 촘촘히 못질을 하듯 화려한 맛은 없어도 신뢰와 정성이 느껴진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의 실책 수에 주목하기도 하지만 그들 모두는 돌아앉은 자리에선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대화는 곧잘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때론 다른 3루수보다 실책수가 많기도 했다. 그러나 도무지 기억나는 실책이 없다. 왜냐하면 실책 후엔 곧바로 실책을 만회하는 멋진 수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조용한 한대화 만큼 그의 실수는 언제나 조용히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한대화의 대성공은 그를 믿고 지지한 사람들에겐 7월의 여름바다를 만난 일이었다. '슈퍼 루키' 이순철을 외야로 전향시키고 '대도' 김일권을 벤치로 앉혔던 김응룡 감독은 야자수에 몸을 기댄 듯 느긋한 마음이 들었고, 그의 재기를 한없이 바랐던 팬들은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적시듯 시원한 감정을 느꼈다.

반대로 한대화의 성공을 쓰나미급 해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OB였다. OB 관계자들은 한대화의 맹활약을 접할 때마다 야구란 예측할 수 없는 스포츠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프로야구 사상 가장 한심한 트레이드 입안자로 선정된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태서 8년간 활약하며 6번 우승과 6년 연속 골든글러브에 뽑혀

한대화는 해태에서 8년 동안 활약하며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해태가 기록한 한국시리즈 4연패는 모든 선수들의 투혼과 열정이 빚어낸 결과였지만, 언제나 그 중심엔 해결사 한대화가 있었다. 특히 한대화는 김봉연과 김준환이 은퇴한 88년 이후엔 김성한과 함께 일명 'KH타선'을 이뤄 맹활약을 펼친다. 이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성기 당시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가 이뤘던 'OH타선'에 비교할 수 있는 막강 원투펀치였다.

이 시기 한대화는 6년 연속 골든글러브(86~91)에 뽑히기도 하는데, 이 기록은 이승엽(97~2003)이 7년 연속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한국 프로야구 기록이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한대화가 입고 있는 해태 유니폼에 익숙해졌고 그가 해태에서 더 많은 활약을 하다 모든 팬들의 축복 속에 은퇴해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야구라는 스포츠가 앞을 예측할 수 없듯 한 사람의 인생도 작가 없는 미니시리즈와 같아서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것. 1993년 12월 갑자기 한대화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악재가 겹친 '넘버 3' 한대화, 해태를 떠날 것인가?

"언제나 한대화는 해태 타선에서 김성한과 연봉고과 1순위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해태 프랜차이즈 스타이고 기록에서 약간 앞섰던 김성한에게 더 많은 연봉이 쥐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91년만 해도 당시 해태에서 김성한이 선동렬 다음으로 많은 연봉을 받고 있었는데 한대화가 김성한과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한대화는 해태에선 넘버 3였습니다. 한대화로서는 늘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여기다 93년 올스타 게임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지요."

한국야구 평론가 임채왕의 회상이다.

한대화는 좋은 선수였지만 해태에서 만큼은 3.번.째.로 좋은 선수였다. 선동렬과 김성한이 버티는 이상 그는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구단은 해태였다. 해태는 영광의 우승컵과 훌륭한 선수들의 유니폼을 안고 이제 프로야구계의 전설이 됐지만 정작 해태의 전설은 '경제 분야에서‘ 유효한 것이었다.

바로 최소 투자를 바탕으로 최고 실익을 거두었던 구단이 해태였던 것이다. GE(General Electric Company)의 전 CEO 잭 웰치가 한국에서 태어나 그 만한 그룹을 운영했다면 해태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보라구! 최정예화 된 소수 선수단으로 우승을 몇 차례나 거머쥐었는지 말이야. 무작정 투자만 하고 몸집만 불린다고 좋은 결과를 얻는 건 아니란 말이야."

그러나 해태는 잊고 있었다. 잭 웰치가 그 다음에 했을 말을.

"직원들에게 성취감을 심어주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 물론 실적대로 지갑을 꽉 채워주는 것이지."

해태는 잭 웰치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당시 해태 에이스 선동렬이 연봉 1억을 요구했을 때 일이었다. 1억 연봉은 당시 스포츠는 물론이려니와 여타 직종에서도 보기 드문 금액이었다. 물론 선동렬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선수였지만, 해태 구단주였던 박건배는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야, 1억 만들려면 껌을 몇 통이나 팔아야 하는지 알기나 해?"

정작 모그룹 해태가 망한 건 껌 몇 통을 파는데 전력하지 않고 무분별한 사업영역 확대와 과잉투자가 이유였으니 야구나 인생이나 모두 역설적이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한대화를 어렵게 한 건 93년 있었던 올스타전의 기억이었다. 당시 올스타전에 참가했던 한대화가 공격 도중 다소 느슨한 플레이를 보이며 덕아웃으로 들어오다 김응룡 감독에게 갑자기 발길질을 당한 것. 아웃이 된 후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던 한대화를 김응룡 감독이 프로근성 부족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선수와 팬들 모두가 함께 즐기는 올스타전이었고 한대화의 미소도 아웃이 된 후 보여준 멋쩍은 미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작 문제는 발길질 장면이 우연히 덕아웃을 비췄던 TV 카메라에 그대로 노출된 점이었다. 이는 TV를 통해 지켜보던 시청자들에겐 충격이었다. 최고의 스타 한대화가 감독에게 발길질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야구팬들이었다. 구타라면 고등학교 야구부에서나 있으리라 생각했던 시대였다.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나 해설가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당시 인터넷은 없었지만 각 방송사에는 이에 대한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그간 억눌린 감정과 아쉬움을 참던 한대화. 몇 년 전부터 줄곧 트레이드를 요구했던 한대화는 결국 해태와 관계를 마무리하기로 마음먹고 해태 수뇌부에게 강력하게 뜻을 전한다.

해태는 한대화에게 고사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이미 그의 전성기가 지났다고 판단했던 터라, 이내 트레이드 대상 팀을 물색하기 시작한다.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해 여론의 도마에 올랐던 김응룡 감독도 한대화의 뜻을 받아들인다. '아직 선수로 가치가 있을 때 타 팀으로 보내주는 것이 감독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는 자신의 철학이 작용한 까닭도 있었다.

김응룡과 한대화. 처음은 좋았으나 마무리는 미약했던 두 사람. 그들은 지난해 구단 사장과 수석 코치로 힘을 합쳐 삼성 라이온즈를 정상에 올렸으니 사람의 인연이란 이닝이 없는 모양이다.

해태 한대화, LG로 전격 트레이드

 1994년 LG 트윈스 한대화
ⓒ LG 트윈스
드디어 1993년 12월 3일, 스포츠 신문에는 영화 입간판만한 크기의 제목이 전면을 장식한다.

"해태 한대화, LG로 전격 트레이드"

당시 상황을 임채왕은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충격이었어요. 한대화의 LG 이적도 충격이었지만 LG 김상훈과 이병훈이 해태로 이적한 것도 충격이었습니다. 이병훈이야 이적 사유가 충분했지만 김상훈의 이적은 팬들에겐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였어요. 게다가 '미스터 LG'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재미난 건 LG 팬들이 다음 날부터 한대화를 환영했다는 겁니다."

한대화는 해태의 간판 타자였지만, 나아가 전국구 스타였던 셈이다. 그의 매력이란 무엇이었을까?

이미지 컨설턴트 유장섭의 말을 빌어보자.

"인상이죠. 지금 유행하는 말대로 표현하면 '호감' 가는 스타일이었어요. 한대화는 해태에서 만개한 스타였지만 가장 해태적이지 않은 선수였어요. 해태하면 강렬한 인상이 특징이었고 해태를 바라보는 팬들도 호감과 비호감이 확실히 나눠졌어요. 그런데 한대화는 강렬하기 보다는 부드럽고 성실한 인상이었어요. 플레이도 화려함보다는 내실을 추구했고 해태에 비호감 팬이라도 위기마다 한방씩 쳐주는 한대화를 보면 감탄했어요. 다른 선수라면 욕먹을 상황이었지만 한대화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82년의 기억이나 역설적이게도 해태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니라는 점도 전국구 스타가 되기에 적당한 이유였어요."

이제는 LG 트윈스의 해결사

LG로 팀을 바꾼 한대화는 부담이 덜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편안한 감정마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태와 LG의 팀 분위기가 너무 달라 마치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팀 같았던 것이다.

양 팀의 분위기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였다. 엄격한 상명하복이 특징이면서도 끈끈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했던 해태. LG는 이광환 감독이 주창한 '자율 야구'에서 보듯 각 선수의 개성과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선·후배간의 존중을 지향하고 있었다. 한대화는 어느 쪽이랄 것 없이 두 팀의 차이를 존중했지만, 35살의 사내에겐 LG에서 편안하게 야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었다.

"당시 야구계에서 해태 쪽이 유리하다고 했다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야구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무승부 혹은 LG쪽에 손을 들어 줄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병훈은 어느 팀에 가도 그의 생활 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변할 게 없었고 김상훈도 해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스타일의 선수라 성공이 비관적이었습니다. 다만, 한대화는 OB에 있을 당시 코치였던 이광환 감독과 좋은 사이였고 LG 최고참이었던 김용수와 김영직과는 동갑내기였습니다. 해태보다 부담이 훨씬 덜한 편이었죠."

임채왕의 회상이다.

당시 LG 감독이던 이광환은 한대화에게 송구홍의 군 입대로 공석이 된 3루수와 4번 타자를 맡아 달라 부탁한다. 내심 1루수를 기대했던 한대화였지만 순순히 감독의 뜻에 따르고 결국 이것이 한대화에겐 마지막 골든 글러브 수상자가 되는 기회로 작용한다.

가장 'LG 트윈스'다웠던 1994년. 해결사다웠던 한대화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1994년의 LG 트윈스는 형광펜으로 칠을 해둬야 할 만큼 강력한데다 행복한 팀이었다(차후 '오후 9시의 배웅자, 김용수' 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

먼저, 아마추어 야구에서 검증받은 두 거물 신인 김재현, 유지현과 무늬만 무명이었던 서용빈이 입단하여 '행복한 수혈'이 이뤄졌다. 당시 투·타에서 활약한 선수들은 놀랍게도 자신의 하이시즌을 94년에 맞춰 놓고 있었다. 이광환 감독을 비롯해 코칭스태프도 '자율 야구'라는 야구 철학이 있었다.

프런트 역시 트레이드와 스카우트에서 성공하며 급료가 아깝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고 무엇보다 LG 야구팬들은 평균 관중 수(94년-1만 6227, 95년-2만 76) 1위에서 보듯 진정한 불펜이었다. 그러니까 이 해가 가장 LG 트윈스다운 모습을 보여준 해였던 것이다.

여기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6회나 경험했던 해결사 한대화가 가세했으니 94년 LG 트윈스가 우승한다고 해서 결코 놀랄 일은 아니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장면
ⓒ LG 트윈스
한대화는 이광환 감독의 배려로 지명타자와 3루를 겸하며 12년간 3번째로 많은 타석(357타석)에 들어서며 타율 .297 홈런 10 타점 67을 기록한다. 특히 팀이 궁지에 몰렸을 때나 결정적인 찬스에는 마법 같은 결정타를 보여줬다. 유통기한이 지난 초콜릿처럼 이미 맛을 상실했다고 평가받던 한대화. 그러나 프로 12년차로 숙성된 '한대화 초콜릿' 안에는 그보다 가치 있는 경험이란 '아몬드'가 들어 있었다.

마침내 LG는 한국시리즈에서 태평양 돌핀스(현 현대 유니콘스)를 4전 전승으로 제압하며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안는다. 한대화는 2번의 이적 동안 첫해 소속팀에게 우승을 선사하는 기록을 세우고 야구팬들은 그를 영원한 '우승 청부사' 혹은 '해결사' 로 기억한다.

'모두가 환영한 해결사', 끝나지 않은 임무

그 후, 한대화는 LG에서 2년을 더 뛰고,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1년을 뛴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한대화는 예전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간간히 적시타를 쳐주며 때로는 팀의 리더가 되어 젊은 선수들을 지도한다.

그러다 결국 1997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한대화는 이듬해 프로출신 1호 대학 감독으로 동국대에 부임해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다.

동국대 감독 시절 팀을 한 차례 우승으로 이끌며 박한이(삼성), 서승화(LG) 등 좋은 선수를 배출해 내기도 했다. 2004년에는 삼성 라이온즈 코치로 자리를 옮겨 지난해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데 일조한다.

한대화.

그는 88년 올스타 MVP에도 선정됐고, 골든글러브 통산 최다수상(8회)과 연속 수상기록(6회·86∼91년)를 세우기도 했던 최고의 3루수였다. 또한, 15년간의 선수생활 중 7차례 개막전에서 홈런을 날린 '개막전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언제나 한물갔다는 평가를 들으며 등을 밀렸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적 첫해 그를 받아준 팀들에게 우승을 선사했던 '우승 청부사'였고, 위기와 고비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팀을 위해 결정타를 날려준 '해결사'였다.

2002년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표한 '프로야구 20년 통산 포지션별 최고스타' 선정에서 선동렬을 제치고 그가 최다득표 1위를 기록한 것도 요행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팬들이 그를 기억하는 건 이렇게 화려한 기록과 수상 경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론가 임채왕은 이렇게 말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살다가 힘든 일이 닥치면 누군가 한대화처럼 나타나 시원하게 해결해 주길 바라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예전 야구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정작 제 인생의 해결사는 한대화가 아니라 바로 저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냅니다."

한대화는 야구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겐 지난날의 추억이자 회한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뜻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를 '모두에게 환영받은 해결사'라 부르고 있다.
 모두가 환영한 해결사, 한대화
ⓒ 오마이뉴스 김진석

덧붙이는 글 지금까지 '모두가 환영한 해결사, 한대화' 편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편은 '나를 키운 8할은 오기였다, 이치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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