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희의 <블루 그라운드> 에서는 앞으로 한미일 야구스타 100인을 선정하여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독자분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야구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스포츠란 말이 있습니다. 이들 야구스타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 우리들 모두의 인생을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주>
"시카고에선 단 한사람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소. 따라서 단 한사람에게만 인정받지. 그 외 모두는 날 벌레 보듯 한다오. 하지만 어쩌겠소. 이것이 내 일인걸."

전설적인 시카고 마피아 알 카포네의 수하였던 살라네모는 자신의 직업을 묻는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의 직업란에 무엇을 적어야할 지 명확히 알고 있던 시카고 검찰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알지 못하던 신출내기 FBI요원이 "그래도 좀 더 정확히…." 라고 요구하자 살라네모는 조용히 눈을 감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양이처럼 살며시 다가가 방울뱀처럼 한번에 끝을 내고 그림자처럼 은밀히 사라지는 직업이지. 사람들은 그런 나를 가리켜 해결사(trouble-solving broker)라 부른다오. 그게 바로 내 일(job)이지"

하수구에선 숨을 토하듯 수증기가 흘러나오고 과묵한 사내의 입술처럼 굳게 닫힌 창문들이 즐비한 시카고 뒷골목. 해결사 살라네모는 그 암흑가에서 자신의 일을 치루고 루이 암스트롱과 그의 밴드 핫 파이브(Hot Five)의 재즈가 흘러나오는 시카고의 열기로 들어갔을 일이었다. 외롭고 환영받지 못하는 은밀한 해결사.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으리라. 그러나 인생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모두가 사랑하고 환영한 해결사

여기 모두에게 환영받고 모두의 희망에 응답하던 해결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한대화(韓大化).

그는 살라네모가 들었던 45구경 콜트식 자동 권총 대신 950g짜리 미즈노배트를 들고 암흑가 대신 그라운드를 누볐다. 단 한사람에게 한번의 청탁에만 몸을 움직였던 살라네모 만큼이나 그도 자신을 선택한 단 한 팀만을 위해 경기에 임했다. 살라네모가 그를 고용한 고객들을 배신하지 않았듯 그도 완벽히 팀과 팬들이 부여해준 절대절명의 순간마다 해결사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 다만, 살라모네는 알카트라즈 감옥에서 더 이상 해결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비명에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는 선수를 떠나 코치로 해결사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

1960년 7월 8일 대전에서 태어났다.
정구선 이후 별다른 재목이 없던 대전고에서 동기생 이광길과 돋보이기 시작한다. 고교시절 유격수와 투수로 자질을 보여준 그는 78년 세계청소년야구대회 준우승 당시 유격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동국대로 진학한다. 현재 차세대 감독진들이라 평가되는 대부분이 그와 동기인 79학번 출신들.

전(前)롯데 양상문 감독을 비롯, 현(現) 롯데 박영태 수석코치와 한문연 배터리 코치 그리고 작년까지 LG에서 수석코치를 맡았던 황병일과 두산의 양승호 코치, 삼성의 이상윤 코치등이 동기다. 이때 그를 스카우트한 동국대 감독은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김인식씨가(현 한화 감독)이 아닌 배성서(전 빙그레 감독)씨.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서울에서 열리다

동국대 재학시절 입이 쫙 벌어질 정도의 대단한 두각은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연세대와 고려대 그리고 한양대가 나눠먹는 우승 파이에 동국대 역시 끼어들지 못하고 만년 준우승에 머무르던 터. 그러니까 당시 한대화는 평범한 학급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학생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기회란 언제나 그렇듯 미소 짓지 않고 찾아오는 법. 평범했던 그의 야구인생에 절호의 기회가 다가오니 바로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였다.

당시 82년은 한일월드컵이 개최되었던 2002년의 한국과 매우 닮은 모습이었다. 국민적 관심과 열정이 그러하였고 정부측의 지원이 그러하였다. 그리고 대회가 끝난 후 야구가 전국민의 최고인기종목으로 자리 잡은 것이 그러하며 무엇보다 대회가 만들어낸 슈퍼스타들이 그러하였다.

82년 정부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서울개최를 확정지은 후 곧바로 잠실야구장을 건설하였다. 당시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연일 대회 관련 보도를 내보내며 열띤 홍보에 나섰다. 특집을 마련하여 참가대상국의 전력을 비교하는 방송도 계속되었다. 건국 이래 가장 큰 구기종목대회를 국내에 유치했던 탓도 있었지만 정통성 없던 정부에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역량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덧 국민들은 대회가 개최될 82년 9월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열기와는 무관하게 당시 국가대표팀을 얼음처럼 차갑게 평가한다면 역대 최약체로 손색이 없었다. 이유는 국방부 브리핑처럼 매우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국가대표 주축을 이루던 많은 선수들이 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이미 아마를 떠났던 것.

아마야구 최고의 슬러거로 불리던 김봉연과 붙박이 3루수 김용희 그리고 외야의 중심이라 평가받던 대도(大盜) 김일권 등이 빠져있는 상황이었다. 투수진은 더욱 가혹해 하기룡과 불멸의 좌완 이선희가 프로에 진출해있던 상황이었고 양대 에이스 최동원과 김시진은 모두 부상을 안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야구협회가 정부의 총력지원을 받아 강제로 프로진출을 틀어막은 선수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

역대 최약체 국가대표팀 과연 우승할 수 있는가

건국 이래 가장 큰 스포츠행사란 명분에 막혀 프로진출을 뒤로 미뤘던 대표적 선수는 최동원, 김시진, 이해창, 장효조, 김재박, 심재원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이처럼 불평을 늘어놓기보다 진심으로 대표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나 이 선수들 중 대부분은 이미 군복무를 마친 상황에다 절정의 기량을 발휘하던 스타들이었기에 이들의 대표팀 잔류는 대가없는 희생이란 평가였다. 근간 WBC(야구월드컵) 출전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25년 전 이들과 비교한다면 지나친 연관일까. 아니 차라리 82년 멤버들에 대한 심각한 무례일지 모를 일이다.

아마잔류 스타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대표팀 감독 어우홍(전 청룡감독)의 머리에 균열이 생기긴 마찬가지. 이 때 어우홍 감독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들이 빠진 상황에서 오히려 이름만 대서는 모를 신예들을 과감히 기용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대학선수들을 기용한 것. 그 대표적인 선수가 당시 고려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선동렬과 동국대 4학년이던 한대화였다.

야구공을 처음 손에 쥐기 시작할 때부터 국보였던 선동렬은 이미 대학무대를 평정한 차세대 에이스. 어 감독은 부상 후유증으로 시달리던 최동원, 김시즌 콤비를 무리하게 사용하지 않고 선동렬에게 미국전과 대만 그리고 일본전을 맡긴다는 복안을 작성하고 김용희가 빠진 3루수와 김봉연이 빠진 1루수에 누구를 기용할지 고민한다.

첫 경기 상대는 이탈리아. 참가팀 가운데 최약체로 분류되던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수사냥에 나섰던 대표팀은 그러나 어이없이 석패하고 만다- 설적이게도 이탈리아는 축구에 있어 한국이 악몽같은 존재지만 야구에 있어 이탈리아는 이 대회와 96년 올림픽 본선에서 한국의 발목을 잡은 악몽이었다-부상에도 불구 출전을 강행했던 김시진이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문제는 1점밖에 올리지 못한 타력부재. 거포들이 대거 빠진 대표팀 타선의 문제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2차전은 최강으로 분류되던 미국. 어 감독은 선동렬 카드를 내민다. 미국 투수진을 맞아 가뜩이나 불안한 타선에서 대량득점은 기대할 수 없는 처지. 선동렬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야 했던 상황. 한편으로 선동렬 신화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선동렬은 탈삼진 15개를 기록하며 막강 미국타선을 1점으로 봉쇄하는데 성공한다. 팀타선도 선동렬의 호투를 발판삼아 2점을 기록. 팀은 거짓말처럼 미국에 2대1 역전승을 거둔다. 이어 전승을 구가하던 대만전에서도 선동렬의 호투가 이어지고 대표팀은 연승을 구가하게 된다.

따로 결승전 없이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리던 당시 대회규정상 이제 약체 호주전만 승리하면 일본과 실질적인 결승을 벌이는 상황. 그러나 한국에게 호주전은 엘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의 거대한 사막에서 벌이는 캥거루 사냥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9월 13일 열린 호주와의 8차전 경기는 14일 연장 15회까지 벌이는 사투로 이어진다. 결국 유두열의 끝내기 희생타로 승리하지만 나란히 7승1패를 기록하던 일본과의 실질적인 결승은 불과 몇 시간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 선수들의 체력저하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골프채로 타격하는 듯한 물방망이 타선이었다.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기념우표
ⓒ 박동희
한국팀 최대의 위기 한대화 최대의 기회

먼저 일본전 선발투수는 선동렬. 선발투수를 낙점한 어우홍 감독은 이내 배팅 오더(batting order)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앞 경기까지 1번 타자였던 김재박을 우선 2번에 기용하고 조성옥을 1번 타자로 기용한다. 주포들이 모두 빠진 현(現)타선에서 그나마 홈런 3개를 기록하며 분전하던 이해창을 3번에 기용하고 교타자의 대명사 장효조를 4번에 배치한다. 문제는 다음 타선이었다. 대회 내내 포수 심재원을 중심타선에 배치했던 어감독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터. 타력보단 수비력에서 당대 최고란 평가를 받던 심재원을 계속 5번에 두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 때 어 감독에게 배성서 대표팀 코치가 이렇게 조언한다.

"요즘 대화가 감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한대화라…' 어감독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다 수비연습을 하고 있던 한대화에게 눈을 돌렸다. 원래 유격수가 포지션이었지만 김재박이란 거목이 있는 대표팀에선 김용희가 부재한 3루를 맡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리 감이 좋다지만 이렇듯 큰 경기에 풋내기 대학선수를 클린업트리오(cleanup trio)에 기용할 수 있단 말인가. 어 감독은 잠시 주저한다. 모든 지도자들이 향후 받는 찬사의 99%는 당시에 그가 선택한 결정 때문. 어 감독의 배팅 오더 5번 타순은 공란으로 남겨진다.

82년 9월 14일. 대망의 일본전.
잠실야구장 스탠드에는 경기 시작 전부터 관중들이 가득차 있었다. 각 가정에서는 텔레비전 앞에 삼삼오오 모여든 시청자들이 초조한 시선으로 한일전을 기다리고 있었고 주요 역대합실에는 발걸음을 멈춘 승객들이 손을 모아 승리를 기원하고 있었다. 사담(私談)에 불과하지만 필자가 당시를 뚜렷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날 경기시작 1시간 전, 난생 처음으로 컬러 텔레비전이 필자의 집에 설치되었던 것. 어린 필자의 로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대회기간을 맞아 커러 텔레비전이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으니 비단 필자의 집이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듯 뜨거운 국민적 반응과 응원은 단순히 이 경기가 우승을 가리는 최종전이란 성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당시 일본과의 정치적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일본 교과서 파동으로 불렸던 당시 사건이 일본과 주변국간의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되고 이것이 감정적 마찰로 발전한 것.

중국과 한국 '침략'을 '진출'로 미화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과 책임을 교묘히 왜곡한 일본 역사교과서에 대해 한국은 대규모 규탄대회 등을 개최하며 강력히 규탄하고 있었다. 반일감정은 극에 달했고-그러나 당시 한국정부가 일본교과서를 이용하여 국내 정치상황을 왜곡하려던 측면도 있었다-이번 일본전은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국민적 여망이 조성되고 있었다.

'Be the reds' 티셔츠와 거리응원 그리고 붉은 악마란 조직적 응원단만 없었을 뿐이지 당시 열기는 2002년 월드컵을 능가하고도 남을 현장이었다.

드디어 잠실야구장 조명에 불이 들어오고 숨죽여 기다리던 관중들이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한다. 초공격을 담당할 일본팀 선수들이 배트를 휘두르며 결전을 다지고 있었고 한국팀 선수들은 글러브를 힘껏 움켜쥔 채 그라운드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 누군가 3루쪽으로 스프링이 튕기듯 달려나갔고 한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지켜보다 이렇게 되뇌인다.

'누구지? 저 선수는….'

그는 바로 한대화였다.

덧붙이는 글 | 2편이 이어집니다

2006-02-13 17:23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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