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볼티모어(Baltimore Orioles)의 스프링 캠프. 라피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그의 스윙은 볼티모어의 지면을 밟은 순간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당시 그의 스윙은 비달 사순(Vidal Sassoon) 샴푸광고에 등장하는 여자모델의 머리카락처럼 유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사소한 걱정에 휩싸였다.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깨에 커다란 바벨이 올려져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새로운 시즌. 그리고 메이저리그 파업

볼티모어에 오기 전 6시즌동안 그는 매년 150경기 이상을 뛰며 560타석 이상에 들어섰던 참이었다. 그가 부상이란 악몽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라피는 부상보다 더한 악몽과 대면한다. 바로 94년의 메이저리그 파업이었다.

"94년 메이저리그 파업은 농구가 흑인들을 위한 놀이가 아니라 모든 미국인들의 놀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실제로 그것을 가능하게 도와준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습니다. 94년 파업 전에 누가 마이클 조던(Michael Jeffrey Jordan)이 캔 그리피 주니어(Ken Griffeys Jr) 를 능가하리라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 릭 허드의 평가다.

93년까지 메이저리그는 미국 스포츠계의 영원한 블루칩이었다.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은 그들이 탄 배가 언제까지나 순풍 속에 항해하리라 믿고 있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Toronto Blue Jays)가 92, 93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영향으로 캐나다 관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도 메이저리그 순풍에 커다란 작용을 했었다. 특히나 93년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토론토의 조 카터(Joe Carter)가 필라델피아 구원투수 미치 윌리암스(Mitch Williams)의 초구를 통타하여 굿바이 홈런을 날린 것은 누가 진정한 미국스포츠의 주인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명장면이었다. 그런 이유로 93년 메이저리그는 경기당 평균관중 3만명이란 신기원을 작성했다. 그러나, 신이 인간에게 미소와 눈물을 함께 주었듯 행운에는 불행이란 친구가 따르는 법.

94년 선수노조와 구단주들은 심각한 분쟁을 일으키고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르자 양측은 파업전선을 형성한다. 분쟁의 주된 이유는 천문학적으로 치솟는 구단 적자을 감당하기 힘들다며 구단측이 설정해두었던 이른 바 셀러리갭(구단 총수입의 50%이내에서 선수연봉을 상한 제한)를 선수노조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것. 오히려 선수노조는 구단측에 최저연봉제를 확대하고 선수들의 복지에 더 많은 예산을 집행하며 재정이 빈약한 구단지원에 나서라고 성토했다. 그러나 구단측의 적자타령도 설득력이 없는 내용이었고 선수노조측의 선량한 주장도 이면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미국의 어린아이가 캐치볼을 하기 싫어하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72년 이후 8번째 노사 분쟁을 대했던 팬들은 이 분쟁을 매우 간명하게 '백만장자들의 진흙탕 싸움' 이라고 표현하였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의회가 나서 중재를 시도하지만 결국 이는 무산되고 파업은 94년 8월 이후 232일 동안 지속한다.

"미국의 어린아이가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기 싫어하다니.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라고 영화 '꿈의 구장'에서 캐빈 코스트너는 당연하다는 듯 질문했지만, 그것이 실제 현실이 되고만 것이다. 94년을 기점으로 미국 어린아이들은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는 대신 농구공을 손에 쥐기 시작했다.

232일간 지속된 파업은 팬들에게 야구란 스포츠가 잊혀지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던 셈. 결국 선수와 구단 모두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그들은 서로에게 백기를 들어보였고 공범(共犯)의 반성문처럼 동일한 톤으로 '플레이볼' 을 외쳤다. 그러나 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라피는 94년 파업과 잔부상에 시달렸고 그 해 기록은 보통 여자아이의 옷차림처럼 평범했다. 라피와 볼티모어 모두에게 최상의 시즌이 되리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잠시 낙담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95년 라피는 다시 자신의 몸을 추스리고 볼티모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지금까지 그가 보낸 시즌 중 최고였다. 홈런은 39개로 역대 개인기록 최고였고 3할대 타율과 104타점을 기록했다.

볼티모어 5년간 553타점 182홈런 기록... 2차례 골든글러브 수상

볼티모어에서 보낸 5년은 라피가 얼마나 파워와 정확도를 겸비한 뛰어난 좌타자인가를 증명해주는 시즌들의 연속이었다. 5년 동안 그는 553타점과 182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이는 한해 평균 36.4개의 홈런과 110.6 타점이었다. 게다가 그는 고상하고 우아한 스윙을 지닌 슬러거임과 동시에 수비에도 능한 1루수란 점을 증명하는데 97,98년 연속으로 아메리칸 골든글러브에 선정된 것은 그 좋은 예였다. 97.98년 연속으로 소속팀 볼티모어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한 것도 그의 몫이었다.

99년 볼티모어와 결별을 선언한 라피는 과거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었던 텍사스 레인저스와 다시 5년간 4.500만불에 계약한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는 이 대단한 계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는 라피의 몸값이 예상보다 낮다는 것.

아메리칸리그에서 에드가 마르티네스(Edgar Martinez)와 함께 가장 과소평가된 타자로 손꼽히던 라피였다. 마크 그레이스(Mark Grace)와 함께 90년대 가장 많은 안타(1793개)를 기록한 선수이자 역시 90년대 메이저리그 최다 출장기록(1526게임)을 유지하고 있던 바로 라피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과소평가된 메이저리거

차후 이 계약은 셔츠에 묻은 루즈 자국처럼 텍사스와 연봉문제로 불협화음을 벌이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고 그가 매스컴에 큼지막하게 소개될 만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매스컴에 주목을 받은 일조차 없었다. 그는 뛰어난 성적에 비해 특별한 마일스톤(milestone)이 부족하다란 평가를 받았고 그에게 개인적인 불행이었겠지만 그의 가치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프런트를 만나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라피가 과거 감독과 불협화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라피의 플레이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텍사스와의 계약 첫해 99년. 커리어(career) 사상 최고의 시즌이 그것을 증명해주는 셈이었다. 타율 .324 홈런 47 타점 147.

그러나, 그 해 캐리어 역사상 최고의 하이시즌을 보냈음에도 그의 최대 약점인 마일스톤(milestone)부재를 해결하는데는 다시 한번 실패한다. 라피가 아메리칸리그(American League) MVP에 선정된다해도 누구 하나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영광은 그의 것이 아니었던 것. 동료선수 이반 로드리게스(Ivan Rodriguez)가 MVP에 뽑히고 만다.

"이반은 최고였습니다. 그는 수상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MVP와 같은 팀에서 뛰는 것만으로 제겐 영광입니다" 라피는 탈락의 아픔 따위는 한번의 삼진과 같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이내 그가 맡고 있던 '청소년 당뇨병 환자를 위한' 대변인과 입양가정을 위한 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리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기증품을 올려두는 등 새로운 자선사업에 뛰어든다.

2000년 들어 라피의 노쇠화를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텍사스에서 마지막 시즌을 뛰었던 2003년에도 라피는 홈런 38개와 112타점을 기록하며 자신이 팀의 중심타자임을 각인시켜 준다. 물론 2003년 시즌 그는 개인 통산 500홈런을 기록하기도 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그의 우상이었던 로베르토 클레멘트가 기록한 3000안타를 돌파하는 것. 그는 짐짓 마흔이란 나이가 단지 숫자에만 그치기를 바랬다. 최소한 3000안타를 기록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나이는 숫자에 머문 채 텍사스에서 화려한 마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팀의 리빌딩을 계획하던 텍사스는 불행히도 그를 위한 락커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마크 테익세이라(Mark Teixeira)'란 걸출한 신예가 이미 준비되어 있던 것.

라피는 그가 은퇴하기 바랬던 텍사스의 알링턴볼파크(Ballpark in Arlington 현 아메리퀘스트필드)를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 다시 옛 친정팀 볼티모어로 이적을 결심한다.

"텍사스 구단과 함께 진행하던 자선사업이 중단돼 무엇보다 아쉽습니다. 하지만 팀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야구장에서 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겐..." 그리고 라피는 잠시 호흡을 멈추다 이렇게 말을 이었다. "This is a dream. This is a dream life." 그에게 아직 꿈은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었던 것이다.

다시 볼티모어로 돌아오다

다시 돌아온 볼티모어에서의 기록은 모두가 기대했던 라피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이제 마흔을 넘은 나이. 결국 그라운드는 꼬냑이 아닌 것이다. 100년이 넘도록 제 모습을 유지할 순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도 위안은 있었다. 40대가 넘은 라피였지만 아직도 그의 스윙은 산도발의 트럼팻처럼 감미롭고 우아하였으며 게바라의 총구처럼 정렬적이며 강렬했던 것.

드디어 역사적인 2005년 7월 16일. 시애틀 매리너스(Seattle Mariners)의 홈구장 세이프코필드(Safeco Field).

경기장 여기저기 '3000' 이란 숫자가 적혀진 팻말과 깃발을 든 관중들이 보였다. 그리고 저마다 사람들은 마치 '3000' 이란 단어를 주기도문처럼 외우고 있었다. 잠시 전광판에는 '3000' 이 전등했다 이내 꺼지기를 반복하는 테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이렇게 묻고 있었다.

"이제 하나만 치면 라피가 500홈런과 3천안타를 동시에 기록한 사내가 된단 말이지?"

한편, 경기를 앞둔 라피는 락커룸에서 조용히 이렇게 되뇌이고 있었다.

'전과 다른 것은 없다. 난 손에 쥔 배트를 놓지 않으면 그만이다. 오늘 안타를 기록하지 않아도 배트를 쥐고 있는 이상 내 꿈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야구의 법칙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라피가 타석에 들어서자 시애틀 팬들은 그의 유니폼을 염두해 두지 않고 '라피' 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야구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 될지도 모르는 현장에 그들은 라피가 등장하면 그의 이름을 외쳤고 그가 타석에 머물땐 침묵을 지켰다.
첫 타석과 두 번째 타석 모두 안타 기록에 실패한 라피의 5회초 세 번째 타석.

라피는 타석에 들어서자 가볍게 배트를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잠시 상대 투수 호엘 피니에로(Joel Pineiro)와 눈을 마주쳤다. 만번이 넘게 타석에 들어섰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상대투수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자로 잰듯 정확히 고백한다면 그는 이 순간을 영원히 유지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은 꿈이 실현된 후가 아니라 바로 그 앞 단계에서 가장 많은 희열을 느낀다고 하지 않는가.

볼카운트 2-2.

그러나 라피는 더 이상 뒤로 미루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드디어 피니에로가 던진 공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라피는 힘껏 역사상 가장 우아한 스윙으로 공을 받아친다. 관중들은 손에 든 팝콘을 입에 넣을 줄 모르고 라피가 친 공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이동한다. 라피의 배트에 맞은 공이 지면에 떨어지기까지 불과 5초가 걸리지 않았지만 바로 이 5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을 바래왔던 모든 라피의 팬들에겐 한 세기와 같은 것이었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라피가 드디어 그의 꿈을 이루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네 번째로 '500홈런-3000안타' 기록

2루에 도착한 라피는 모자를 벗어 팬들에게 인사를 했다. 팬들은 기립박수로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동료선수들은 모두 뛰어나와 그를 둘러싸고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며 축하를 보내주었다. 모든 언론사들은 이 순간을 전 세계로 빠르게 타전하였고 그가 두고 온 고향 쿠바에서도 그의 3000안타는 속보로 보도되었다. 그리고 저 멀리 전광판에는 마침내 '3000' 이란 숫자에 불이 들어왔다.

메이저리그 130년 역사상 단 네명만이 기록한 전무후무한 '500홈런-3000안타' . 역대 수 만명의 메이저리거 가운데 정확성과 파워를 겸비한 최고의 타자만이 가입할 수 있다는 전설적인 '500홈런-3000안타 클럽'. 행크 아론(Henry Louis Aaron) 윌리 메이스(Willie Mays) 에디 머레이(Eddie Murray) 단 세명만이 등록하였고 이들 모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들이었기에 오늘 라피의 기록은 그가 명예의 전당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예비후보자임을 각인시켜주는 현장이었다.

순간 라피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지금 여기서 시간이 멈춘다해도 마다하고 싶지 않다'

로베르토 클레멘트를 꿈꾸던 쿠바 이민소년이 마침내 그의 영웅을 뛰어 넘어 명예의 전당 후보에 서기까지 42년이 걸린 것이다. 그에게 이 순간은 42년을 바친 자신의 일생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순간이었던 것. 어찌 시간이 멈추기 바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바람대로 시간은 거기서 멈춰야했다. 라피는 그의 영웅 로베르토 클레멘트와 너무도 닮은 이력과 기록을 계승했지만, 결국 그의 운명조차 계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로베르토 클레멘트는 72년 9월30일 시즌 최종 경기의 마지막 타석에서 3000안타를 기록하는 행운을 잡았지만 그것이 생애 마지막 타석이었다. 72년 12월 31일.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니카라과에 발생한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구호물자를 싣고 가던 중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하는 바람에 형체도 없이 숨졌었다.

불행은 라피도 마찬가지였다.

3000안타의 대기록을 작성한지 보름가량이 흐른 8월 2일.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라파엘 팔메이로가 금지약물을 복용했다고 공식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단호한 언어를 사용하며 그에게 10경기 출전정지명령을 내렸다. 지금까지 적발된 금지약물 복용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수였고, 얼마 전 전 세계 야구팬들의 환호를 받았던 장본인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충격과 공포. 급전직하 떨어지는 라피의 운명

미국의 한 스포츠지(紙)에선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발표를 가리켜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작전' 이라고 설명했다. 그 만큼 갑작스런 라피의 약물복용사실이 대서특필 되면서 점차 전세계 야구팬들의 심장은 화석이 되어 굳어가고 있었다.

7월16일 라피의 타석은 그의 야구 인생에 있어 마지막과도 같은 타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8월 2일을 전후해 그의 야구인생은 로베르토 클레멘트가 탔던 비행기가 검푸른 바다로 향했듯 그렇게 끝을 알 수 없는 불명예의 바다로 추락하고 말았다. 또한 로베르토의 육체처럼 라피에 관한 전설과 그를 향한 존경도 형체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마치 누군가 조용히 라피에게 다가와 불행이란 모자를 씌워주고 사라진 듯 보였다.

덧붙이는 글 | 3편이 이어집니다.

2006-02-05 10:17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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