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던 박정양의 아들인 박승희는 일본 유학 중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연극 애호가를 넘어 스스로 연극인이 되고자 1923년 사재를 털어 토월회를 만들었다. 당시 토월회에는 여배우로 이월화가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월화는 일본유학출신의 지식인이자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박승희를 사랑했다. 하지만 약혼녀가 있었던 박승희는 이월화의 구애를 거절했고 이월화는 토월회를 떠났다. 토월회의 히로인 이월화가 사라져버리자 박승희는 이월화를 대체할 여배우가 급하게 됐다. 이때 찾아낸 배우가 복혜숙(1904~1982)이었다.

 한국영화 속 자상하고 인자한 어머니상을 구현한 복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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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혜숙은 1904년 충남 대천에서 후에 목사가 되는 복기업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복마리아였다. 일찍이 신교육을 접할 수 있었던 그녀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이화여전에 들어갔다. 3학년 때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을 하던 중 '수산장'이라는 수예학원에 들어가 수예를 익히게 됐다. 일본어가 유창하고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녀는 수예학원 원장의 주선으로 일본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요꼬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간 복혜숙은 뛰어난 솜씨로 만든 물건을 내다 팔아 적지 않은 용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극장에 출입하면서 각종 공연과 영화에 빠졌다. 그녀는 무용수가 되려고 사와모리 무용연구소에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반년 동안 궂은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소식이 끊긴 딸을 찾으러 일본에 온 아버지에 의해 고국으로 끌려왔다.

복혜숙은 아버지가 세운 김화여학교의 일본어선생으로 일했다. 하지만 시골의 무료한 생활에 질린 그녀는 가출을 했다. 복혜숙은 단성사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신파극과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단성사 변사 김덕경을 찾아가 배우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1921년 복혜숙은 복마리아라는 이름을 이혜경으로 바꾸고 김도산이 이끄는 신극좌에 입단했다.

복혜숙이 신극좌에 입단할 당시는 신파극이 전성기를 지난 시기였고 영화에 밀려 극장을 잡지 못하고 유랑극단처럼 지방을 떠돌기 시작할 때였다. 극 또한 엉성해서 대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충 말로 대사를 약속하고 무대에 서는 것이 일반이었다. 복혜숙은 작품의 완성도에 실망하여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까지 기억하고 있던 <누교>의 극본을 쓰고 자신이 주연을 맡았다. 공연은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주먹구구식 교육이 아닌 체계적 교육을 받기 위해 신파극단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1924년 일본에서 유학한 현철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를 세웠다. 복혜숙은 이곳에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공연하고 내분에 쌓인 채 문을 닫았다. 하지만 복혜숙은 <인형의 집>에서 노라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고 이월화가 빠진 토월회의 전속여배우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이때 예명도 이혜경에서 복혜숙으로 바꿨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이 작품은 적자에 허덕이던 토월회의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지방 공연요청이 쇄도했다. 대구를 시작으로 남부지방을 돌며 흥행몰이를 했다. 토월회의 작품은 점점 통속적으로 흘렀다. 그 동안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던 박승희는 흥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주요 단원들이 박승희에 불만을 품고 토월회를 탈퇴했다. 토월회는 휴면기에 들어갔고 복혜숙은 무대를 떠나 조선권번의 기생으로 일하며 영화에 출연했다.

복혜숙이 비중 있는 역으로 처음 출연한 영화는 <농중조(새장안의 새)>(이규설 연출, 1926년)였다. 토월회에서 <춘향전>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던 그때, 윤백남의 요청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의 통속극, <농중조>에서 복혜숙이 맡은 역은 여주인공 마화숙 역이었다. 젊은 남녀의 자유연애를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나운규가 조연으로 나와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흥행도 성공적이었다.

그 뒤, 복혜숙은 <홍련비련>(1927년, 이필우 연출), <낙화유수>(1927년, 이구영 연출), <세 동무>(1928년, 김영환 연출), <지나가의 비밀>(1928년, 유장안 연출) 등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복혜숙은 <아리랑>(1926년, 나운규 연출)의 신일선과 함께 20년대 최고의 스타였다.

복혜숙은 1928년부터 8년간 비너스라는 다방을 운영했다. 처음에는 얼굴마담으로 있었는데 그 다음해, 다방을 인수해 직접 경영했다. 당대의 스타 복혜숙이 운영하는 비너스는 유명인들이 찾는 명소였다. 비너스에서는 낮에는 차를 팔고, 저녁에는 바를 운영했다. 또한 춤을 추는 무도장을 겸했는데 조선총독부에서 무도장을 허가하지 않자 1937년 1월 '삼천리'에 복혜숙을 비롯한 서울의 유명한 기생들이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비너스를 운영하면서 복혜숙은 1929년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고, 영화에도 계속 출연했다. 또한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방송극을 쓰고 출연을 했다. 30년대부터는 <그대 그립다> <종로행진곡> 등 유행가 음반을 취입했다. 한마디로 이 시기 복혜숙은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수업료>에서 할머니 역의 복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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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년대 여주인공만을 맡았던 복혜숙은 <수업료>(1940년, 최인규 연출)에서 처음으로 할머니 역을 맡았다. 비너스를 운영하던 1933년 경성의대 출신인 김성진과 결혼했는데 시어머니가 영화와 연극에서 복혜숙이 다른 사람의 애인, 부인이 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복혜숙은 자상하고 인자한 할머니로서 영화에 출연했다.

40년대 이후 복혜숙은 영화의 주인공은 되지 못했지만 300여 편이 넘는 영화에서 조역과 단역으로 출연했다. 연극 무대와 방송에도 꾸준히 얼굴을 비췄다. 한국전쟁 중에는 한국군대의 문예중대에 자진 입대하여 군복을 입었고, 1954년 한국 영화에 대한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어 한국 영화의 중흥에 앞장섰다. 또한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73년부터는 최초의 영화인 연금수혜자의 혜택을 받았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집을 뛰쳐나왔던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서 무대 위에 있었고 카메라 앞에 섰다. 300여 편의 출연 영화 중 그녀의 마지막 영화는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년, 이장호 연출)였다. 말년에 창덕궁 낙선재에 출입하면서 이방자 여사와 칠보 장식물을 만들며 소일했던 복혜숙은 1982년 10월 5일 7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동시대를 살았던 여배우들이 어렵고 힘들게 여생을 보냈던 것에 비하여 복혜숙은 후배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평소 후배들에게 어머니라고 불리었던 복혜숙은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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