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낮 효창운동장에서 만난 이유형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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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염원을 담은 남북 통일축구경기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1990년 10월 이후 12년만에 서울서 재개된다. 일제시대 경평(京平)축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경기는 그간 남북간의 '대리전'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지난 93년 10월 카타르에서 벌어진 미국월드컵 예선 이후 처음으로 펼쳐지는 이번 '남북 축구대결'은 과거 '경평 축구대회'와 같이 '화합'과 '축제'의 성격을 가진다.

남북화해 무드 조성에 또 하나의 역할을 하게 될 남북통일 축구경기는 실질적으로 평양시민과 서울시민의 '한풀이의 장'이었던 '경평 축구대회'가 46년 3월 막을 내린 후 반세기만에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온 국민이 7일 오후 7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지는 '2002남북통일축구경기'를 학수고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4년, 35년, 46년 경평축구대회에 참석했던 이유형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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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이 경기를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이 있다. 34년, 35년, 48년 경평축구대회에서 선수로 뛰었던 원로 축구인 이유형(91)옹. 이 옹은 경평축구 대표는 물론 48년 런던올림픽 때 축구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기도 한 한국 축구계의 산 증인이다.

100살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이 옹은 아직도 축구와 함께 산다. 지금도 그를 만나려면 언제든지 축구경기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된다. 9월 6일 낮 12시 30분 할렐루야팀과 국민은행팀간의 실업연맹전이 펼쳐지던 효창운동장에서 이 옹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살아 생전에 다시 남북축구 대결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월드컵을 통해 한국축구는 다시 태어났어요. 과거의 격한 감동이 재현되길 기대합니다."

과거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이 옹은 다시 희망을 불태우고 있다. 살아생전 다시는 경평축구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이 옹은 90년 남북통일축구로 경성축구가 부활하는 것을 보고 남다른 감회에 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90년 당시 남북통일축구는 과거 자신이 선수생활을 할 때 느꼈던 감정과는 많이 차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생동감이 없어 아쉬웠다고 이 옹은 지적했다. 과거 선수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화산' 같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격한 감동에 빠지게 하는 힘이 있었지만 요즘 젊은 후배 축구선수들의 모습에서는 과거의 '패기'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 그러나 월드컵을 계기로 살아난 한국축구가 이번 대회를 통해 북한축구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이 옹은 기대하고 있다.

"경평축구와 특별한 인연"

이유형 옹은 '경평축구'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황해도 신천 출신인 그는 34년에는 평양축구단 대표로 경평전을 뛰었고, 24살의 나이로 연희전문에 입학한 35년에는 경평축구단 대표로 출전했으니 말이다. 1년 사이 평양팀에서 경성팀 대표로 옮기게 된 것은 당시에는 거주지에 따라 소속팀을 나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유형 옹은 "과거 경평축구처럼 축구경기를 통해 남북이 하나가 되는 동질감을 느꼈으면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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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은 운동장에 잔디는 물론이고 스탠드도 없었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버드나무 위에 올라가 경기를 보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그의 경평축구대회 성적은 1승 2무. 그가 34년 평양팀 대표로 첫 출전했을 때는 1대 0으로 이겼고, 35년 서울팀 대표로 출전해서는 1대 1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또 해방 이듬해 열린 46년 대회에서는 서울 대표팀으로 출전, 1대 1 무승부를 기록했다.

"축구경기를 통해 남북이 하나가 됐어요. 일제 식민지 시절 축구는 조선 사람 몇 명만 모여도 붙잡혀가던 때에 너나 할 것 없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지요. 상대팀을 상대로 이기기 위해 경기를 했지만 선수들의 마음속에 적은 오직 일제였어요."

일제 당시 경평축구대회는 식민지 시대에 한민족의 울분을 토로하는 자리였고, 또 한풀이 장소였다. 상대는 같은 민족이었지만 경기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언젠가는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수들은 '맞수' 의식으로 뭉쳐 사력을 다했고, 관중들은 뜨거운 응원 열기에 고조돼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경찰에게 끌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양팀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적으로 만나지만 경기가 끝나면 승패와 상관없이 서울운동장 주변의 선술집에 들어가 한 잔의 막걸리를 기울이며 식민지의 설움을 털어 냈다고.

"유니폼 색도 가지가지... 서울은 빨강색, 평양은 파랑색"

"경평축구대회에 나서는 선수들은 각 도시를 대표하는 색깔에 맞춰 입고 경기에 나섰어요. 평양팀은 청색 유니폼에 '평'자가 쓰여있는 유니폼을 입고 뛰었고, 경성팀은 빨강색 유니폼에 'V'자 표시가 되어있는 유니폼을 입고 뛰었지요."

'빨갱이'와 북한을 상징하는 색깔로 오랜 세월 남한 사람들을 괴롭혔던 '빨강색'이 경성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다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서울은 '빨강색'이 가지는 그 원래의 의미를 다시 복원했다고 말한다.

내일(7일) 열릴 남북 통일축구대회에 한국대표팀은 빨강색을, 북한대표팀은 하얀색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된다. 12년만에 남북이 하나돼 뛰는 이날 경기에서 우리는 또 어떤 감동을 맞게 될까?

이 옹은 7일 불편한 몸을 이끌고 상암경기장으로 향할 예정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반세기전 경평 축구대회에서 못다한 한을 털어 낼 작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칠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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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남자. 산소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공희정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기자단 단장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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