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포르투갈과의 경기가 있던 날, 김태상씨는 가슴에 `쟁취 주거 생존권!`이란 빨간 천을 두르고 시청 앞 1인 시위를 했다.
ⓒ 이혜준

관련사진보기

월드컵이 끝났다. 한 달간의 '붉은 축제'도 막을 내렸다. 즐거웠다. 유모차 안의 아기부터 60대의 노인까지, 그리고 독일, 미국, 중국 등 세계 어느 곳에서던 '한국인'이란 핏줄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한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외쳤던 그 시간이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세계가 극찬한 축제의 장. 하지만 이를 위해 자신의 집을, 자신의 삶을 빼앗겼던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한국과 포르투갈의 대 격돌이 있던 6월 14일. 이날도 서울 시청 오거리에는 어김없이 마법의 붉은 융단이 깔렸다. "대~한민국!" 경기가 시작되려면 5시간이나 남았는데 그들의 축제는 이미 한창이다.

시청 정문 앞 계단 위. 그 곳에는 또 한 명의 남자가 상의에 붉은 천을 두른 채 앉아 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땡볕을 맞으며 눈앞의 붉은 물결을 쳐다본 지 5시간째. 그의 천 위에는 'Be the Reds!'가 아닌 '쟁취 주거 생존권!'이란 생소한 문구가 적혀 있다.

 상암 2공구 앞 논과 밭이 있던 일대.
ⓒ 양회웅

관련사진보기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 소속 김포 신곡리 철거민 대책위원회에서 나온 김태상(54)씨. 작년 12월 31일부터 계속된 전철연 1인 시위는 한국전이 열리는 이날도 예외없이 진행됐다.

"나도 저기 들어가서 팔딱팔딱 뛰고 싶지. 한국이 이겼으면 좋겠고 저 축제에 같이 어울리면 얼마나 좋겠어." 자신의 코앞까지 가득 찬 붉은 티의 무리들을 바라보며 김씨가 말한다.
"하지만 축제는 축제고 생존권은 생존권이지.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면서 감옥까지 가서 고생하는 사람 생각하면 내가 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이미 자신이 사는 집도 작년에 강제 철거돼 가족이고 집이고 산산조각 났는데도 김태상씨는 '그'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김태상 씨가 말하는 그는, 죽어도 시청 앞에서 죽겠다던, 상암동 철거민 대책위원장 이동수(32)씨다. "절대로 이렇게 집을 잃지 않겠노라"며 함께 싸우던 동네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상암동 철거대책위에는 위원장 이동수씨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서울 구치소에 수감중이다.

 2002년에 상암 철거민이 세입할 예정이던 임대아파트는 현재까지 미완으로 남아 있다.
ⓒ 양회웅

관련사진보기

1997년 3월 6일.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정부는 현재 주경기장이 세워진 상암동 일대를 택지개발 구역으로 지정 고시했다. 98년 10월 월드컵 주경기장 입지가 결정되고 착수공사가 시작됐다.

99년 4월 18일. 빨래를 널면 몇 시간도 안돼 까맣게 변할 정도로 환경이 안 좋다는 상암동 주민들의 살기 위한 투쟁이 시작됐다. 철거민 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를 결성, 개발지구 내 세입자들에게 가수용시설(임시거처)과 임대주택 보장을 요구하며 상암 주민들은 정부와의 싸움에 들어갔다.

철대위는 서울시청과의 대화를 원했지만 시청은 딱 잘라 "안된다"는 통보뿐이었다. '가수용시설 부지가 없고, 화재의 위험이 많아 지어줄 수 없다'는 이유이다. 전철연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99년 3차례 그리고 2000년에는 철거용역 500여명과 전투경찰 1000여명이 투입돼 마지막으로 싹쓸이 철거됐다.

국무총리령에도 명시돼 있다는 '동절기 철거 금지령'. 몇 십년은 존재했을 상암동 판자촌은 한겨울 칼바람속에서 그렇게 사라졌다. 뒷집 아주머니의 머리가 깨지고, 옆집 아저씨의 코뼈가 부러지고 상암 2공구에 살던 40세대는 단 4차례의 철거에 의해 결국 뿔뿔이 흩어졌다.

 `전철연 깃발 아래 생존권을 쟁취하자` 빨간색 글자가 박힌 담벼락 너머로 포크레인 갈고리가 무언가를 집어 들고 있다.
ⓒ 박예준

관련사진보기

정부가 그들에게 준다던 임대주택도 지정고시에 따라 96년 12월 6일 이후에 이주한 사람에겐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그나마 준공을 완료하고 2001년에 세입시키겠다는 약속도 준공을 맡은 건설 회사가 부도난 탓에 임대아파트는 2002년 현재까지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쥐어진 건 단돈 몇 십만원의 이주대책비. 이동수씨는 그 돈을 거부하고 작년 12월 31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시청 앞 1인 시위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청 앞 돌바닥의 냉기를 피하려고 침낭에 비닐을 씌워 잠자기를 계속했다.

4월 26일 밤. 그의 비닐과 침낭을 난도질한 시청 직원의 행위에 항의하던 이씨는 15명의 동료들과 함께 남대문 경찰서에 연행됐다. 나머지 동료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그는 '특수공무집행 방해 및 폭력'등의 혐의로 서울 구치소에 수감됐다.

6월 15일 기자는 이동수씨가 수감된 서울구치소를 찾았다. 수감번호 179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7분이었다. 두터운 칸막이 사이로 비친 그의 얼굴은 맘씨 좋은 옆집 아저씨처럼 순한 인상이었다.

- 지금까지 싸워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서울지역은 빈민이 살 곳이 없다. 정부는 주택을 살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가 아닌 개발 이윤으로만 생각한다. 빈민이 살 수 있는 곳은 영구 임대 아파트뿐인데 그것을 얻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 결국 혼자남아 싸웠는데 외롭지 않았나?
"많이 외로웠다. 하지만 현재도 다른 지역 철거민들과 연대 투쟁하고 있다."

 상암동택지개발지구 지도.
ⓒ 박예준

관련사진보기

- 월드컵 때문에 당신이 시위하던 시청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한국을 응원했다. 알고 있었나?
"구치소에서 신문으로 미국전 기사를 읽었다. 씁쓸했다. 시청 앞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모였지만 그 대중속에서 혼자 남아 싸워야하는 현실이 굉장히 안타깝다."

- 지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재판 진행하면서 무고하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다."

- 구치소에서 나가게 되면 그 후의 계획은?
"다시 시청으로 나가 1인 시위를 할 것이다."

순한 눈매를 가진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이곳을 나가 1인 시위를 하겠다."

그와 헤어지고 찾은 상암동 판자촌. '전철연 깃발 아래 생존권을 쟁취하자'. 빨간색 글자가 박힌 담벼락 너머로 아직도 남은 것이 있는지 포크레인 갈고리가 무언가를 집어들고 있었다.

그 앞으로는 수천평의 나대지(건물을 짓지않고 비워둔 집터)가 가난했던 상암동의 땅값을 올려줄 새 아파트의 준공을 기다리고 있었고, 뒤로는 길가의 노란 꽃들이 우리를 월드컵 주경기장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이제 7월. 월드컵은 끝났다. 시청 앞, 출렁이던 붉은 물결은 사라졌고, 목이 터져라 외쳤던 "대~한민국"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동수씨는 "자신이 있는 한 상암 철대위는 해체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몇십만의 사람들이 사라진 시청 앞. 오늘도, 내일도 가슴에 붉은 천을 두른 또 다른 '그'가 홀로 서 있는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스포츠피플21(www.sportspeople21.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