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필자는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고 있다. 월드컵이 끝나는 날 아침에 늦잠을 자고 한참을 잠자리에서 뒹굴다 일어났지만 뭔가 허전하다. 매주 일요일에 즐겨 보는 TV 코믹 연속극도 어쩐지 밋밋하고 비디오를 빌려다 봐도 재미있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토요일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자면 오전에는 일어나는 법이 없는 애들도 TV 앞에 잠시 앉았다가 책을 뒤적이다가 다시 방에 가서 뒹굴고 있다. 휴일이면 컴퓨터와 씨름하며 지내다 그 동안 분위기에 휩쓸려 축구 응원을 다니다 보니 뭔가 어색한 모양이다.

그 동안 월드컵 분위기에 파묻혀 지내다 문득 정신 차려 보니 6월의
마지막 휴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 아침 우리 가족의 모습이다. 이게 월드컵 후유증인가? 이러다 병이라도 나는 게 아닌가? 신문에 난 월드컵 후유증 대책이란 것을 읽어봐도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월드컵 즐기기

오후 늦게 생활 필수품도 사고 기분 전환도 할 요량으로 시내에 나갔는데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세탄 백화점 주변 부킷 빈탕의
도로를 폐쇄하고 3개의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참고로 부킷 빈탕이란 '별이 빛나는 언덕'이란 뜻으로 젊은이는 물론 외국인들도 많이 모이는 곳이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월드컵 결승 축제를 위해 길을 막고 함께 축구경기를 즐긴 후 그냥 헤어지기 서운해서인지 여러 가지 추가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자정까지 즐긴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모일 시간이 아닌데도 주변의 카페에서는 의자를 잘 보일 수 있는 곳으로 옮기고 일부는 우승팀맞히기 응모를 하는데 1등 경품이 아우디 승용차다. 그리고 독일과 브라질의 응원용 유니폼과 머리띠를 파는 사람들도 있는데 인기 품목은 브라질 팀의 노란색 털모자인 것 같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만 순식간에 도로는 인파로 꽉 차 버렸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자 선수들의 묘기에 탄성을 지르며 경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붉은 색깔로 통일된 복장도 아니었고 자기나라 선수들이 뛰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열심히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이 든 사람도 있었고 전 가족이 구경을 나오기도 했는데 특이한 것은 순찰 나온 듯한 몇 안 되는 제복 입은 경찰들도 관중석에 끼어 같이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월드컵 후유증을 걱정하는 것은 이기적인 발상?

이러한 모습을 보고 우리가 월드컵 후유증을 걱정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발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꿔 말하면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4강에 오르지 못했어도 과연 이번같은 뜨거운 성원을 보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것은 한국팀이 결승 진출이 무산되면서 갑자기 열기가 식어 가는 것 같았고 터키와 치른 3-4위 결정전도 예전만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월드컵 결승전을 보면서 브라질 사람들은 관중들도 정말 축구를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축구의 발전은 선수들의 기량 못지않게 관중들의 이해도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

사실 내가 좋아하는 팀 선수에 관해 알고 성원을 보내면 이번처럼 분위기에 휩쓸리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월드컵이 끝난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후유증을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사람은 아는 척해도 자신이 경험한 것만 알고, 알고 나면 그 느낌은 예전과 다르다"는 말이 있다.

사실 따져 보면 우리는 다른 나라의 스포츠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던 것 같다. 독일의 축구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차범근 선수의 독일 진출 후의 일이고 미국이나 일본 야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도 박찬호 선수나 선동열 선수의 진출 후의 일이며 박세리 선수가 미국 LPGA에서 우승하면서 스웨덴의 소렌스탐이란 위대한 골프선수가 있고 그 선수가 한국에도 왔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번을 계기로 우리나라 축구팀보다는 축구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되면 아니 축구에 국한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부 참여는 못해도 스포츠를 알고 즐기면 새삼스레 후유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 나라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2002-07-01 23:4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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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진작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아름다운 자연과 일반 관광으로 찾기 힘든 관광지, 현지의 풍습과 전통문화 등 여행에 관한 정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생활정보와 현지에서의 사업과 인.허가에 관한 상세 정보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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