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의 6월 한달 동안 지구촌을 달구었던 월드컵이 브라질의 우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제 월드컵의 흥분과 감흥을 뒤로 하고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의 여운은 아직도 우리를 잡아끌고 있다. 아니 이제 한국에서는 흥겨운 잔치의 뒷자리가 시작될 지도 모르겠다.

한국-포르투갈전의 감격을 인도네시아에서 맞이한 뒤 나는 한국에 갔었다. 그래도 세계인이 동참하는 월드컵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 개최할 때 나도 그 분위기를 한번 느껴보리라고 귀국일자를 맞추었던 내게 한국 대표팀은 고마운 선물을 주었다.

한국이 4강까지 오르면서 내게 한국-이탈리아전의 드라마와 한국-스페인전의 가슴졸이던 흥분까지 고국에서 모든 한국인들과 즐길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비록 한국이 독일에 지긴 했어도 6월 29일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올 때까지 한국 대표팀은 내게 빡빡한 경기관람일자를 제공해 주었다. 고국에서 그 열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더없는 행운이었다.

29일 비행기 안에서 시계를 보며 나는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한국-터키전을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우리집은 공항에서 아주 가깝지만, 입국 과정과 도로에서 시간이 늦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는 예상시간보다 빨리 도착했고, 총알같이 집을 향해 달려 경기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해서 TV를 켤 수 있었다. 경기시작과 더불어 지지거리기 시작한 텔레비젼 녀석을 두들겨 맞춰 놓았더니 벌써 1:0 이다. 황당해서 다시 보아도 역시 1:0. 맥이 풀려버린 경기는 다행히 동점이 되는 듯 하더니, 그후로 3:1 까지 벌어진다. 탄식이 나왔지만, 종료전 골을 집어넣는 걸 보면서 그래도 한국이다. 정말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강팀이 되었구나 싶다. 월드컵 4위. 아쉽지만, 정말 잘 했다. 대한민국!

일요일. 느지막히 일어나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집안일을 챙겨둔 뒤 아는 분 댁에서 저녁을 먹으며 결승전을 관람했다. 독일이 선방했지만, 후반에 2골이나 먹는 걸 보고 많이 아쉬웠다. 이운재 선수가 3-4위전에서 조금만 잘했어도 칸을 물리치고 야신상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결국 칸이 야신상을 받는다는 보도를 봤지만, 상 받아도 기분 찜찜하겠다 싶었다. 한국, 이래저래 아깝다.

집에 와서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켜놓고 있는데, 포커스 꼬레아란 내용이 방영된다. 별 생각없이 보고 있다가 귀가 번쩍 뜨였다. 월드컵을 마감하면서 한국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었는데, 한국이 개최국으로서 정말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한국은 아시아 축구사와 또한 세계 축구사에 남을 실적을 남겼으며, 한국의 4위 진입은 당연한 실력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한국은 유럽, 아메리카와 더불어 아시아가 4강에 진출하는 새역사를 만들었으며, 한국팀의 실력은 세계 정상의 팀들과 같은 수준에 올라 있다, 아시아의 자랑이며, 경축할 일이다라는 내용으로 방송은 시작되고 있었다.

스튜디오의 진행자가 물꼬를 턴 뒤 한국현지에 파견된 리포터가 결산 내용을 담았다. 그 중에는 이번 월드컵 내내 우리가 시달렸던 심판 판정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한국은 본선 시작부터 각종 심판 판정 시비에 휘말렸으나, 한국-이탈리아전은 심판의 도움없이 한국이 실력으로 올라갔음을 보여준 경기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독일전, 한국-터키전의 패배와 관련해 판정시비를 할 수도 있을 텐데 한국인들이 감정적인 대응을 하지않고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매우 놀랍고 감탄할 만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유상철 선수와 이운재 선수의 인터뷰를 따왔다.

"판정에 있어 심판의 오심또한 심판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심판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어쨌든 우리는 졌고 오심에 대해 선수가 얘기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상철 선수)

"오심으로 인한 불이익은 어느 팀이나 당할 수 있다. 오심도 경기의 한부분이며, 어쨌든 우리 선수들은 열심히 싸웠고, 다음을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운재 선수)

이어 히딩크 감독의 발언도 따왔는데, 우리 골이 늦게 터져 안타까웠으나,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라는 내용이었다. 어떤 결과든 담담히 받아들이고, 스포츠 맨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세에 충실한 우리팀의 모습은 이 인도네시아 리포터에게 있어서 참으로 놀랍고 감탄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하기사 열대의 태양만큼이나 때로 광적이고, 자신의 팀의 승패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인니인들의 축구관람 스타일을 고려해 볼 때, 아니 여지껏 오심을 강조하고 부풀리는 모습을 보여왔던 유럽의 강팀들의 한심한 작태에 시달렸던 한국팀이 패배에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준 것은 의외의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어 카메라는 한국의 관람태도와 붉은 악마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패배에 눈물을 흘릴 지언정 미쳐 날뛰거나 폭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수용의 자세와 자국팀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보여준 수많은 붉은 악마들의 모습, 축제의 모습으로 즐기는 한국인들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한국은 4강에 진출한 강팀으로서의 면모뿐만이 아니라 개최국으로서도 훌륭한 자질을 보여주었다는 평이다.

오늘은 요코하마에서 결승전이 벌어진 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왔고, 이후에도 한국 국민들의 응원 문화에 대한 보도가 따로 편집되어 나왔다. 승패의 여부와 상관없이 월드컵이라는 축제를 즐기는 한국인들의 모습과 이를 지켜본 외국인들의 인터뷰가 뒤를 이었다. 한국의 응원문화는 그 자체로 이미 새로운 문화전파를 하고 있었다. 리포팅을 마치면서 현지 파견 리포터는 한국 응원단들과 함께 환호성을 외치는 모습을 맨 마지막에 내보냈다. 그의 모습은 함박 웃음에 가득찬 즐거움, 흥겨움을 같이 즐기는 경쾌한 모습이었다. 월드컵 보도 보면서 그런 건 또 처음 보았다.

한국은 이번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하는 획기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축구역사를 다시 쓰고,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웠다. 하지만, 한국의 결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3-4위전 내내 중계방송을 통해 울려퍼지는 응원가와 대한민국 짝짜짜 짝짝은 그동안 계속되는 승리 속에 이미 전 세계인의 뇌리에 깊이 박혔음을 느끼게 했다. 훌리건 못지 않은 열광과 함성의 혼연일치를 보여준 한국인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잊지 않는 질서정연함과 예의는 세계 속에 한국의 이미지를 아름답게 각인시켜 주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더욱이 나아가 승리의 환희 때 뿐만이 아니라 패배의 슬픔속에서도 스포츠에 대한 도의와 관중으로서의 예의를 보여준 한국인들은 새로운 월드컵 문화를 만들었고, 한국을 아로새겼다.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 강팀에게도 굴하지 않는 용기, 자국만이 아니라 상대국도 존중하는 태도, 겸허한 자세와 자부심. 얼마나 더 열거하면 좋을까?

사실 이번 월드컵을 마치면서 특별히 기사를 쓸 생각이 없었다. 3-4위전을 할 때도 너무 실망스러워 컴을 켜고 일을 하면서 곁눈질로 경기를 보느라 제대로 내용을 보지도 못했다. 월드컵으로 인해 흥미진진한 날들을 보냈지만, 덕분에 기가 많이 쇠진하기도 한지라 피곤하기도 했다. 그런데, 방송을 보다보니 의욕이 솟구쳤다. 승승장구하던 한국이 결승까지 가는 기대가 꺾이고, 터키전에서 솔직히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실망도 했었다.

그런데, 아! 우리가 월드컵에서 주목할 것은 경기의 승패만이 아니구나.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보게 되었는가, 한국이 어떻게 세계인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는가를 이곳에서 알 수 있었다. 정말 자랑스러워 할 만 하구나. 부실한 3-4위전을 보면서 우리 선수들의 실책에 실망하면서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었는데, 선수들의 인터뷰를 듣고 보니 오히려 다시 인간적인 존경심이 생겼다. 그래 우리에게 그토록 큰 기쁨을 안겨준 선수들이었지. 그걸 잊고 있었다.

사실 축구도 잘 모르고, 경기도 제대로 다 쫓아가 보지도 못해서 난 경기내용을 잘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봐도 심판 판정의 오심으로 패배했다는 주장들은 좀 억지스러웠다. 인니 리포터의 보도는 우리나라가 되려 편파판정 논란때문에 시달렸다는 시각이 짙었다. 독일, 터키전의 경우는 심판이 유럽인들에다 같은 이슬람국가인 쿠웨이트인이었다. 적어도 상대 국가들이 크게 불리한 판정을 받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정당하게 최선을 다했고, 승리에도 패배에도 깨끗이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이것만 해도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국민들의 모습까지도 인니뿐만이 아니라 세계 언론이 칭찬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우리는 정말 잘 해낸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자랑스러워 할 만 하다.

한때 들끓던 월드컵 열기가 오히려 마지막에 각종 이유로 소강된 느낌이 든다. 서해 교전 사태로 많이 상심하고 있고, 월드컵 열기에 묻힌 많은 사안들과 이제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즐거워할 것은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엄중히 따져야 할 것 또한 제대로 따졌으면 한다. 이제 월드컵을 되돌아 보고, 마지막 신명을 발휘하며, 우리가 성취한 축구의 발전과 한국인의 위상고취를 당당하게 기뻐하며 즐거워 하자.

12시가 넘었으니 한국은 이미 7월 1일이 밝았다. 오늘은 국민 축제의 한마당이 벌어질 국경일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 있지 못한 게 안타깝지만, 거리의 열기를 즐길만큼 즐기고 참여했으니 별로 여한은 없다. 오늘 하루 한국민 모두 쌈박하고 즐거운 날들을 보내시라.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우리 삶에 맞닥뜨린 각종 사안들에 치열하게 고민하며 열심히 살아가자. 그게 이번 월드컵이 우리 국민에게 선사한 열정일 것이다.

"대한민국 파이팅!"
2002-07-01 05:0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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