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지만 잘했다" 한국선수들의 선전에 환호하는 붉은 관중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은 쓰레기장이었던 난지도를 세계적인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시켰고 붉은악마는 결승 진출 좌절의 수렁에 빠진 한국대표팀을 건져냈다. '월드컵 결승'을 향한 한국과 독일의 마지막 대결이 펼쳐진 6월 25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90분간의 혈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심판의 마지막 휘슬이 울리는 순간 관중석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하지만 이내 붉은악마 응원단에선 한국팀에 대한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고 이는 이번 대회 첫 패배로 망연자실해 퇴장하려던 한국대표팀 선수들을 운동장 한 가운데로 되돌려세웠다. 그리고 6만5천여 관중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이날의 '패자'를 기립박수로 맞았다.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붉은악마 물결
상암동으로! 상암동으로! 경기장에 들어갈 수 없는 시민들은 월드컵공원 곳곳에 마련된 대형 전광판 앞에서 선수들을 응원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경기장 취재'라는 뜻밖의 행운을 안게 된 기자가 현장에 도착한 건 오후 4시경. 경기가 시작하려면 4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지만 경기장 주변에는 이미 10만이 넘는 붉은 인파로 가득했다. 일찌감치 경기장을 찾은 붉은 관중들은 저마다 얼굴 등에 페인팅을 하며 전의를 불태웠고 표를 구하지 못한 시민들은 월드컵공원 곳곳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 앞에 자리잡고 앉아 응원 채비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유독 '튀는' 평상복을 입은 30대 한국인 남성과 외국인 붉은악마가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부 다 붉은 옷을 입을 필요가 있나요.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안돼요. 전부 이 옷으로 갈아입어야 응원할 수 있어요."이쯤 되면 누가 한국인이고 외국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 생활 7년째라는 이 방글라데시인은 "아시아인들은 모두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다"면서 응원했다. 30대 남성 역시 "독일이 사우디아라비아를 8대 0으로 이기고 나서 아시아 축구를 많이 깔보고 있다"면서 "이번 기회에 한국이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한다"며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도 붉은악마 경기장 곳곳에선 붉은악마 차림의 외국인 관광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경기장 찾은 휠체어장애인

▲ 한진해운 식구들과 경기장을 찾은 휠체어장애인들 ⓒ 오마이뉴스 김시연

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악마 가운데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지체장애인 윤석조씨와 그의 도우미 손만섭(36·한진해운)씨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진해운 직원들이 경기도 김포에 있는 석암베데스다요양원 지체장애인 25명과 월드컵경기장을 찾은 것은 부산, 인천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장애인들의 거동이 불편한 까닭에 일부러 가까운 서울에서 열리는 준결승 경기를 예약했는데 마침 한국전이 걸리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축구장을 난생 처음 찾았다는 윤석조씨는 "한국이 2대0으로 이길 것"이라고 확신에 차 있었다. 8개 해운회사가 참여한 '해운리그'에서 4년 연속 우승을 한 사내 축구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만섭씨 역시 열렬한 축구팬. 그는 "한국팀 체력이 달려 불리하지만 홈그라운드라서 50대 50 정도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후 5시경 월드컵경기장 안에는 한국인 못지 않게 외국인 관중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놀라운 건 인종과 국가, 연령대를 떠나 외국인들 대부분이 '붉은악마'였다는 것. 흰색 유니폼을 입은 독일 팬이나 울트라니폰 유니폼을 입은 일본인들도 간혹 눈에 띄긴 했지만 붉은색 티셔츠와 수건, 모자까지 두른 것도 모자라 얼굴에 태극마크를 새기거나 태극기를 몸에 걸친 외국인들은 영락없는 붉은악마였다. 덕분에 외국인들이 적지 않았는데도 관중석은 온통 붉은색의 물결을 이뤘다.저녁 7시경 관중석에서 첫 '대~한민국' 구호가 나온 것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기 시작했다. 이어 골키퍼 이운재 선수를 시작으로 한국팀 주전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오자 관중들은 선수들 이름 하나하나를 연호하는가 하면 '오~필승 코리아' 노래에 맞춰 본격적인 응원을 시작했다.곧 이어 8시경 남쪽 스탠드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대형 카드섹션이 붉은악마 응원단 위로 솟아오르면서 응원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환호와 탄성이 교차한 90분 혈전
"꿈★은 이루어진다" 붉은악마 응원단이 조직적인 카드섹션을 펼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8시30분 경기가 시작되면서 '대~한민국' 구호와 '아리랑' 등 응원가가 교차하는 가운데 뜨거운 열기가 이어졌다. 한국 선수들이 공을 잡으면 관중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질렀고 독일선수들이 공을 잡기라도 하면 '우~'하는 야유로 상대팀의 기를 꺾었다. 전반 초반 이천수 선수의 슛이 상대팀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자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한국팀의 공격은 번번이 상대방 수비벽에 막혔고 심판마저 상대팀의 반칙에도 경기를 계속 진행시키자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특히 전반 31분경 주심이 독일선수의 할리우드 액션에 속아 오히려 한국선수에게 반칙을 선언하자 심판에 대한 야유는 절정에 달했다. 붉은악마 응원단 가운데 일부는 독일 선수에게 경고를 주라는 의미로 한꺼번에 '옐로우 카드'를 꺼내들기도 했다.
▲ '대-한민국' 구호에 맞춰 응원을 펼치는 붉은 관중들. ⓒ 오마이뉴스 김시연

경기가 계속되면서 남쪽 관중석에 모여 앉은 수천 명의 붉은악마 응원단이 주도하는 조직적인 응원이 운동장 전체로 퍼져나갔다. 전반전 후반 들어 한국팀이 수세에 몰리자 관중들은 "침착해"를 외치며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몇 차례 결정적인 골 찬스를 주고받았지만 결국 득점 없이 끝난 전반전. 화장실을 찾은 대여섯살짜리 아들과 30대 아버지는 나름대로 전반전을 평가해 보기도 했다. "아빠, 전반 0대 0이면 우리가 독일보다 잘 한 거지?""아냐. 우리가 못 한 거야. 공이 계속 우리 쪽에서 놀았잖아. 결정적인 위기도 많았고…."
▲ 경기가 잘 풀리지 않자 안타까워하는 관중들. ⓒ 오마이뉴스 김시연

후반 들어서도 한국팀에 대한 응원과 불리한 심판 판정에 대한 야유가 계속되는 가운데 후반 27분경 발락 선수에게 첫 실점을 당하고 말았다.관중석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입을 모아 "괜찮아"를 연호하며 선수들의 힘을 북돋기 시작했다. 특히 후반 10여 분을 남기고 홍명보 선수 대신 이탈리아와의 16강전 막판 동점골의 주인공 설기현 선수가 들어오자 관중들은 극적인 승부를 기대하며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쳐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어."이러한 분위기는 후반전이 5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까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전광판 시계마저 멎고 독일팀도 조금의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관중들은 패배를 예감하기 시작했다.관중들은 독일선수들의 의도적인 시간 끌기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한국선수들의 악착같은 투지에는 힘찬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 순간 박지성 선수의 결정적 슛이 골대를 빗나가고 말았고 이날 마지막이 될 탄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6월29일 대구에서 다시 만납시다"
"잘했다 수고했다 고생했다" 관중들은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이날 경기에서 선전한 한국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결과는 1대 0 패배. 비록 결승 진출은 좌절됐지만 관중석에선 승리했을 때 못지 않은 박수와 함성으로 선수들을 격려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어디선가 아리랑 노랫가락이 터져 나왔다. 6만여 관중이 입을 모아 아리랑을 합창하자 벤치로 돌아갔던 한국 선수들은 다함께 손을 잡고 운동장 한 가운데로 다시 걸어나왔다.이들은 곧 경기장 양쪽을 돌아다니며 손을 흔들어 관중들의 환호에 답했고 붉은 관중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오늘 경기의 패자가 이번 월드컵의 진정한 승자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 한 여성 관중이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손을 흔들어 한국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이러한 광경을 출입구 구석에서 지켜본 자원봉사자인 엄현식(21·대학생)씨는 "선수를 격려하는 관중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면서 "그만큼 좋을 경기를 펼쳤고 열심히 뛴 선수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록 요코하마행은 좌절됐지만 선수들과 붉은 관중들은 6월29일 대구에서 열리는 3·4위전을 기약하며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기장 안팎은 승리했을 때와 달리 비교적 차분했지만 젊은 붉은악마들은 '대~한민국' 구호를 외치며 못 다한 아쉬움을 달랬다.경기장 밖으로 한국선수단이 탄 버스가 나오자 시민들은 손을 흔들며 환호했고 한 40대 남자는 "잘했다, 수고했다, 고생했다"고 크게 외치며 멀리서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90분간 펼쳐진 한국과 독일의 혈전이 한편의 드라마였다면 그 주인공은 양팀 선수가 아닌 바로 관중석의 6만5천여 붉은악마였다.이들이 90분 내내 쉬지 않고 외친 구호와 박수소리, 장내를 압도하는 함성과 응원가는 방송 전파를 타고 전국 700만 거리응원단으로 퍼져 나갔고 이는 7천만 한겨레와 50억 인류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상암동 월드컵'의 주인은 바로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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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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