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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척박한 그 시대에 오로지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보호하려는 애민정신과, 배교여부와는 상관없이 서학에 접하면서 왜래문화와 전통문화의 조화를 통한 균형감각, 여기에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는 합리적 학문자세 그리고 과학적인 실용정신 등으로 당대 학문의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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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80회] 마무리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9회] 아쉬움을 덜고자 광맥에서 주운 몇 대목을 소개한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8회] 정약용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그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7회] 1836년 2월 22일 조선에서는 큰 별이 떨어졌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6회] 정약용이 아무리 '백과전서파' 지식인이라 해도 소설까지 지은 것은 놀랍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5회] 그는 어떤 사진기를 사용했을까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4회] 그는 중년에 귀양살이를 할 때부터 여러 가지 병고에 시달렸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3회] 정약용은 젊은 시절부터 놀고 먹는 양반들을 질시하였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2회] 정약용은 왜 한 편의 글도 한글로 짓기 않았을까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1회] 그의 현실인식은 치밀하고 예리했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0회] 해배 후 정약용의 신앙생활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69회] 정약용은 전근대를 뛰어넘은 근대인인가, 아닌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68회] 대산ㆍ연천과 주고 받은 품격 있고 격조 높은 편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67회] 그는 왜 굳이 회갑에 묘지명을 썼을까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66회] 그나마 귀양보다 귀향이 나은 것은 자유스러움이었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65회] 정약용이 본가에 올 때 혼자 몸이 아니었다고 한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64회] 반갑지 않은 인물이 안부를 물어왔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63회] 중년의 세월을 모두 강진에서 보낸 정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