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9 15:56최종 업데이트 23.11.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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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집에 올라갈 절임배추 ⓒ 구교형

 
지난 연재 기사에서 했던 절임 배추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이제 김장철도 끝물이라 이번 주는 지난주보다 더 많은 절임 배추가 왔다. 어느 날도 한 집에 다섯 상자의 절임 배추와 부속 야채 두 상자가 내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그중 두 개는 밖의 상자가 다 터지고 소금물에 절인 배추가 드러나 감싼 비닐이 위태위태한 상태로 왔다. 다행히 내용물이 터지지는 않아 봉합수술을 준비했다. 아침에 우리 기사들은 함께 일하며 서로의 일을 다 보기 때문에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건너편 동료 기사가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큰 비닐 두 개를 꺼내 갖고 와서 거기에 배추 상자를 넣고 테이프로 여러 겹 칭칭 동여맸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 기사들은 배송일을 위해 각자 준비하는 비품들이 있다(물론 개인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다). 박스 테이프와 매직은 기본이고 예전에 나는 긴급 수술을 위한 여러 종류의 비닐, 볼펜과 메모지, 칼, 물휴지 등을 항상 구비해 두었다.

가끔 신문지까지 요긴할 때가 있다. 냉동식품 상자 등에서 물기가 계속 흘러나올 때 신문지를 깔면 안심이 된다. 파손된 물건 상자를 대신할 크고 작은 상자들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터미널을 한번 돌면 뒤편 어딘가에서 구할 수 있어 따로 보관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나머지 세 상자도 조금씩 터지긴 했지만 박스 테이프로 조금씩 붙여두니 아무렇지 않다. 다만 아무리 수선했어도 터진 상자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안 되기에 쌓을 때 한 번 더 주의를 기울인다. 이제 출동 준비는 끝이다.

요즘 일하는 배송지 동네에 도착하면 가장 어려운 게 골목이 정말 좁아 차 세울 데가 거의 없다는 거다. 나는 차 빼달라는 독촉 전화를 받느니 큰 길가나 조금 넓은 도로에 일찌감치 주차해 놓고 아예 수레로 여러 번 다닐 생각을 한다.

그날도 주차한 후 같은 동네 다른 집 갈 것보다, 절임 배추부터 배송해 놓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절임 배추와 부속 야채 상자 7개만 꺼내 그곳부터 가기로 했다. 차에서 배추를 내려 수레에 싣고 골목을 가로질러 50여m 정도에 위치한 연립에 도착해 상자를 3층 고객 집까지 하나씩 짊어지고 나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상자를 갖고 올라가 집 앞에 턱 내려놓으니 인기척을 듣고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나와 "벌써 왔네요. 높은 곳까지 올라오라고 시켜서 미안해요." 하시더니 박카스와 함께 방에 들어가 점심값 하라며 한사코 2만 원을 쥐여주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해서 조금 전까지 낑낑 올라올 때만 해도 있던 가벼운 불평이 안개 걷힌 듯 사라지고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 가득했다. 돈보다 이심전심, 사람 사는 재미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혼자서 웬 김장을 이렇게 많이 하시냐니 자식들 것까지 다 해주려고 하신단다. 김장 때 다시 경험하는 엄마 마음.

택배회사에는 기사만 있는 게 아니다
 

택배회사에는 기사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 동료들, 건강 식품을 배달하는 여사님, 식당 주인 등이 함께 있다. ⓒ envatoelements

 
엊그제 토요일 오후에는 한 해의 수고를 서로 위로하고 새해를 미리 자축하는 우리 대리점 회식이 있었다. 일년내내 배송하는 정식 기사도 아니어서 갈까 말까 했는데, 점장도, 사무실 직원들도 내게 빠지면 안 된다고 꼭 오라고 하니 배송을 일찍 마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했다.

우리 대리점 기사는 50명 넘는 제법 많은 인원이지만 늘 자기 자리 주변 기사들만 만나기 때문에 다른 쪽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별로 만날 일이 없다. 그러나 그날 회식 자리에는 3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동료들로 식당을 가득 채웠다. 그날 그 식당 대박 났다.

일찌감치 테이블마다 자리 잡고 고기를 굽고 먹고 마시고 떠들썩했다. 나도 늘 함께 일하는 가까운 동료뿐 아니라 거의 눈인사밖에 할 수 없던 동료들과도 오가며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고 격려했다. 계속해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2015년부터 일을 시작했기에 이름을 전부 알지는 못해도 적어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내가 처음 일을 배울 때 사수처럼 데리고 다니며 길을 익혀주고 이것, 저것 가르쳐 준 젊은 사부님도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포옹하고 악수했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신입 기사를 태워서 택배의 기본기를 가르쳐 주는 조교(?)가 되어서, 후임도 몇 명 있다. 잘 견뎌주고 있어 고맙다. 내게는 특별한 마음이 드는 사람들이다.

우리 대리점의 식구는 이들뿐 아니다. 앞서 매일 아침 물품 정리를 도와주는 10여 명의 아르바이트 동료들, 그리고 매일 아침 8시 안팎이면 계약한 기사들에게 건강식품을 배달하는 여사님도 있다. 하도 오래전부터 매일 봐와서 우리는 서로 친하다.

황량한 현장에 나타나 레일을 따라 돌며 고객(우리 기사)과 만나 안부를 묻고 건강을 챙겨주고 덕담을 건넨다. 그분을 볼 때마다 목사가 성도 심방(방문) 하는 일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예전에 아르바이트가 없을 때는 레일 위에 가득 쌓여 미처 가져가지 못한 물건을 밀어주기도 했다. 여사님이 나타나면 우리는 괜히 허리가 아프다, 무릎이 아프다 엄살을 떤다. 그러면 누이처럼 이런 운동을 해라, 저런 걸 먹어 봐라 챙겨준다. 고향이 대구란다.

최근 8시쯤 휴식 시간에 우리 몇몇이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여사님을 만났는데 소매 없는 패딩만 입고 있기에 내가 안쓰러워 "안 추우세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뜻밖의 답변이 다른 기사 입에서 나왔다. "고급차 타고 와서 위에 세워놓고 내려오시는데요." 뜻밖의 이야기에 서로 겸연쩍어져서 눈웃음으로 인사하고 내렸다.

몇 년 전 열심히 일하던 중 동료들이 나를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여사님이 듣고 그 이후부터 녹즙, 배즙, 마늘액 등을 자꾸 갖다 주신다. 안 주셔도 된다니 당신도 기독교인이라면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 아무 말 말고 드시고 생각나면 기도해 달라고 한다.

또 있다. 매일은 아니지만 한 주에 한두 번씩 보험을 권하는 광고 쪽지와 함께 막대사탕, 강정 같은 것을 나눠 주시는 여사님도 있다. 매일 오지는 않아 녹즙 여사님만큼 친하지는 않지만, 여사님도 우리 현장의 동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보면 두 분 더 있다. 3층에 올라가면 구내식당이 있다. 회사의 외주로 입주해 매일 가정식 뷔페 음식을 5000원에 제공한다. 사실 우리는 그날 물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식사 시간이 영향을 받아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기사가 그리 많지도, 일정하지도 않다.

그래도 주인 부부는 항상 정갈하고 성실하게 차려놓는다. 더구나 가성비가 훌륭해 밥과 국까지 10찬에 가깝다. 지난여름 일을 마치고 늦은 오후,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내인 여주인과 사무실 직원이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분에게 암이 발견되어 곧 수술을 하려고 마침 그날까지만 일하게 되었단다. 식사를 마치고 그분에게 가서 수술 잘되기를 바란다고 힘내시라고 덕담을 하고 나왔다. 그런데 최근 다시 나가보니 식당이 다시 열렸다. 초기라서 수술을 잘 마치고 많이 회복되어 지금은 몸이 좋아졌다고 한다. 너무 반갑고 감사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서 익숙하게 만나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크게 깊은 관계도 아니고 큰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늘 그 자리에 있어서 우리의 일상도 잔잔히 지켜지는 게 아닐까?

돈을 주거나 받는 것과 상관없이 날려주는 한마디의 덕담과 염려를 들을 때 '아, 내가 관심받고 있구나.' 하는 걸 느낀다. 겨울과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앞둔 11월 말은 늘 그림자처럼 그 자리에 있던 제3의 동료들을 확인하고 감사의 한마디라도 전하면 좋을 날들이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21편 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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