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5 10:45최종 업데이트 23.11.2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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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브뤼셀 중심에 있는 람빅 양조장, 깐띠용 ⓒ 윤한샘


브뤼셀에 왔다는 것은 유럽 맥주 기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민가가 드문 수도원을 다니다 오랜만에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로 들어오니 생경했다. 브뤼셀은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피터 브뤼헐, 반다이크, 루벤스 같은 바로크 미술 대가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예술의 도시이고 음식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벨기에식 홍합요리와 감자튀김 그리고 초콜릿을 맛볼 수 있는 미식의 도시이다. 

특별한 목적이 없는 관광객이라 할지라도 브뤼셀은 그랑 플라스 광장과 오줌싸개 동상 같은 멋진 추억을 남겨준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이 도시는 결이 다른 유혹을 선사한다. 물론 평범한 맥주라면 굳이 이곳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람빅, 그중에 깐띠용의 향이 브뤼셀로 유인했다.

람빅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는 맥주다. 거의 모든 맥주가 인간이 배양한 효모를 통해 발효를 하는 반면, 람빅은 야생 효모와 균의 지배를 받는다. 이 미생물들은 아주 오랫동안 양조장에 서식하며 특별한 향미를 창조하고 부여한다. 람빅 양조사들이 하는 일은 이 녀석들이 도망가거나 화를 내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인간이 먹을 수 있는 형태로 결과물을 바꿔놓을 뿐이다. 
 

박스에 담겨 있는 람빅들 ⓒ 윤한샘


람빅에 관여하는 미생물은 주로 락토바실러스라고 불리는 젖산균과 브레타노미세스라는 야생 효모다. 페디오코코스 균과 몇몇 다른 야생 효모가 관여하기도 한다. 젖산균은 신맛을 부여하고 야생 효모는 마구간, 말안장으로 불리는 강력한 페놀 향을 담당한다. 모두 당을 끝까지 먹어 치워 람빅은 깔끔하고 드라이한 바디감을 갖는다. 

람빅은 맥즙을 발효조로 이송하고 효모를 넣는 보통의 맥주와 차별화된 양조 과정을 거친다. 우선 맥즙을 끓인 후, 쿨쉽이라는 곳에 보내 미생물을 하룻밤 정도 묻힌다. 그렇게 짧은 1차 발효를 진행한 뒤, 나무 배럴에 담아 2차 발효와 숙성을 이어간다. 쿨쉽은 이름만 보면 대단한 장비 같지만 사실 널찍하게 펼쳐진 사각 구리 통이다. 쿨쉽에 담긴 뜨거운 맥즙은 서서히 식어가며 미생물의 간택을 기다린다. 이런 이유로 람빅은 미생물이 활발한 여름보다 선선한 가을이 양조에 적합하다. 


젖산균과 야생 효모가 스민 맥즙은 나무 배럴에 담겨 최소 6개월에서 2년 정도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람빅으로 변해간다. 균에 오염된 맥즙이 사람이 마시는 맥주가 되는 과정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마법의 결과물은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새콤한 신맛과 짜릿하고 쿰쿰한 향 속에 신선한 자두, 달큰한 꿀, 섬세한 오크 향이 녹아있다. 

나무 배럴의 종류와 첨가되는 과일에 따라 람빅의 세계는 다채로움을 입는다. 와인이나 럼 같은 술을 담았던 배럴 속 람빅은 상생과 투쟁을 거치며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향을 내놓는다. 체리, 복숭아, 사과, 라즈베리 같은 과일은 람빅을 생과일 맥주 주스로 변모시킨다. 람빅 크릭, 페슈, 뽐므, 프롬브아즈로 불리는 이 과일 람빅들은 맥주 세계의 혼종왕이라 할 수 있다. 

람빅은 오리지널 그대로 출시되는 경우가 드물다. 서로 다른 배럴과 숙성도를 갖는 람빅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섞여 놀랍고 흥미로운 결과물들이 세상이 나온다. 가장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람빅은 괴즈다. 오랜 람빅과 젊은 람빅을 혼합한 괴즈는 숙성 정도와 비율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자체 양조장 없이 블랜드를 전문으로 하는 양조장도 이런 문화 속에서 람빅 양조장의 일원으로 인정된다. 

브뤼셀 람빅의 심장, 깐띠용
 

양조장으로 가는 복도에 쌓여있는 람빅들 ⓒ 윤한샘


깐띠용은 브뤼셀의 유일한 람빅 양조장이다. 한때 이곳에는 150여 개가 넘는 전통 람빅 양조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깐띠용만 남아있다. 1900년 블랜더로 사업을 시작한 폴 깐띠용은 1937년 본격적으로 양조장을 세우고 자신만의 람빅을 시도했다. 그러나 세계 대전으로 사업이 중단됐고 후유증으로 그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들 마르셀 깐띠용이 물려받지만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깐띠용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건, 1978년 람빅 문화를 함께 알리기 위해 '괴즈 브뤼셀 박물관'을 세우고 나서부터다. 마르셀이 사업을 접으려고 하자 그의 외동딸 클로드 깐띠용과 남편 피에르 반 로이는 양조장을 물려받았다. 이들은 람빅 문화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으로 시도한 양조장 투어와 체험 프로그램은 점차 이곳을 방문한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입소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깐띠용은 확고한 브뤼셀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2003년 브루마스터가 된 아들 장 반 로이는 전통에 혁신을 더했다. 홉을 추가적으로 넣는 드라이 호핑 방식을 적용하고 10~20년 동안 장기 숙성 람빅을 기획하는 등 정체성은 유지하되, 시대에 걸맞은 실험을 전개했다. 또한 코냑이나 와인을 담은 배럴을 이용하거나, 이들을 다양한 비율로 혼합한 람빅도 선보였다. 

그 결과, 현재 깐띠용은 벨기에 최고 람빅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통 방식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래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깐띠용은 람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 수 있는 지표다. 신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람빅을 즐기지 않는 나도 한국에서 깐띠용은 종종 구매해서 마셨다. 비록 이번 여행이 벨기에 트라피스트 맥주 기행일지라도 깐띠용을 방문 목록에 넣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가 될 것은 너무 분명했다.

깐띠용은 브뤼셀 그랑플라스에서 남서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다. 흰 벽돌로 된 1층 건물에 짙은 회색 지붕을 얹은 '괴즈 브뤼셀 박물관'은 지극히 평범했다. 솔직히 간판이 없었다면 창고라고 여기고 지나칠 정도였다. 양옆에는 작은 아파트들과 상점들이 있었고 깊은 좁고 번잡했다.

개인적으로 '람빅을 만드는 환경이 이렇게 도시적이어도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람빅은 환경과 미생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강이나 숲이 가까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깐띠용은 자연을 볼 수 없는, 심지어 많은 차들이 다니는 대도심 가운데 있었다. 

이런 의구심을 품은 채 입구에 들어선 찰나 옅은 초산의 느낌이 코끝을 스쳤다. 시큼한 향이었다. 곧 오래된 나무 향도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누가 람빅 양조장 아니랄까 봐 이런 향들이 입구부터 나는구나. 
 

깐띠용 양조장은 거미줄로 가득하다 ⓒ 윤한샘


지붕에는 이슬이 아롱 맺힌 거미줄이 보였다. 아마 일반 양조장이었다면 당장 제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람빅 양조장에 거미는 소중한 존재다. 맥주 향을 맡고 달려드는 초파리 같은 작은 벌레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람빅 양조장에서는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미생물이 중요하다. 억지로 환경을 바꿀 경우, 결과는 참담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람빅 양조장이지만 의외로 내부는 평범하고 단출했다. 인테리어와 조명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동네 작고 낡은 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복도에는 람빅 병들이 쌓여있었다. 보관 창고가 부족한가 지나치고 있는데 놀랍게도 맥주가 들어있는 게 보였다. 복도에서 숙성을 하다니, 격식에 속박되지 않는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빈 병이 든 줄 알았던 박스 안에도 뽀얀 먼지를 쓴 람빅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투어는 총 세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다. 15유로(2만 1000원)가 드는 개인 예약 프로그램은 매주 토요일 진행되며 인터넷에서 예약해야 한다. 단체 또한 인터넷에서 예약하고 일정을 조율해야 한다. 물론 예약 없이 방문해도 셀프 투어가 가능하다. 8유로(1만 1000원)를 지불하면 양조장과 발효 공간을 둘러보고 2층 바에서 두 잔의 람빅을 맛볼 수 있다. 

고집이 느껴지는 양조 장비들
 

오래된 깐띠용 당화조 ⓒ 윤한샘

 
람빅이 가득한 복도를 지나자 곧바로 당화조가 나타냈다. 딱 봐도 세월의 흔적이 짙게 묻어 있었다. 현대 양조장에서 볼 수 없는 형태였다. 커다란 통은 오크 나무로 마감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철제 기어와 구리 재질의 관이 외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큰 갈퀴들은 당화할 때, 물에 섞여 죽처럼 되어 있는 곡물들을 휘저어 주기 위한 장치였다. 밀이 30% 들어가는 람빅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화조 여기저기에는 어김없이 영롱한 거미줄이 붙어있었다. 적어도 수십 년 동안 사용한 듯한 펌프와 각종 관이 지나다니는 통로와 구멍에도 거미줄이 보였다. 안쪽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오르자 세월을 뒤집어쓴 몰트 분쇄기와 끓임조가 자태를 드러냈다.
 

양조장비에 있는 거미줄 ⓒ 윤한샘


낡은 몰트 분쇄기는 칠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파란색을 입고 있었고 즉석에서 연결 가능한 벨트들이 걸려 있었다. 말 그대로 완벽한 수제였다. 구리 끓임조는 역사 그 자체였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 양조장에서 볼 수 있는 모양을 갖고 있었다. 백 년 넘게 변화를 거부한 고집이 고스란히 장비 위에 남아있었다. 

투어를 안내하는 화살표는 밝은 곳에서 어둠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쪽에는 계단이, 다른 한쪽에는 희미한 불빛 사이로 쌓여있는 나무 배럴들이 보였다. 먼저 가야 할 곳은 계단이었다. 여기에 바로 람빅 양조의 비밀이 숨어있다.  

컴컴한 계단을 올라가니 나무 지붕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용한 적 없는 새 배럴들과 자재가 놓여있는 공간 뒤로 지붕과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계단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위로 올라가니 약 20센티미터 정도 깊이를 가진 직사각형 구리색 통이 보였다. 바로 쿨쉽이다.
 

깐띠용 쿨쉽 ⓒ 윤한샘


그곳 역시 지붕은 나무였다. 외기가 들어올 수 있는 틈이 곳곳에 뚫려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마법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외부인을 경계하지 않을지 걱정됐다. 뜨거운 맥즙이 밤기운에 서서히 식어 가면 지붕 사이와 밖에서 들어온 미생물들이 여기서 저녁 파티를 벌일 것이다. 양조사는 이 녀석들을 담고 있는 맥즙을 나무 배럴에 넣어 파티를 안전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준다. 

맥즙이 담긴 나무 베럴의 구멍은 야생 효모의 배설물로 서서히 끓어 넘친 뒤 얇은 막으로 뒤덮인다. 파티가 완전히 끝나면 양조사는 구멍을 막고 세월의 흔적을 덧씌운다. 람빅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배럴이 쌓여있는 공간은 시큼한 나무 냄새가 가득했다. 배럴 사이사이로 거미줄은 여전했고 구멍에는 파티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배럴의 종류는 다양했다. 평범한 참나무 오크통부터 와인, 럼, 코냑, 버번을 품었던 통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람빅들이 가득했다. 나 같은 외부인이 데려온 미생물이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발효가 어느 정도 끝난 시점에서는 문제 되지 않을 듯했다. 람빅이 실제 만들어지는 공간을 보고 있다니 비현실적이었다. 람빅 양조장을 이전할 때, 지붕과 문을 그대로 떼어간다는 이야기가 이제는 이해가 됐다. 

전통 위에 세운 혁신
 

깐띠용 스트레이트 람빅을 따라주고 있다 ⓒ 윤한샘


이제 람빅을 만나러 갈 차례. 마음이 설레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현지에서만 마실 수 있는 람빅이 있기 때문. 깐띠용 괴즈나 크릭은 한국에서도 즐길 수 있지만 아무것도 섞지 않은 오리지널 스트레이트 람빅은 여기서만 시음할 수 있다. 

1층으로 돌아와 2층에 있는 바로 올라가니 흰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람빅을 따르고 있었다. 뭔가 깐깐해 보이는 태도는 자부심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첫 잔은 스트레이트 람빅, 이걸 마시려고 여기까지 왔다. 3년 된 스트레이트 람빅은 밝고 투명했다. 쨍하고 깔끔했지만 신맛은 부드럽고 산뜻한 과일 향이 올라왔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그래서 마음의 동함이 없는 노인이었다. 삶을 여여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런 맥주였다. 

시음주만 먹고 갈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는 테이크아웃이 불가능한 람빅들을 팔고 있다. 반드시 여기서 한 병을 비우고 가야 하는 맥주들이다. 고민 끝에 '50°N-4°E'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람빅을 골랐다. 라벨에는 깐띠용 양조장의 그림이 있었다. 가격은 30유로(4만 2000원), 현지치고는 높았지만 라벨과 이름이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했다. 
 

북위50도 동경4도 람빅 ⓒ 윤한샘


북위 50도, 동경 4도, 이름이 의미하는 건, 깐띠용이 있는 브뤼셀의 위도였다. 이름만큼 흥미로운 건, 캐릭터였다. 이 람빅은 2016년 11월 30일과 12월 6일에 양조한 람빅을 혼합한 뒤, 코냑 배럴에 숙성하고 2020년 2월 28일 병입 숙성한 한정판이었다. 

7% 알코올에 짙은 황금색을 띠고 있는 이 녀석은 탄산이 없었다. 배럴에서 모두 날아간 모양이다. 람빅은 인위적인 탄산은 넣지 않는다. 입에서는 바닐라와 허니 향이 멋지게 올라왔고 신맛은 세월의 힘에 의해 부드럽게 변했다. 섬세한 과일 향과 알코올은 우아한 맥주에 복합적인 매력을 더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허름한 양조장, 오래된 장비, 전통이라는 가치가 꿰뚫고 있는 이 공간에 크래프트 맥주를 능가하는 놀라운 혁신이 살고 있었다. 현대적인 느낌이 어색하지 않은 전통, 힙과 어울려도 꿇리지 않는 전통, 정과 반이 만나 진화한 전통, 맥주에서 전통의 가치가 혁신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깐띠용은 가르쳐주고 있었다.

깐띠용을 나서며 다시 천천히 양조장을 바라봤다. 그곳은 미니언즈를 데리고 세계정복을 꿈꾸는 구루의 기지였다. 양조사는 거미줄이 처져있는 허술한 모습으로 비밀을 노출시키지 않으며 미생물 친구의 도움을 받아 맥주 세계를 평정하고 있었다. 더 이상 도심 한가운데 있는 람빅 양조장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깐띠용은 전통, 도시, 맥주, 혁신을 합칠 수 있는 해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보야, 답은 람빅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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