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5 11:49최종 업데이트 23.08.2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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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시절의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 위키미디어 공용

 
독립운동사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학도병 장준하와 그 동지들의 대장정이다. 박정희가 육군 소위가 된 지 엿새 뒤인 1944년 7월 7일, 이들은 중국 장쑤성의 일본군 부대를 탈영해 한국광복군 진영을 찾아가는 여정에 돌입했다. 상하이를 낀 장쑤성에서부터 양쯔강 상류를 향해 서쪽 충칭으로 이동하는 루트였다.

7월 7일을 디데이로 잡은 것은 그날이 일본군의 중일전쟁 도발 7주년이기 때문이다. 일왕(천황)이 하사했다는 술을 마시고 일본군이 방심하는 틈을 노렸던 것이다. 26세였던 장준하는 회고록 <돌베개>에 "모두들 술기운에 벅차서 흥분되어 있었다"라고 썼다. 3미터 철조망을 넘은 이들은 중국군 부대에 일시 합류했다가 광복군을 찾아 6000리를 걸어 이동했다. 충칭에서 김구를 만난 것은 1945년 1월 말이다.


이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이 이달 말에 계획돼 있다. 1944년의 그 일이 서쪽을 향한 여정이었다면, 이달 말에 계획된 일은 동쪽을 향한 여정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가 독립유공자 후손인 광복회원 100명과 함께 오는 30일 독도에서 '민족의 자주와 독도의 주권 수호를 위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결의대회'를 연다.

장준하·김영록·홍석훈·윤경빈 네 청년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여정을 떠났다. 이번에 광복회원 100명은 또다시 빼앗길지 모르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 바닷길을 떠난다. 시대는 다르고 상황은 다소 다르지만, 일본으로부터 우리 것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다를 바 없다.

23일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지금 이 시점에 독도를 지키러 가는 이유를 밝혔다. "한 나라의 경영이 마치 무책임한 이방인에게 맡겨진 것 같아 마음을 졸이고 있다"로 시작하는 보도자료는 "민족적 양심" 때문에 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라의 정체성, 역사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야 할 책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일제에 강탈당했던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지사님들의 후손인 광복회원 100인은 민족적 양심을 지켜 왜곡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는 의무감을 느끼고, 망국을 유도하고 있는 일제의 지원을 받으며 암약하는 매국 사이비 식자라는 자들의 발호를 저지하고, 식민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 일제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억지 주장을 종식시키기 위해 독도에 입도하여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확인시키고 의도된 독도 영유권 논란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바이다."

한일관계 좋았던 시점에 발생한 독도 침탈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 연합뉴스


지난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층 강화된 한미일 군사협력은 외형상으로는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듯하지만 일본의 발언권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세계전략 중 하나가 된 인도태평양전략을 2016년 8월 아프리카개발회의에서 발표하고 이듬해 11월 미일정상회담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안한 것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다. 미국이 이를 수용한 것은 자국의 국익과 부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파트너인 일본이 제안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일관계의 시소가 일본 쪽으로 점차 기우는 가운데 한미일 연합군사훈련이 자주 거행되고, 하필이면 그것이 독도 주변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작년 9월 30일과 10월 6일, 지난 2월 22일(시마네현 다케시마의 날)과 7월 26일에 있었다. 대잠수함 훈련 1회, 미사일 방어훈련 3회였다.

당연히 북한을 겨냥한 훈련이라고 표방은 하지만, 일본이 북한 이외의 국가를 겨냥해 이런 훈련을 벌인 사례도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999년 7월 27일 자 <동아일보> '일(日) 작년 어떤 섬 탈환 작전'에 따르면, 1998년 11월에 일본은 일본열도 서쪽의 '어떤 섬'을 탈환하는 군사작전을 위해 잠수함·군함·전투기를 동원했다.

'어떤 섬'에서 실제로 군사연습을 할 수 없어, 일본열도와 필리핀 중간인 이오섬에서 그 섬을 생각하며 이 훈련을 진행했다. 이런 일본이 독도 주변에서 한국군과 연합훈련을 벌일 때 오로지 북한만 염두에 두겠는지를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한국 침략은 '외교권을 먼저 빼앗은 뒤 군대를 해산하고 국권을 침탈했다'는 도식으로 흔히 설명된다. 틀린 도식은 아니지만, 완전한 도식도 아니다. '외교권을 먼저 빼앗은 뒤'는 '외교권을 빼앗은 뒤'로 바뀌고, 그 앞에 '독도를 먼저 빼앗은 뒤'가 추가돼야 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전에 있었던 일본의 독도 편입(1905년 2월 22일)은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한일 양국 간에 협조 분위기가 유지되는 속에서 일어났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자'는 명분하에 일본이 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와 제1차 한일협약(8월 22일)을 성사시킨 뒤의 일이다.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자국 군대가 유사시에 한반도에 주둔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제1차 한일협약을 통해 일본인 고문이 한국 정부의 경찰·군사·외교·재정·교육 사무에 개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외형상 협조체제로 보이는 이 같은 상황을 만든 뒤에 독도를 강탈했다. 일본이나 친일파들이 볼 때 한일관계가 좋았던 시점에 독도 침탈이 발생했던 것이다.

상대국의 본토보다 섬을 먼저 건드리는 방식은 한일관계뿐 아니라 중일관계(청일관계)에서도 나타났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제국주의적 국가노선을 수립한 일본은 1874년에 청나라 본토를 먼저 치지 않고 청나라령 대만(타이완)을 먼저 공격했다. 이 여세를 몰아 일본은 청나라와 일본의 공동 속국이었던 유구왕국(류큐왕국)을 1879년에 강점하고 청일전쟁 승리 직후인 1895년에 대만을 할양받았다.

조선·청나라 양국과 일본의 중간에 있는 또 다른 섬인 대마도(쓰시마)는 1869년에 스스로 일본에 귀부했다. 조선과 일본의 공동 속국이었던 대마도는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본에 새바람이 부는 반면 조선이 상대적으로 정체돼 있는 모습을 보고 그런 선택을 내렸다.

이렇게 대마도·오키나와·대만에 이어 독도가 넘어간 뒤에 일본은 한국을 강점하고 중국대륙 침략을 본격화했다. 주저할 '섬'이라는 한자도 있지만, 일본은 섬 앞에서만큼은 주저하지 않았다. 저돌적이고 야심 찬 이런 모습이 동아시아 대륙국가들의 수난으로 이어졌다.

독도에 점점 다가오는 일본
 

1947년 7월 23일 자 <동아일보> 기사 "판도에 야욕의 촉수 못버리는 일인의 침략성, 울릉도근해 '독도' 문제 재연"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이웃나라 섬을 압박하는 일본의 접근 방식은 과거지사가 아니다. 1945년 패망으로 한국 식민지를 상실한 직후에도 일본은 독도에 대한 침탈 의욕을 드러냈다. 1947년 7월 23일 자 <동아일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에서 쫓겨난 직후부터 독도를 도로 갖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섬을 공략한 뒤 본토를 점령하는 침략 패턴을 고려하면, 그 같은 패망 직후의 모습은 일본이 독도뿐 아니라 한국 전체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

그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윤석열 정권 출범을 계기로 독도에 점점 다가오고 있다. 북한을 막기 위해서라며 군대를 이 주변에 자주 보내고 있다.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로 인해 앞으로 더욱 쉬워진다.

독립운동가 후손 100인이 독도로 달려갈 계획을 세운 것은 일본이 너무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충칭의 광복군사령부로 달려가 나라를 지켜야겠다고 결심한 장준하들처럼, 광복회원 100인이 독도로 달려가 나라를 지켜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그런 상황의 산물이다.

장준하와 동지들이 탈영하자 일본군은 수색에 나섰다. 이 때문에 이들은 수수밭에 몸을 숨기고 찌는 듯한 남중국의 무더위를 견뎌야 했다. 장준하는 "타는 것은 비단 목뿐이 아니었다"라며 "온 몸뚱이가 모두 부풀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이들은 일본 군복을 벗었다. "우리들은 모두 군복을 벗어버리고 홀랑 알몸이" 됐다고 기억했다.

장준하기념사업회의 '독도 행사 계획서'에 따르면, 후손 100인은 군복을 벗지 않고 입는다. 강릉의 숙소를 출발하기 전에 "전원 광복군 군복 착용"을 하는 것이 계획표에 들어 있다. 장준하의 아들인 장호권 전 광복회장도 23일 통화에서 "독립운동가 후손 100명이 광복군 군복을 입고 독도에 들어갑니다"라고 말했다.

장준하와 동지들이 일본 군복을 벗은 것도 비상상황 하의 일이지만, 광복회원 100인이 광복군 군복을 입을 생각을 하는 것도 비상상황 하의 일이다. "무책임한 이방인에게 맡겨진 것" 같은 지금 상황으로 인해 독도 안보가 위태해지고 있어 그런 비장한 결심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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