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8 18:51최종 업데이트 23.06.1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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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맨 왼쪽),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맨 오른쪽)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 정부기록사진집

    
전두환보다 한 살 적은 노태우(1932년생)는 친구 전두환의 정변을 두 번이나 도왔다. 전방의 9사단장이었던 그는 1979년 12·12 쿠데타를 회고하는 대목에서 "9사단의 예비연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심했다"(<노태우 회고록> 상권)고 말했다.

12·12로 군부는 장악했지만 행정부는 아직 충분히 장악하지 못한 전두환은 이듬해 5월 17일 두 번째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날도 노태우는 친구를 도울 결심을 했다. "나는 병력을 동원하기에 앞서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라고 한 뒤 "시위의 근원지를 진압해 무력화시키기로 했다"고 위 회고록에서 밝혔다.


전두환 친구 노태우와 달리 박정희 친구 이한림은 정반대였다. 박정희보다 4년 뒤인 1921년 2월 10일 출생했지만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함께 다닌 이한림은 박정희가 야심을 드러낼 때마다 뜯어말리거나 참여를 거부하곤 했다.

이한림은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간 1940년 4월부터 일본제국주의의 밥을 먹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군대 현장에 투입된 1944년 4월 이후에는 일제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더 높아졌다. 이처럼 동기 박정희와 보조를 맞추며 5년간 친일 재산을 축적한 그는 24세 나이로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박정희는 8·15로부터 9개월이 지난 1946년 5월 6일 텐진(천진)에서 귀국선을 타고 이틀 뒤 부산에 도착했다. 그가 한국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해 9월 24일이다.

해방의 충격으로 박정희가 멈칫하는 사이에 이한림은 동기 박정희보다 훨씬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는 친일에서 친미로 신속히 전환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한림 편은 함경남도 안변 출신인 그가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에 제1기생으로 들어가 1946년 2월 국방경비대 참위(소위)로 임관했다"라고 기술한다. 박정희가 귀국하기 전에 미군정하의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이미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한국 육사 생도였을 때 이한림은 육사 행정부장이었다. 동기이기는 하지만 상관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한림을 상대로 박정희는 포섭 작전에 들어갔다. 이한림에게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가입을 권유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한림은 신고도 하지 않고, 가담도 하지 않았다.

이 시절 박정희는 겉으로는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예비 장교이고 속으로는 남조선노동당 당원이었지만 이런 것들로는 그의 진짜 속을 확인할 수 없었다. 1948년부터 유부남 박정희와 동거했고 서울 용산 관사에서 함께 생활했던 이현란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남조선노동당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조갑제 조선일보사 출판국 부국장이 1997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제139화에 따르면, 훗날 이현란은 "미스터 박은 방에 누워 책으로 얼굴을 덮고 연설을 하곤 했습니다"라며 "독일의 히틀러가 독재자이긴 하지만 영웅은 영웅이라고 하더군요. 나긴 난 사람이라고"라고 한 뒤 "미스터 박은 그 사람은 국방장관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어요"라고 회고했다.

남로당 비밀당원 시절의 박정희가 방바닥에 누운 채로 연설을 하면서 '히틀러가 영웅이긴 하지만 국방장관 그릇밖에 안 된다'고 폄하했다는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박정희는 히틀러 이상의 인물이 되고 싶었던 듯하다. 이 시절 박정희는 누구나 다 평등한 세상보다는 자신이 중심이 되는 불평등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일본군국주의 시절 일본 군인이 되기 위한 길 걸어
 

육군 제6군단장 시절의 이한림 ⓒ 위키미디어 공용


그런 박정희가 이한림을 포섭하려 했지만, 이한림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박정희가 내린 선택이 있다. 이한림을 서울 남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재차 설득하는 것이었다.

73세 때인 1994년에 쓴 회고록인 <세기의 격랑>에서 이한림은 1946년 9월 이후에 박정희가 자신을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간 일을 회고했다. 이에 따르면, 박정희는 중앙청(경복궁)과 그 뒤편의 경무대(청와대)를 가리키며 "한림이, 이곳에 포를 설치하고 저 경무대 쪽을 포격하면 나폴레옹이 파리의 소요(때)에 진압사령관으로 야전포를 발사해서 파리를 제압했던 것과 같이 경무대 장악은 문제없겠지?"라고 말한 사실을 회고했다.

남로당 비밀 당원으로 접근하더니 남로당과 어울리지 않게 나폴레옹을 운운하며 쿠데타 이야기를 꺼내는 육사생도 박정희 앞에서 육사 행정부장 이한림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정희야, 그런 농담하지 마. 너는 농담이 지나칠 때가 있어"라고 박정희를 진정시켰다. 이한림은 "그의 평소 언동으로 보아 무언가 뒤집어엎겠다는 뜻이 담긴 위험한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전두환 친구 노태우와 달리 박정희의 쿠데타를 반대하는 이한림의 모습은 1961년에도 재현됐다. 육사 행정부장을 지낸 적 있는 이한림은 1957년 7월부터 1960년 10월까지 육사 교장으로 재직했다. 이때도 박정희는 이한림을 겨냥해 포섭 작전을 전개했다. 위 회고록에 따르면, 오랜만에 이한림을 방문한 박정희는 1차 술자리가 파한 뒤 '남산에 잘 아는 술집이 있다'며 그리로 가자고 제안했다. 또다시 남산을 운운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한림은 남산으로 가자는 청을 한사코 사양했다. "그 후도 박정희는 집요하게 나를 만나려고 시도했었지만 나는 철저히 그를 피했다"라고 한 뒤 "만나 봐야 쿠데타 하자는 것이 중심 문제일 것이 뻔하니" 그렇게 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이한림은 5·16 쿠데타를 반대하는 편에 섰고, 반혁명 혐의로 구금됐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1946년 9월 이후와 1961년 5월 이전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이한림은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군인들과 함께 훨씬 더한 죄악에 가담했다. 일본 군대가 국가를 장악하고 세계침략을 감행하던 일본군국주의 시절에 그는 일본 군인이 되기 위한 길을 걸었다.

그 시절 일본군은 일반적 의미의 군대가 아니었다. 역사상 최악의 인류 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를 실천하는 기관이었다. 자연과 인류를 일본 자본가들의 이익에 맞게 재편하고 착취하는 기구였다. 쿠데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범죄를 저지르는 곳이었던 것이다.

이한림은 만주 군관학교에서 박정희와 가까이 지낸 일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가끔 둘이 만나면 조국에의 독립과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같이 결심의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다음 학교인 일본 육사에서도 박정희와 함께 "조국의 운명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라고 회상했다.

5·16 쿠데타는 거부했지만, 그 결과물은 향유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이한림의 묘 ⓒ 김종성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식민지 한국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살았다고 했지만, 이것과 쉽게 조화되지 않은 또 다른 진술을 회고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본군이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으키며 세계 침략에 박차를 가하던 시점에 그는 "자네는 왜 군대를 지망하는가?"라는 학교 선생의 질문에 대해 "저는 저의 개성을 살려 보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은 다른 학생들처럼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 군인이 되겠다는 상투적인 말을 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자신은 일본군에 충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가 가고자 하는 군대는 제국주의 방식으로 인류 착취에 앞장서는 군대였다. 그런 일본군에 들어가 자아실현을 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지원 동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무엇인가 강렬한 인생을 원하였고 폭죽처럼 활짝 타오르는 불꽃 같은 인생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무렵 나폴레옹에 심취해 있었다. 그로부터 군인의 한계를 넘어선 일종의 예술과 비유되는 어떤 경지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처럼 불꽃 같은 강렬한 삶을 살고 싶어 일본군에 지원했다고 밝혔다. 군인의 한계를 넘어선 예술 같은 삶을 경험하고 싶어 그렇게 했다고 털어놓았다. 군대의 본래 영역을 벗어나 군국주의 군대, 제국주의 군대로 변해 있는 일본군에 들어가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는 것은 그가 군의 정치참여에 대해 내심 크게 반대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박정희의 쿠데타를 만류하는 그의 모습이 철저한 신념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군의 정치참여를 반대하는 신념이 견고하지 않았다는 점은 5·16 쿠데타를 거부했다가 수감된 이후의 행보에서도 나타난다. 불기소처분을 받은 뒤인 1961년 8월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이후의 행적을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정리한다.

"1963년 한국수산개발공사 사장, 1968년 진해화학주식회사 사장을 거쳐 1969년 2월부터 1971년 6월까지 건설부장관을 지냈다. 1972년 국제관광공사 총재, 1974년 주터키대사, 1977년 주오스트레일리아 대사를 역임한 후 1980년 8월 퇴임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장관직과 대사직을 지내고 공기업 사장직을 역임했다. 5·16 쿠데타는 거부했지만, 그로 인한 결과물은 거부하지 않고 향유했던 것이다. 군의 정치참여에 대한 신조가 불확실했다는 점이 이런 이력에서도 드러난다.

군대가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취약했기 때문에 만주군관학교 및 일본 육사에도 진학하고 일본 괴뢰국 만주국군의 장교로도 복무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012년 4월 29일 그는 91세로 세상을 떠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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