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3 05:05최종 업데이트 23.04.0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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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청 조형물 앞 도로변에 걸린 4·3 왜곡 현수막 ⓒ 임병도


광주 5·18을 폄훼하는 세력이 북한 개입설을 유포하듯, 제주 4·3에 대해서도 흑색선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현지의 남조선노동당원들이 이 운동에 참여한 일을 운운하며 거짓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북조선노동당이 아니라 남조선노동당이었다. 남로당은 지도자 박헌영이 1946년 9월 29일 미군정을 피해 월북한 상태에서 그해 11월 23일 결성됐다. 그래서 1947년 이후의 제주 상황을 조종할 처지가 아니었다. 김일성은 최대 경쟁자인 박헌영과 대립했다. 그는 제주 남로당을 원격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남로당에 대한 김일성의 인식은 한국전쟁 시기에 박헌영 등을 대거 숙청한 사실로도 드러났다.


미국의 반공 정책을 한국보다 충실히 지키는 일본에도 공산당이 있다. 일본공산당보다 훨씬 유력했던 일본사회당도 1990년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한국 국민의힘이나 정의당에도 사회주의 운동권 출신들이 있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제국주의에 맞서려면 사회주의로 무장하는 게 최선이라서 일제강점기 때 사회주의에 가담한 사람들이 4·3에 참여했을 뿐이다.

그런데 4·3 당시에는 훨씬 더 허황된 소련 개입설도 있었고 이를 부추기는 언론 보도들도 있었다. 제주 해안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근해에 소련 화물선이 출현해 한국군이 사격을 가했다는 1949년 1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 '제주 수면에 소련선 출현'에도 나타나듯이 이 시기에는 제주와 소련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들이 자주 있었다.

제주도민들이 북한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다는 허구적 이미지를 조장한 원조는 미국과 미군정이었다. 1948년 5월 5일 자 <워싱턴뉴스>는 스탈린이 남한 게릴라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서 제주도를 거론했다. 그런 거짓 선전을 통해 미국은 4·3 탄압을 합리화하고 세계 냉전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런데 미국은 4·3 이전부터 제주도민들의 원성을 사고 이들과 대립했다. 다름 아닌 양과자 때문이었다. 양과자가 제주 경제를 잠식한다는 이유로 제주 미군정 청사 앞에서 시위까지 일어났다. 제주 출신 4·3 연구자인 허호준 <한겨레> 기자가 펴낸 <4·3, 19470301-19540921>에서 양과자 반대운동이 4·3 항쟁으로 이어지는 당시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학자 최현배가 1926년 12월 14일 자 <동아일보> 기사 '조선민족 갱생의 도'에서 지적했듯이, 일본산 눈깔사탕·캐러맬·비스킷·건빵 등은 식민지 한국 경제를 잠식하는 매개물이 됐다. 최현배는 일제 눈깔사탕과 왜떡을 취급하는 업자들이 단시간에 소매상이나 거상으로 급성장하거나 고리대금업자로 성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산 과자 업자들이 급속히 성장하는 만큼, 한국산 업자들의 입지는 계속 위축됐던 것이다.

동일한 방식을 해방 직후의 미군정도 답습했다. 한국을 미국 상품의 소비시장으로 만들 목적으로 군정 권력을 남용해 캔디 같은 미제 상품을 대거 유입시켰다. 인플레이션과 식량 부족이 심각했던 1947년 1월에도 쌀 1만 7422석에 해당하는 양과자를 수입했을 정도다. 1947년 7월 4일 자 <자유신문>은 거기에 들어간 비용이 "정부수립 후에 결재된다"고 보도했다.

4·3 학살을 부추긴 요인
 

4·3, 19470301-19540921 - 기나긴 침묵 밖으로 ⓒ 혜화1117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여타 지역뿐 아니라 제주에서도 일어났다. 제주 4·3이 진행된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의 기간을 책 제목에 표시한 허호준의 <4·3, 19470301-19540921>은 해방 직후 제주도민들이 "초코레토를 주지 말고 양식을 배급하라"고 호소했던 일을 서술한다.

이 책은 "1947년 2월의 일이다"라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양과자 반대 운동은 식량 문제와 결부되면서 도민들의 호응 속에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라고 설명한다. 미군정이 경제와 유통구조를 장악한 상태에서 식량 대신 미국 과자의 유통을 부추겼으므로 그런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7년 2월 10일, 1000여 제주도민들이 미군정 청사 앞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는 양과자로부터 막자"는 구호를 외쳤다. 위 책에 인용된 그달 16일 자 '주한미군사령부 주간정보요약'에 따르면 미군 중대가 출동해 이 시위를 진압했다. 이런 긴장 관계 속에서 다음 달 3·1절 기념식 때 미군정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이것이 4·3사건 또는 4·3항쟁을 촉발시켰다.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한 날은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이 이임한 1945년 9월 28일이다. 군정 업무를 담당할 미 제59군정중대가 상륙한 것은 11월 9일이다. 그런데 미국이 이 섬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이었다.

<4·3, 19470301-19540921>은 "미국 언론들은 1880년대 말부터 1900년 초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요충지' 등으로 언급"했다며, 해방 직후의 미 제24군단 관계자가 "지도를 얼핏 보더라도 섬이 지극히 전략적인 위치에 있음을 알게 된다"라고 평가한 사실을 소개한다.

이 책은 1946년 10월 당시의 국내 언론들에 인용된 뉴욕발 AP통신 보도에서 제주도가 지브롤터해협처럼 될 가능성이 거론된 사실을 언급한다. "제주도가 금일과 같은 장거리 폭격 시기에 있어서의 그 군사적 중요성을 띠고 있음은 이 기지로부터 동양 각 요지에 이르는 거리를 일별하면 능히 해독할 수 있다"라고 보도된 사실을 소개한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고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좁은 통로가 지브롤터해협이다. 한국 서해와 동중국해를 이어주는 곳이 제주도이고, 중국·러시아로 가는 길목인 한국 동해의 길목을 지키는 곳이 제주도다. 이곳에 공군기지를 설치해야 동북아 각국을 견제할 수 있다는 시각이 4·3 이전부터 미국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것이다.

미국이 그리스 내전과 더불어 제주 4·3에 결사적으로 개입한 데는 그 같은 군사전략적 고려가 깔려 있었다. 제주도를 수중에 넣은 상태에서 북한·중국·러시아와의 냉전체제를 강화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4·3 학살을 한층 부추긴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인 미국을 빼놓고는
 

<4·3, 19470301-19540921>에 소개된 제주4·3평화기념관의 전시물 '백비' ⓒ 혜화1117


4·3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제주 인구 25만 명 중에서 3만 정도가 희생된 사실만으로도 잘 드러난다. 정부 측은 1만 4000명 정도가 희생됐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는 그 두 배를 넘는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참상이 벌어진 것은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 때문이지만,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미군정의 승인과 감독이다. 미군정이 38도선 이남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군경과 극우 단체가 미군정의 허가 없이 군사력을 행사하기는 용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정의 책임은 상징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국은 그리스 내전과 관련해서는 전투 현장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배후 조종의 방식을 선택했지만, 제주 4·3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4·3 현장에 미군을 직접 출동시키기까지 했다. 미국이 볼 때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가 그리스보다 큰 데다가 양과자 문제 등으로 현지 주민들과 대립을 빚던 차였기 때문에 한층 강경하게 나왔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4·3, 19470301-19540921>은 1948년 5월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미군은 물론 경비대와 경찰을 모두 통솔하는 최고 지휘관으로 6사단 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이 파견됐다"고 한 뒤 "브라운 대령의 파견은 4·3 당시 미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증거"라고 평가한다.

이 책은 "그는 제주도 중산간 곳곳을 누비며 경비대의 작전을 독려했으며", "브라운 대령의 지휘 아래 경비대 11연대는 중산간 지역에서 수천여 명의 사람들을 검거했다",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검거된 주민 수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서술한다. 브라운 대령이 기자회견 때 큰소리로 했던 말도 소개한다.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2주면 평정될 것이다"라는 외침이다.

제주도민들은 처음에는 1947년 3·1절 때의 미군 경찰 발포에 저항하고자 나섰지만, 나중에는 분단 정부 수립은 식민 지배의 연장이라는 신념으로 1948년 5·10 단독선거를 반대할 목적으로 항쟁에 가담했다. 브라운 대령은 이런 제주 민심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외쳤으니, 그의 지휘를 받는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좀 더 서슴없이 학살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4·3, 19470301-19540921>은 서문에서 "미국을 빼놓고는 4·3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은 남한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4·3 학살을 자행했지만, 미국은 동아시아 냉전체제를 유지할 목적으로 4·3학살을 감독하고 지휘했다. 지금 진행 중인 4·3 청산은 문제의 본질인 미국을 겨냥해야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이 섬에 양과자와 총탄을 뿌린 미국을 빼놓고는 4·3을 말할 수도 없지만, 말해서도 안 된다.


4·3, 19470301-19540921 - 기나긴 침묵 밖으로

허호준 (지은이), 혜화1117(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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