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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환자들 진료하면서는 절대 느끼지 못했던 것

KBS 인간극장 '방금 은퇴했습니다' 촬영 후기 2편

등록 2022.12.07 14:31수정 2022.12.0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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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이 많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떠나 있던 엄마랑 비혼 동생, 셋이 함께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이전 기사 : 40대에 은퇴했더니 방송국에서... <그알>은 아닙니다]


어릴 적에 보았던 영화 <슈퍼맨>. 슈퍼맨은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안고 날아올라 안전한 지역에 사뿐히 내려놓고, 지구를 지키러 떠난다. 슈퍼맨에게는 하늘을 나는 망토가 있고, 집채를 들어올리는 괴력이 존재한다. 불행히도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위기에 빠진 엄마와 동생을 카메라가 없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줄 초능력. 그래서 도망치듯 길을 떠났다.

혼자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데, 엄마랑 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자제하기로 했었다. 시간의 방향을 온전히 엄마에게 기울이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도 미사일의 탄생 배경에는 그러한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을지 모른다. 잠시만, 안녕. 내가 레이더망을 교란하는 동안만이라도 평온히 계시옵소서.

속초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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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갯배 편도 요금 5백원으로 건너편까지 이용객들과 짐을 실어날라주는 갯배. ⓒ 이정혁

 
그렇게 떠난 속초행이다. 굳이 탓을 돌리고, 핑계를 찾자면, <인간극장>이지만, 시기적으로는 적절했다.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 생각을 정리할 겨를이 필요한 순간에, 모든 것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울고 싶은 아이의 뺨을 쳐준 격이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펑펑 울어보자. 강원도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나는 어느 순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물론, 카메라를 대동하였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오롯이 나를 바라보는 카메라가 더 이상 타인의 시선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여행길에 오르는 순간부터, 카메라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된다. 자아의 분열이 아닌, 자아의 관찰자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라는 존재는 어디로 흘러갈지, 나 또한 궁금해졌다. 카메라와 함께 나를 들여다보는 신비한 경험. 나의 밖에서 객관성을 갖고, 나를 관찰하는 이색적인 체험. 나는 그 길 위에서 많은 스승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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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히피로드 우연히 만나게 된 여행작가 노동효님께 선물 받은 책, 남미히피로드. ⓒ 이정혁

 
남미를 제 집처럼 누비는 여행작가를 만나서, 진정한 자유의 존재에 눈을 떴다. 자신의 최종 목적지는 화성이라는, 자유로운 영혼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돋보기를 비추어 종이를 태우려면, 정확한 위치를 찾은 후에는,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는 스승의 말은, 탈골되었던 뼈가 다시 맞추어지는 심정이었다.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줍게 사랑을 나누었던, 꽃집 총각과 미장원 처녀의 사랑 이야기는 소보루빵 같던 내 심장에 생크림 토핑을 얹어주었다. 결혼해서 낳은 두 아이가 이제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눌 나이가 되었건만, 여전히 애틋한 꽃집의 중년 부부. 부부의 사랑 이야기가 궁금해 꽃을 사고도 한참을 떠나지 못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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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카페 아나로그 내부전경 양쪽 끝에 위치한 검은 상자처럼 보이는 것이 진공관앰프와 연결된 스피커다. ⓒ 이정혁

 
일찌감치 퇴직하고, 자신이 좋아했던 진공관 앰프를 직접 만드시는 카페 사장님의 이야기는 암중모색 중인 내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지구별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 저 산이 내게 우지 마라, 잊으라 한다고, 떠밀려 내려오면 아니 된다는 사실을. 산의 본심은 그게 아님을, 깨달을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그리고 깨우쳤다. 나의 관심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얼굴 찡그리고 치과를 찾는 환자들의 입 안을 들여다보며 느끼지 못했던 희열과 설렘이, 주름진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카메라를 통해 보였다. 모른 척, 외면하고 살았던 가면 속의 나를 뚫고 나오려는 진짜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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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의 동아 서점에 남기고 온 메모 속초에서 가장 오래된 동아서점에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글 몇줄을 남기고 왔다. ⓒ 이정혁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의 한 명은 스승이라고 했다. 내가 만났던 사람과 나와 또 다른 나, 그렇게 셋이 걸어가는 길 위에 스승이 존재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도 두레박을 잘 만나면 우물 밖의 세상을 볼 수 있음을. 관념과 틀에 박혀 두레박을 두려워하고만 살았던 개구리 같은 인생이여. 카메라와 떠난 여행길에서 시원한 우물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정신을 차렸다.

<인간극장> 섭외가 들어온다면

촬영은 고단했지만 <인간극장>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카메라 렌즈 저쪽의 내가, 나에게 건네는 질문들을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커다란 모험이자, 성찰의 과정이었다.

가운을 벗고, 세상 밖으로 나오면, 당연히 추워질 줄 알았다. 백면서생이 책을 내던지면, 길 위에서 동사하는 일만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따뜻했고, 사람들은 화기애애했다.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저마다의 꽃을 피우며,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름 없는 들꽃이 될지언정 다시 한번, 피워 내보자. 아, 박경리 선생님께서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은 없다고 하셨지. 현자의 지혜는 나무보다 오래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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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고성 송지호해변을 걸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가졌다. ⓒ 이정혁

 
<인간극장> 촬영을 마치고, 세 동거인은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일부러 다른 생활을 산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 오늘은 무얼 하며 즐겁게 지낼까를 고민하는 삶.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각자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여생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삶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누군가, <인간극장> 섭외가 들어왔다고, 내게 조언을 구한다면, 이렇게 답해주겠다.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면, 언제든 찍으시라고. 찍는 동안은 고행의 길일지 모르겠지만, 돌아보니, 먼 길을 와 있었고, 내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었음을 알게 될 거라고. 처음 며칠간 얼어붙다 보면, 강추위도 적응된다고.

수많은 지인이 카메라 앞에 섰다가, 이슬처럼 편집 당한 부분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편집에 관해서 출연자는 입김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임을 비겁하게 변명해본다. 촬영에 협조해주고, 내 일처럼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많은 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시즌2는 없을 테니, 이제 긴장 풀고 편히 사세요.

잠시 주춤했던 엄마랑 놀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어느새, 두 달이 훌쩍 지나갔다. 인생의 하프라인을 지나면, 내리막길도 아닌데, 가속도가 엄청나게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기사는 발행 후 개인블로그인 https://blog.naver.com/irondownbros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여행작가노동효 #나를찾는여행 #인간극장 #인간극장촬영후기 #우물안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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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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