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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김치' 위해 배추밭 찾았지만... 식당의 꿈을 접다

김장하다 엄마에게 화낸 중년 아들... 엄마에게 배운 김장의 의미

등록 2022.11.26 20:05수정 2022.11.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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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이 많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떠나 있던 엄마랑 비혼 동생, 셋이 함께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은퇴를 결심하는 순간, 누구나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있다.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는 법. 최저 생활비 정도는 벌어야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렴풋하게 떠올리던 로망 하나가 있다. 자그마한 식당을 차리는 일이다. 엄마의 어깨 너머로 어릴 적부터 습득한 요리 기술은, 평균치를 가뿐히 넘는다고, 자타공인한다.


번거롭지 않은 바닷가에 테이블 서너 개를 두고, 단일메뉴만 판매하는 그런 식당. 점심시간만 문을 열어 30그릇 정도만 판매한 뒤, 오후부터는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재료가 소진되어 마감합니다!'라는 푯말을 훈장처럼 당당하게 걸어두고, 바닷가를 거닐며 갈매기와 대화 나누는 그런 감미로운 여생을 꿈꾸었다.

최상의 배추를 예약했다

엄마랑 놀기 프로젝트의 한 축에는 이러한 생각도 반영되었다. 엄마의 요리 비법을 전수받아, 엄마가 생각날 때 스스로 만들어 먹는 사람이 되자. 엄마의 손맛을 온전히 계승하면 돈을 받고 팔아도 부끄럼 없다. 김치는 식당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엄마 요리의 핵심이자 백미인 김치 담그는 법을 제대로, 반드시 배워야 한다. 식당이라면 엄마가 쌍심지를 켜고 말리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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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무수동에 위치한 배추밭 김장 한달 전 쯤, 직접 배추밭을 찾아가 배추가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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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밭에서 얻어온 덜 자란 배추 배추밭의 배추를 확인하러 갔다가 얻어온 배추로 것절이를 담갔다. 미리 배추 맛을 보기 위해. ⓒ 이정혁


완벽한 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두 달 전부터 좋은 배추밭을 수소문했다. 절인 배추 40포기를 예약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한 달 전쯤 배추밭을 직접 방문하여 배추 한 포기를 얻어다 엄마와 겉절이를 담갔다. 속이 제법 차올라 아삭한 식감에 단맛이 깊은 최상의 배추였다.

그렇다고 김치 장인이 되고픈 야망을 지닌 건 아니다. 전남 신안으로 천일염을 사러 가거나, 젓갈이 유명한 강경까지 새우젓을 구하러 갈 여유는 없다. 제대로 된 배추면 나머지 부가적 재료쯤 무마할 수 있으리라. 잘 키운 배추 하나, 열 양념 안 부럽다.

김장은 1년 농사와도 같은 거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법이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김장과 관련된 모든 과정을 섭렵해야 했다. 재래시장에 나가 김장 재료를 사 모으는 엄마의 뒤꽁무니를 열심히 따라다녔다. 고춧가루 고르는 법, 김장에 쓰이는 각종 채소의 신선도를 확인하는 법까지.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하며, 엄마의 아바타가 되고자 노력했다.


김치 담그는 과정에 대해 세세하게 적을 생각은 없다.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충분히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지역마다 다르고, 집안마다 개성이 존재하므로, 사실 의미도 없다. 김장이 초보자에게 끼치는 신체적, 정신적 충격과 후유증이 이 글의 주된 내용이다. 김장 강의는 전문가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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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예약한 절인 배추 미리 배추를 예약하고, 절이는 당일에 가지러 가면 숨이 적당히 죽은 싱싱한 배추를 얻을 수 있다. ⓒ 이정혁


마침내, 김장 전야가 밝았다. 절인 배추를 가져오기 전날부터 김장은 시작된다. 사실, 아파트에서 배추를 절이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사전에 예약하고 김장 당일에 가서 절인 배추를 가져오면, 일거리도 줄고, 비교적 신선한 배추를 얻을 수 있다. 김치 명인도, 김치로 사업할 생각도 없으니 적당 선까지는 타협하자.

김장 전날, 육수를 만들고, 풀을 쑤었다. 생강과 마늘을 까느라, 손가락 끝이 얼얼하다 못해 마비될 지경이다. 그저 옆에서 거들었을 뿐인데, 생강 껍질 긁다가 튄 조각이 얼굴을 화끈하게 만들 정도다. 식당에 대한 나의 환상이 인어공주의 하반신처럼 조금씩 소멸하기 시작한다. 등산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매표소 입구에서 관절이 꺾이는 기분. 발길을 돌려 동동주나 마시기엔, 아직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나는 편하기 그지 없는 일을 하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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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을 준비하다, 절인배추 새벽에 절여 놓은 배추를 아침 일찍 가지러 간다. 20kg 한 상자에 배추가 열포기 쯤 들어 간다. 한 상자에 4만원. ⓒ 이정혁


김장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절인 배추를 가지러 간다. 20kg짜리 한 상자에 절인 배추가 열 포기 정도 들어간다(한 상자에 4만 원). 겨우 쌀 한 포대 무게를 들어 올리는 데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래서 뭐로 밥 먹고 산담. 눈을 질끈 감고, 네 상자를 차에 실었다. 주차장에서 집까지 손수레로 옮기고 나니, 이미 체력은 바닥이다. 비극은 커튼 아래에서 이제 겨우 발뒤꿈치를 보여주었을 뿐인데.

절인 배추의 물을 빼는 동안, 김칫소를 만들어야 한다. 믹서기로 온갖 재료를 갈고, 또 가는 과정. 고막에까지 피로도가 밀려온다. 갈린 재료 위에, 무와 갓을 썰어 넣고, 고춧가루 등을 붓고 뒤섞는 작업은 가히 중노동에 비견된다. 이리 섞고, 저리 섞어 놓으면, 엄마는 자꾸 새로운 무언가를 첨가한다. 기록도 기억도 이제는 딴 세상 이야기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엄마, 이제 그만 좀 집어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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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을 준비하다, 김치소 재료 구입 재래시장에 가서 김장에 필요한 각종 채소를 구입한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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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칫소 만들다가 지친 모습 전체 김장 과정중에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옆에서 자꾸 재료를 추가하는 엄마에게 화를 낼 정도로. ⓒ 이정혁



이번 김장은 모두 내 손을 거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내가 싫어진다. 초심자의 행운이란, 소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김칫소를 다 만들고 나서, 물기 빠진 배추를 절반으로 쪼개는 일까지 마치니 오후가 되었다. 간단히 해결하자고 끓인 국수 대신 자양강장제 쪽으로 손이 먼저 간다. 고갈된 체력과 정신력은 이미 회복 불가의 저점을 통과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김장이란, 엄마가 부른 날짜에 우르르 몰려가서 다 만들어 놓은 양념을 배추에 문지르기만 하면 되는 연중행사였다. 그것도 쉽지 않아서 김장한 날은 허리가 아프네, 등이 휘었네를 외치며 뒹굴뒹굴했더랬다. 정치인들이 선거철에 배식 봉사를 하듯, 숟가락만 얹고 나서, 생색을 냈던 거였다. 고생했다고 돈 봉투 쥐여 주고 돌아서면 끝나는 일이었다, 김장은.

양손 무겁게 김치통을 들고 도망치듯 각자의 집으로 떠나는 자식들 뒷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잃지 않던 엄마. 엄마는 우리가 떠난 뒤, 온몸을 파스로 휘감고 며칠씩 앓았다. 뼈 주사를 맞고, 진통제를 먹으며 김장 증후군을 버텨낸 것이다. 몸소 겪고 보니 이제야 보이지 않았던 시간들이 눈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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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김장김치 엄마의 김장김치는 여러가지 재료로만 탄생된 것이 아니다. 엄마의 피와 땀,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녹여낸 엄마, 그 자체다. ⓒ 이정혁

 
일 마친 아내와 아이들이 합류해서 한두 시간 만에 김장은 끝이 났다. 김칫소를 배추와 버무리는 동안에도 엄마는 돼지고기를 삶고, 생굴을 씻었다. 무릎 아래가 떨리고, 어깨와 허리가 결린다. 식당이라면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말리겠다는 엄마의 진심을 제대로 파악했다. 엄마가 말리기 전에 스스로 깨달았어야 했다. 엄마가 했던 일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편하기 그지없는 일을 하고 살아왔음을.

세상의 모든 엄마가 위대한 이유로는 수만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가 김장인 것은 틀림없다. 쉽게 생각했던 김치 한 포기에 담긴 엄마의 정성은 땀과 피, 그 이상의 존재임을 나이 오십에 발견하다니. 엄마의 삶을 느껴보지 못하고 식당 일에 대해 가볍게 떠들어대던 순간들이 커다란 쇳덩이가 되어 정수리에 떨어진다.
 
덧붙이는 글 기사는 발행 후 개인블로그인 https://blog.naver.com/irondownbros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김장하는날 #무수동배추밭 #엄마랑놀기프로젝트 #김칫소 #절임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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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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