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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1 뚫고 코레일 입사한 청년의 죽음

오봉역에서 화물 차량 연결 중 열차에 치여 사망... 코레일 올해만 4명 사망 사고

등록 2022.11.14 14:05수정 2022.11.14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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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오봉역 선로. 지난 5일 오봉역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 코레일은 원인 조사를 위해 오봉역 인근 대형 시멘트사들의 열차 운행을 중지했다. 오봉역에는 성신양회, 한일시멘트, 쌍용C&E, 아세아시멘트 등 7개 대형 시멘트사들의 출하기지가 있다. ⓒ 연합뉴스

 
2018년 청년 취업난은 극심했다. 각종 공기업, 공공기관으로 입사 지원이 몰리면서 경쟁률이 치솟았다. 스물아홉 부산 청년 A씨는 그 해 5월, 59 대 1 경쟁률을 뚫고 코레일에 입사했다. NCS(국가직무능력표준) 시험, 인적성 시험, 면접 등 어려운 관문들을 차례로 통과해 얻은 결과였다. A씨와 가족들은 기뻐했다.

4년이 지난 지금, A씨는 경기도의 한 병원에 시신으로 안치돼 있다. 어둠이 깔린 지난 5일 오후 8시 20분께 A씨는 경기 의왕시 오봉역에서 화물 차량 연결 작업 도중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선로 전환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시멘트 화차 12량이 옆 선로에 있던 그를 치고 지나간 것이다.

가족들은 A씨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7일째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다.

2014년에도 31세 청년 사망, 2018년엔 25세 청년 발목 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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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 서울본부. ⓒ 연합뉴스

 
사무영업직으로 채용된 A씨는 2018년 입사 직후 오봉역 수송원으로 발령받아 사망 전까지 줄곧 일했다. 익명의 코레일 노동자는 "입환(차량 연결·분리) 업무가 위험하고 한 번 다치면 최소 중상이라 모두 오봉역 수송원 배치를 기피한다"라며 "인력 운영이 어려우니 사무영업직 신입 사원들을 오봉역이나 수색역 등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A씨가 일하던 오봉역 수송원 중 50% 가량이 3년 차 미만이었다. 5일 사고 당시에도 입사한 지 4년 밖에 안 된 A씨가 2인 1조 작업 중 선임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같은 조 동료가 자신보다 신참이었기 때문이다. A씨 사망을 직접 목격한 신참 후배는 충격으로 트라우마 치료를 받았다.

현장 노동자들에 따르면, 입환 작업 등 오봉역 수송원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적어도 2~3년 이상의 경력은 필요하다고 한다. 오봉역은 시멘트 기지만 22만㎡에 달할 만큼 넓고, 2021년 기준 전체 철도 화물 수송량의 36%가 거쳐갈 정도로 업무량이 많다.

코레일 측은 "채용 공고 단계부터 사무영업직 사원은 열차 입환 등 수송 업무를 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고지하고 있다"라며 "신입 부서 배치엔 문제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A씨가 입사한 2018년 상반기 코레일 채용 공고를 살펴본 결과, 별첨으로 된 '직무소개서 : 사무영업' 부분에 "열차 조성의 업무를 수행한다"는 단 한 문장으로 설명된 것이 전부였다. 신입 사원 입장에서 이것만 보고 오봉역 입환 작업 같은 위험한 업무를 예측하긴 어렵다.


코레일 측은 신입 사원들의 구체적인 부서 발령 내역에 대해서도 "민감한 부분이라 공개하기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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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 측은 A(33)씨 같은 사무영업직 신입사원들에게 채용 공고 단계부터 열차 입환 등 수송업무를 맡게 될 수 있다는 점이 고지된다고 했다. 하지만 2018년도 상반기 코레일 채용 공고를 살펴보면, 별첨으로 된 '직무소개서' 부분에 "열차조성의 업무를 수행하고"라고 돼 있는 게 전부였다. ⓒ 코레일

 
이렇다 보니 그간 오봉역에서 사고를 당한 청년은 A씨 뿐만이 아니었다. A씨와 입사 동기인 B씨는 불과 스물다섯살이던 2018년 9월 22일 오후 7시 50분경, 역시 오봉역에서 일하던 중 화물 열차 바퀴에 깔려 발목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입사 4개월 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지난 2014년 5월 오봉역 입환 업무 중 사망한 C씨 역시 31세 청년이었다. 올해 코레일 산재 사망자는 총 4명이었고, 최근 10년간 A씨와 같은 입환 업무를 하다 죽은 노동자는 총 4명이었다. 이중 청년(30대) 사망자는 2명이었는데, 모두 오봉역에서 발생했다. 아래는 간단한 사고 개요다.
 
▲ 2022년 코레일 사망 사고(4건)
- 3월 4일 오후 10시 50분경/ 56세/ 대전 대덕구 차량사업소에서 열차 하부 점검 중 사망
- 7월 13일 오후 4시 20분경/ 50대/ 폭우 속 서울 중랑역 승강장 배수로 점검 중 열차에 치여 사망
- 9월 30일 오전 10시 10분경/ 56세/ 경기 고양시 정발산역 스크린도어 수리 중 열차에 치임. 10월 14일 사망
- 11월 5일 오후 8시 20분경/ A(33)씨/ 경기 의왕시 오봉역 입환 업무 중 열차에 치여 사망

▲ 최근 10년간 코레일에서 입환 업무 도중 발생한 사망 사고(4건)
- 2014년 5월 24일 오후 3시 30분경/ C(31)씨/ 경기 의왕시 오봉역 / 열차에 몸이 끼여 사망
- 2017년 5월 27일 오후 1시 50분경/ 52세/ 서울 광운대역 / 열차에 치여 사망
- 2021년 5월 1일 오후 11시경/ 57세/ 경북 포항 괴동역 / 열차에 치여 사망
- 2022년 11월 5일 오후 8시 20분경/ A(33)씨/ 경기 의왕시 오봉역 / 열차에 치여 사망
 
젊은 노동자들 죽어도 바뀌는 것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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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화물 차량 입환 업무 중이던 A(33)씨가 열차에 치여 사망한 경기도 의왕시 오봉역. ⓒ 김성욱


사고가 날 때마다 재발 방지 대책은 똑같이 나왔었다. 부족한 인력을 늘리고, 시설을 개선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없었다. 현장에선 최소 3인 1조 작업이 돼야 사고를 줄일 수 있다고 하지만, A(33)씨도, B(25)씨도, C(31)씨도 모두 2인 1조로 일하다 사망하거나 크게 다쳤다. 현재 오봉역에서 A씨처럼 입환 업무를 하는 노동자는 총 50여 명뿐이다. 전체 입환량이 오봉역의 20분의 1 수준인 의왕역 수송원이 20여 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오봉역 현장엔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작업 통로조차 없었다. 제한된 공간에 효율성만 고려해 선로를 배치하다 보니 선로간 간격이 2m도 안 됐다. 작업자들이 선로를 오가며 위태롭게 일할 수밖에 없다. 조명탑도 충분하지 않아 밤에는 시야 확보가 더 어렵다고 한다. A씨 사고가 난 시점도 주말(토요일) 야간이었다. 오봉역 근무는 4조 2교대로, 주간 조는 오전 9시 ~ 오후 6시 30분, 야간 조는 오후 6시 30분 ~ 다음날 오전 9시까지다.

코레일은 또 다시 신입 사원을 뽑고 있다. 지난 9월 28~30일 원서 접수를 시작으로 현재 2022년도 하반기 채용 일정이 진행 중이다. 2022년도 상반기 채용 경쟁률은 28.3 대 1이었다.

"생일이라고 부산 오겠다던 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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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화물 차량 입환 업무 중이던 A(33)씨가 열차에 치여 사망한 경기도 의왕시 오봉역. ⓒ 김성욱

 
A씨 가족들은 분통을 터뜨린다. 왜 경험도 없는 청년들을 오봉역 같이 위험한 곳부터 떠미냐는 것이다. A씨의 여동생 D(31)씨는 지난 8일 온라인 게시판 등에 올린 글에서 "대한민국 많은 청년들이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 일 하려 전공 시험에, NCS 시험에, 자격증까지 딴다는 것을 부모님들이 아실까"라며 "너무 어이가 없고 실감이 나지 않아 눈물도 나지 않았다"고 절규했다.

D씨가 쓴 글은 게시판에서 가장 많이 읽힌 글에 오르는 등 널리 공감 받았다. A씨의 또 다른 유가족은 통화에서 "여동생이 오빠를 잃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글을 쓴 것으로 안다"라며 "아직 충격이 너무 커 식구들이 외부와 접촉을 못 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족들은 11일 현재까지 A씨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 아래 D씨가 글로 호소했던 내용을 그대로 싣는다.

"코레일 오봉역 사망사고 유족입니다.. 제발 다들 봐주세요.."

이번 사망사고의 피해자인 저희 오빠의 억울한 죽음을 다들 많이 알아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8년 코레일에 입사했을 당시 저희 오빠는 사무영업으로 채용이 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저도 오빠의 코레일 입사를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너무너무 좋아하셨죠.. 그런데 처음 입사했을 당시에도 이상했던 게 사무영업직으로 입사를 했는데 수송 쪽으로 발령이 된 게 너무 이상했었습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채용된 직렬과 상관없이 현장직으로 투입이 된 부당한 상황이었지만 힘들게 들어간 회사이기에 어느 누가 신입사원이 그런걸 따질 수가 있을까요?

그래도 첫 회사이며 첫 사회 생활이니 잘해보자는 마음으로 근무를 하던 와중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오빠와 같이 입사했던 동기 한 명이 다리가 절단되는 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저와 저희 부모님은 그런 위험한 환경에서 일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매우 놀랐고 당장 나오라고 여러 번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 중 대다수가 그 충격으로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직을 하거나 다른 역으로 급히 떠났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 오빠도 많은 고민을 했지만 본가가 서울이 아닌 부산이기 때문에 어딜 가도 타지인건 마찬가지였고 위에 많은 선배 분들이 여기서 조금만 더 있으면 원하는 역으로 갈 수 있다는 많은 회유와 얘기들 때문에 조금 더 남아있겠다고 결정했다고 그 당시에 얘기했었죠. 저희 오빠는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항상 안전에 유의하고 안전사고 관련해 많이 개선이 되었기 때문에 괜찮다고만 했습니다. 그 얘기를 그냥 믿은 저희가 미친 거죠..

항상 부산본가를 오면 다리가 아파죽겠다고 했습니다. 발목염증은 사라질 날이 없었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와 멍들...자갈밭을 매일 1만보에서 2만보를 걸어 다닌답니다. 저는 오빠야 가 살을 안 빼서 몸이 무거워서 아픈 거라고 철없이 장난만 쳤죠........

저희 오빠 어제 생일이었습니다. 오빠 낳느라 고생한 우리엄마 선물사서 부산 온다고 신나게 전화했던 저희 오빠가...

전화 끊은 지 3시간도 안 돼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답니다. 부모님이랑 우리 오빠야 좋아하는 귤이랑 겉절이 해줄 배추사서 신나게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받은 전화 한 통은 지옥이었습니다.

저희 오빠가 조금 다쳤대요, 그래서 와봐야 될 것 같답니다. 그 사실 하나로도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쓰러지는 저희 부모님이셨는데 다시 전화 와서 저희 오빠가 죽었답니다..

열차에 깔려서.. 미친 듯이 차를 몰고 오봉역까지 가는 4시간은 죽을 거 같았습니다. 평생 종교를 믿지도 않던 제가 손을 간절히 모으고 제발 살아만 있어달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오봉역이 아닌 병원 2층 장례식장으로 오라는 얘기에 결국 저희 부모님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쓰러지셨고... 사진 한 장 없고 아무도 없는 빈소 앞에서 또다시 저희는 무너졌습니다..너무 어이가 없고 실감이 나지 않아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미친 듯이 달려서 온 빈소에서 새벽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 코레일 관련 직원들이라며 온 분들은 슬퍼하지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일을 하고 계시더군요.

사람들에게 저희 오빠의 죽음은 빨리 해결해야 될 일이었습니다. 영혼 없는 말들.. 사고에 관련해서 물어도 아는 것이 없답니다 아무것도

제가 외쳤죠. 어떻게 하실 거냐고. 본부장이라는 아저씨가 말했죠. 원하는걸 말씀만 해주시면 뭐든지 들어주겠답니다. 저랑 어머니는 소리 질렀죠. 다 필요 없고 우리 오빠 데리고 오라고.

휴게실이니 복도니 우글우글 와있던 코레일 본사 직원들은 아무도 저희 오빠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그저 저희 가족의 동태와 반응 살피기에 급급했죠.

수근수근 대는 저 사람들한테 물어봤죠. 저희 오빠랑 일했던 분이 계시냐고. 아니랍니다 본부직원들인데 저희 가족의 불편함을 해결해주기 위해 온 분들이랍니다.

저희 가족의 불편함을 해결해준다고 앉아서 휴대폰 보고 노트 끄적거리던 다수의 직원들과 조금 높은 직급이랍시고 와서 담배나 주구장창 피고 저희 동태만 살피던 아저씨들.

너무 너무너무 억울하고 화가나 죽겠는데 저희 오빠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앉아서 그러고 있는 꼴도 보기 싫고.

저희 오빠 직장동료들을 보고 싶다고 해도 새벽 시간이라 다들 피곤하기 때문에 지금은 힘들다는 앵무새처럼 얘기하던 팀장. 우리 오빠는 지금 죽었는데 새벽이라 피곤하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아무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혼자 잠시 나가서 전화를 하거나 숨이 막혀 바람이라도 쐬면 감시하는 거 마냥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 우리 오빠가 죽었는데 우리가 죄인인 마냥 텅 빈 방에 던져져 있었습니다.

밤새 고민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뭘까.. 우리오빠라면 뭘 하고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이트 판에 글을 올리는 것과 우리 오빠 뉴스기사에 댓글을 다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주길, 많은 기자 분들이 우리오빠의 죽음을 억울하지 않게 기사를 써주시길..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미안해하지 않더니 내가 쓴 뉴스 댓글을 국토부 차관이신 분이 보셨는지 철도경찰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유족분들 흥분하지 마시고 글을 쓰는 건 자제해달랍니다.
조사가 더 길어질 수도 있기에 자제해달랍니다.

내가 지금 못할 짓이 있을까? 사고 현장을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가게 되었는데.. 저는 한국에 이런 곳이 있다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우리오빠가 일하던 현장을 본 부모님과 삼촌들은 말을 잇지 못 했고 철조망에 매달려 오열했습니다..

저 먼 거리를 매일 걸어 다니고 그냥 길도 많이 걸으면 다리 아픈데 자갈밭에 철길에..매일 저 크고 높은 열차들을 일일이 손으로 연결하고 떼고 위치 바꾸고.. 열차에서 매일 뛰어내리고 오른다고 발목염증은 나을 수가 없었고 열차가 지나가면서 튀는 자갈들로 인해 생긴 여기저기 시퍼런 멍들....

부족한 인력과 열악한 시설 속에서 일하느라 힘들어서 간수치는 나빠진 지 오래였던 우리오빠가 그런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니 글을 쓰는 지금도 숨이 막힙니다...
철길 옆은 울창한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철조망으로 인해 사고가 나도 도망칠 공간도 없었고 CCTV는 당연히 보이지도 않고 설치 돼있지도 않았으며 밤에는 불빛조차 환하지 않아 어렴풋이 보이는 시야 속에서 일을 했고 유일한 소통수단인 무전기 또한 상태가 좋지도 않은 그런 환경 속...

대한민국 많은 청년들 이런 환경속에서 일 시키려고 전공시험에 NCS시험에 자격증까지....

저희 오빠 뿐만이 아니라 저희 오빠보다도 어린 동생들도 다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한다는 걸 부모님들이 다들 아실까요?

저희 오빠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철로노선이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을텐 데도 왜 중간에 멈추지도 않고 저희 오빠를 밟고 밟고.. 그 무거운 열차 수 십대가 저희 오빠를 밟고 지나 끝까지 들어갔답니다..

저 많은 열차를 단 2명이서 그것도 숙련된 2명도 아닌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인원들 포함 2명이서 그 일을 한다고 들었어요. 숙련자들은 하나같이 일이 힘들다고 빠져나가기 급급하고 어린 신입 사원들만 집어넣기 바쁜 이곳에서 우리오빠는 너까지 나가면 너무 힘들다는 윗분들의 말에 마음이 약해져 올해까지만 버티고 나가야겠다고 했는데..

그때 나가라고 할 걸 그랬나 봐요. 제 입을 찢어버리고 싶어요 정말.. 우리 오빠힘드니까 다른 역으로 빨리 나가라고 할 걸..

오빠야 일하는 곳 궁금하다고 해도 절대 오지 말라고, 바쁘다고, 괜찮다고 해도 우겨서라도 일하는 곳을 한 번이라도 가볼 걸.. 그랬으면 멱살이라도 잡고 회사 나오라고 했을 텐데.. 피아노치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여자들보다도 손이 곱고 예뻤던 우리 오빠 손이 저렇게 험하게 될 때까지 우리 오빠 다리가 아파터지고 염증이 남아나질 않았는 데도 우리가 걱정할까 봐 곰탱이처럼 얘기도 안 하던 우리오빠.. 내가 한 번이라도 더 집에 찾아가볼 걸.. 그랬으면 영양제라면 비타민도 먹지 않던 우리 오빠 집에 있던 수많은 간약들과 영양제를 집에 털어 넣던 우리 오빠모습을 봤을 텐데..

그날 저녁 제가 쓴 댓글 때문인지 모르지만 조금씩 기자님들이 연락을 주셨고 저랑 접선을 하기 위해 연락을 수 없이 하시던 분들이 생기자 코레일 사장님께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르겠어요 아직도 내가 뭘 해야 할지...

저희 부모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죄송하다고 하시는 사장님 옆에서 같이 무릎 꿇고 있던 어제 원하는걸 들어주겠다던 그 아저씨까지.. 장난 치는것도 아니고 실실 거리며 웃는 표정으로 얘기하던 그 면상판을 발로 짓이겨 버리고 싶은걸 억누르고 참았습니다. 본부장이라는 자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기는커녕 실실 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내 손에 칼이라도 있었으면...

저희 부모님과 저는 그날 처음으로 사람한테 미안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식이었는지 사건이 커지는걸 막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이 제 눈을 바라보고 정말 미안하다고 하는 그 말에 이틀 내내 참아왔던 눈물이 터지고 죽어라 소리질렀습니다. 우리오빠 생일이라서 맛있는거 먹기로 했는데 우리엄마선물사서 온다고 자랑했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사건조사는 도대체 무슨 조사를 그렇게 하냐고, 우리 오빠 아직 밥도 한끼 못 먹고 저렇게 차가운데 혼자 누워있는데 배고플 거 아니냐고....

저희 아빠는 휘발유통이라도 메고 찾아가겠답니다. 우리 오빠 억울한 거 안 풀어주고 회사 이미지 망가질까 봐 오빠한테 다 덮어씌우면 가만 안 있을 거래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이든 다 할거예요. 같이 일하던 사람이 1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이상하다는 걸 빨리 인지해서 빨리 멈췄었더라면.. 피할 공간이 넓어서 빨리 도망이라도 쳤었더라면..

오늘 아침 또 다른 기사를 봤습니다. 우리오빠가 참변을 당하기 전부터 선로 변경 장치에 이상이 여러 번 있었다는 걸... 저희한테 설명하고 브리핑 했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인대 저 기자분은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사전예방을 했더라면 저희 오빠가 저런 참변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직까지도 조사만 하고 있고 저희 가족은 덩그러니 빈방에서 빈소 아닌 빈소만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 저희 오빠 얼굴도 못 봤습니다..
시신상태가 너무 안 좋아.. 지금 당장 볼 수도 없대요..

우리 오빠야 얼마나 아팠을 거야.. 그 큰 열차들이.. 우리오빠 생일인대.. 생일이라서 내가 맛있는 것도 사주고 선물도 사주려 했는데.. 어제 밤에 오빠야 닮은 동그란 보름달이 떠있더라?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항상 곰돌이 같고 오빠야지만 동생같이 귀여웠는데..

부산 여자라 표현이 나긋나긋 하지 않은 동생에 비해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착했던 우리 오빠야인데... 나쁜짓을 한적도 없고 항상 똑똑하고 특별한 사람이라 어디에서도 나는 내 이름보다는 OO이 동생으로 불렸고 나한테는 부모님보다도 더 큰 산처럼 의지하는 오빠야 였는데..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정한 오빠 덕에 항상 사이 좋은 남매로 불렸고 부모님한테도 항상 다정하게 잘하는 착한 아들이었는데..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 오빠야 였으면 어떻게 헤쳐 나갔을 거야?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넘어가.. 물도 안 들어가.. 잠을 좀 자야 오빠야가 꿈에라도 잠시 나올텐데.. 그치? 너무너무 보고싶어. 내가 오빠야 절대 절대 안 억울하게 끝까지 싸울 거야.

난 우리 오빠 동생이니까 다 할 수 있어. 제발 우리 오빠 안 억울할 수 있게 많은 분들이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해주시고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제발 부탁 드립니다..


[관련기사]
"철도 인력 충원만 됐어도... 구의역 김군 이전 돌아가선 안 돼" http://omn.kr/21j6e
[이달의 기업살인] 10월에도 74명이 퇴근하지 못했습니다 http://omn.kr/21hdg
 
#코레일 #오봉역 #청년 #노동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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