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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자기 고백, 거부할 수 없는 다큐의 매력

[하작가의 이야기 따라잡기] 9월 28일 개봉한 다큐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22.10.04 16:57최종업데이트22.10.0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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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이 넘도록 리뷰와 칼럼을 쓰고 있어도 어렵습니다. 문학소년, 영화청년으로 성장했어도, 이제는 몇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엎어지기를 반복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늘 이야기를 고민하고 콘텐츠에 서사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입니다. 어쩌면 세상 또한 개개인의 서사와 이야기로 구성될런지도요. 영화와 드라마를 그 서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탐구해 보겠습니다.[편집자말]
지난달 말 성곡미술관에 들렀다. 오는 15일까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사진전이 열리는 미술관이다. 그 전시엔 50년간 묵묵히 '물방울'만을 그렸다는 김창열 화백의 제주 작업실 광경이 담겼고, 그의 평생 동반자였다던 마르틴 김 여사가 기록한 남편과의 기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창열 화백의 장남이자 제주 '김창열 미술관' 명예관장인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김시몽 교수는 이런 아쉬움을 토로했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꽃도 인물도 그리지 않는 남자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그를 '물방울 화가'라고 말할 때 나를 힘들게 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반 고흐를 해바라기 화가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화가 반 고흐'라고 말한 다음에 '해바라기 그림으로 유명한'을 추가할 것입니다. 마치 물방울 그림이 다른 장르의 그림과 구별되는 그 자체의 예술인 것처럼 말입니다."

첫 문장이 뭔가 탁하고 시각을 열어준다. 맞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다른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화가와 동일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는 살짝 의아함이 들었다. 유명 화백의 아들은 아버지의 작품 세계에 대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좀 더 읽어 보고 싶어졌다.

"나는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뾰족한 수염을 가진 그의 머리가, 뾰족한 그림자로 수염을 기른 물방울 모양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자기 자신을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린 물방울의 모든 투명함과 순수함과 부드러움은 물방울처럼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투명한 자신의 인격을 반영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반으로 나뉠 것이다. 김창열 화백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로. 혹은 '물방울 그림'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으로. 그건 동명의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관객을 한국 추상미술에 얼마나 관심을 가져왔느냐란 질문과 마주하게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레 겁먹을 건 없다. 다큐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미술 자체나 미술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투명한 인격을 말방울 그림에 투영해 왔던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화가를 바라보는 화자이면서 공동연출을 맡은 이는 다름아닌 김 화백의 둘째 아들 김오안 감독이다.

프랑스 감독 브리지트 부이요와 함께 공동연출과 음악까지 도맡은 이 다재다능한 종합예술인은 아들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인격과 예술이란 흔치 않은 주제를 놀랍도록 침착하고 차분하게 다루는 깊이감을 선보인다. 그 깊이감이 영화와 미술과 음악을 아우르고, 주제와 형식을 탁월하게 조율한다.

그리하여 김 화백을 알았든 몰랐든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관람한 이는 자연스러운 공통의 욕망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의 더 많은 작품을 두 눈으로 직접 감상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말이다. 물론 이 흔치 않은 다큐의 미덕은 그 뿐만이 아니다.

"물방울 그림,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다큐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내 그림 중 하나를 뒤집어 놓았는데 물을 부었더니 셀 수 없이 많은 물방울들이 맺혔고 빛이 나면서 그림이 되었어.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말했지.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김창열 화백)

아버지가 말한다. 물방울 그림의 연원에 대해. 카메라를 향해서인지, 그 뒤에 선 아들에게 한 말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무심하고 해탈한 듯한 아우라의 김 화백은 이내 강렬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 집중력에 압도당할 것 같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 이것은 만만치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김 화백은 1972년 프랑스 '살롱 드 메전(展)'에서 첫 번째 '물방울' 작품인 '밤에 일어난 일(Event of the Night)'을 공개하며 전 세계 미술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김 화백의 자기 진술을 우리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일종의 계시이든 아니든 50년 가까이 물방울이란 찰라의 존재를 통해 실재와 부재 간격과 실존과 부존의 간극을 탐구해 온 거장의 자기 고백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린다.

그런 거장에게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 '시네마 에세이'는 우선 화가 개인의 철학과 사고가 작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딱히 친절한 방식은 아니다. 바로 거기서 이 특별한 다큐의 '미학'이 발생한다. 딱히 선 굵은 이야기 구조에 힘을 빌리는 대신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일종의 어떤 선문답과 닮아 있다.

김 화백이 애호했다는 달마대사가 그랬다고 하지 않는가.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며 텅빈 벽을 쳐다봤다고. 카메라 앞에선 김 화백도 과묵하긴 마찬가지다. 다큐 또한 김오안 감독의 질문을 전제로 평생 물방울을 그려온 아버지의 기원과 작품의 의미를 관조하듯 탐구한다.

미학이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거기다. 두 공동 연출자는 거장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진술과 설명을 넘치게 구성하거나 직설적인 인터뷰를 이어붙이지 않는다. 그 대신 김 화백의 그림 이미지와 김오안 감독이 직접 작곡한 음악을 고요하고 오묘한 리듬감 속에 흐르듯 배치한다. 눈과 귀가 호강하는 사이 영화는 어느 순간 자신만의 호흡과 질감을 생성해 낸다. 한국 다큐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색깔의 다큐가 틀림 없다.

아들의 질문은 그래서 더 깊은 의미를 부여 받는다. 촬영을 했을 당시 아버지가 자신을 낳았던 나이 때쯤 됐다는 김오안 감독은 다큐 작업을 통해 그간 잘 몰랐던 아버지의 청춘과 대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청춘은 우리의 현대사다.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점철된 그 비극적 현대사 말이다.

매혹하는 다큐
 

다큐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김 화백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외삼촌에게 각각 서예와 데생을 배웠다고 한다. 훗날 월북한 예술인인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회화를 공부했다는 김 화백은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 일제강점기와 분단, 한국 전쟁 등을 몸소 겪었다.

그 전쟁의 참상이 천재 화가의 뇌리에 깊히 박혔고, 그 시대적 상처와 뒤엉킨 개인의 기억이 이 화백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후 김 화백이 서울과 제주, 뉴욕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하는 코스모폴리탄적인 행로를 보인 것 또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김오안 감독의 질문이 유의미한 것은 바로 그 이중의 의미 때문일 터다. 조국의 비극적 현대사는 예술가에게 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재 화가도 결국은 아버지였다. 김오안 감독은 어린 시절 짧지만 강렬했던 아버지의 폭력에 대해 털어 놓는데 그러한 개인의 폭력은 폭력적이고 억업적인 한국 현대사와 결부돼 더 큰 함의로 연결된다.

딱히 아버지에게 이렇다할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어이 아들 입장에선 껄끄럽고 미묘할 수 있는 질문에까지 다다른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이를 통해 개인과 역사, 예술가의 내면과 작품 세계를 종횡하는 성찰의 다큐로 도약한다. 아버지의 물욕을 언급하는 대목도 엇비슷하다.

"아버지가 생각보다 좀 복잡하고 역설적인 성격을 가지셨어요. 그중에 어떻게 보면 되게 철학적인 분이셨고 또 다르게 보면 아주 경제적인 성격을 가지셨어요. 그리고 되게 욕심 많으셨던 젊은 작가였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늙어가면서 그런 면은 자연스럽게 숨긴 것 같아요." (김오안 감독)

이처럼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대를 이어 예술에 매진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를 간단히 띄어넘는다. 중충적이고 복잡미묘한 이 시선은 아들이라서 견지하는 어렵고도 균형 잡힌 시각일 터다. 그렇다고 '물방울 그림'들 자체에 소홀할 생각도 없다.

영화는 후반부 김 화백이 50여년 가까이 매진해 온 형이상학적이고 다채로우며 매력적인 갖가지 물방울 그림들을 김오안 감독의 음악과 매끄러운 편집을 통해 스크린에 투사, 말그대로 매혹적인 순간들을 연출해 낸다. 김 화백의 팬이든 아니든, 물방울의 미학을 영상 미학적 체험으로 만나는 행복한 경험이다.

"결국 물방울 그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자 철학이자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물방울을 단어로 사용하는 작가이자 이야기꾼입니다. 이 점이 왜 그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이지만 꽃도 인물도 그리지 않는 남자인 이유입니다." (김시몽 교수)

다큐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도 정확히 같은 길을 간다. 아들은 아버지의 예술과 철학과 삶의 방식을 고요하고 부드럽게 관찰하고 탐구하고 질문한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촬영은 이어졌고, 이후 김 화백은 지난해 1월 별세했다. 이제 거장은 가고 없다. 이 매혹의 다큐는 오래오래 남아 물방울들 속에 담긴 김 화백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할 것이다. 매혹하는 다큐들이 원래 힘이 센 법이니까. 
물방울을그리는남자 김창열 김오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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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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