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7 05:08최종 업데이트 22.09.27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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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교류의 문이 열리기 전 일본 야구의 자양분을 한국으로 이어준 것이 재일교포였다면 미국 야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준 것은 주한미군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일거에 제거되었지만 통치권을 이어받은 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같은 해 9월 8일부터 3년 동안의 군정 통치를 하면서 총독부의 기능을 대체한 미군이었다.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권을 이양하고 단계적으로 철수했지만 2년 뒤인 1950년 6월에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돌아온 미군은 이후 오늘날까지 곳곳에 주둔하며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영향 안에는 야구를 포함한 문화적 영역 역시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한반도를 36년간 직접 통치하며 문화적 통합을 시도했는데도 야구에 있어서는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일본에 비하면 미국의 영향은 훨씬 직접적이고 강력했다. 미 군정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미국과 주한미군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한국인 지도자들과의 관계도 일본에 비해 훨씬 우호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구는 애초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널리 성행한 스포츠였던 동시에 한국에도 이미 토대가 마련된 종목이었기에 미국과 한국의 정치 엘리트들이 미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문화적 가교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미군정과 주한미군은 한국의 야구계에 적극적인 지원을 했고, 그것은 야구 종목에서 가장 먼저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국가대표팀을 구성하는 직접적인 동력으로 작용했다.

통치하는 미군, 한국인과 야구로 교감

특히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기에 38도선 이남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장악한 것은 미군이었고 그 통치를 받는 것은 한국인이었지만 미군과 한국인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경우 언어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들과 미군들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기 위한 '친선 교류 행사'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고 가장 폭넓게 활용된 것은 스포츠였다. 권투, 탁구, 사격, 정구, 축구, 미식축구 등의 종목에서 미군부대와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의 한국인 주민들을 각각 대표하는 선수나 팀이 '한미친선'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경기를 한 것은 그런 사례들이었다.

하지만 권투나 탁구, 사격 같은 개인 종목들의 경우에는 파급력의 한계가 뚜렷했다. 많은 관중을 입장시킬 수 있는 실내경기장을 갖추지 못해 넓은 야외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경기들이 대중의 이목을 끌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비교적 폭넓게 즐기던 야외 단체종목인 축구가 미군들에게는 별 인기가 없었던 반면 미군들이 즐기는 미식축구는 한국인들에게 생소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하지만 야구의 경우에는 미군들이 가장 좋아하고 잘 하는 종목이었을 뿐 아니라 종주국 국민의 자부심으로 주둔지 국민에게 기꺼이 전파하고 지도할 의지도 있었다.  한국인 중에서도 식민지 시기에 야구부가 설치된 명문 학교를 졸업하거나 유학을 경험해 미군정과의 소통이 가능한 정치, 경제, 언론계의 엘리트들이 특히 즐기는 종목이었으며 동시에 많은 관중을 입장시킬 수 있는 정식야구장(동대문 서울야구장, 용산 만주철도야구장 등)도 준비되어 있었다.

축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미식축구에 비해서는 한국인 대중에게도 비교적 알려진 종목이기도 했다.

조미친선야구대회와 청룡기의 시작

1946년 8월 16일에 해방 1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열린 '조미(朝美) 친선야구대회'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대회에서 홈런왕 이영민과 일본 프로야구 '한큐군' 출신 안완식 등이 주축이 된 조선대표팀이 '단 한 점도 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장담하던 오만한 미군 팀을 상대해 비록 패하긴 했지만 치열한 추격전을 벌인 끝에 3점을 얻어내며 한 점 차 선전을 펼쳤다.

그에 대한 치하의 의미로 선물 받은 야구공 3다스(36개)를 식산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돈 10만 원을 대출받아 창설된 대회가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대회'였다. 그것이 바로 해방 후 전국 규모로 치러진 최초의 단일종목 스포츠 대회이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대회이기도 한 청룡기 고교야구 대회다.

'한미친선야구대회'의 성과에 대한 한미 양국의 높은 평가는 그 대회가 그 뒤로 꾸준히 이어졌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1957년부터는 일회성 이벤트의 반복 차원을 넘어 대한야구협회와 미 8군사령부가 공동주최해 횟수를 부여하는 정식 대회로 승격했으며 1970년까지 14회에 걸쳐 열렸다. 
 

한미친선야구대회 1960년에 열린 제 6회 한미친선야구대회 시포에 나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 국가기록원

 
미군의 한국 주둔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미군과 한국 사회는 다양한 층위에서 문화적 사회적 영향을 주고받아왔다. 야구에서도 공식적인 한미교류행사 외에도 무수한 비공식 연습 경기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자극이 주어지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곳곳에 배치된 미군들은 부대 대항 야구 리그를 운영하며 결속을 다졌는데 부대 대항전의 규모는 주둔 지역이나 국가 단위에서부터 보다 광범위한 권역 단위까지 다양했다.

특히 같은 극동 지역에 속한 일본, 필리핀 주둔 부대들과 치열한 라이벌전을 벌여야 했던 주한미군 팀은 종종 수준급의 한국인 팀들을 미군기지로 초청해 연습경기 상대로 활용했다. 그때 미군들의 연습 파트너로 선택받은 실업과 대학팀들은 미군 기지 내에 조성된 훌륭한 야구장에서 선진기술을 가진 팀을 상대하며 기술적 자극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미국산 야구 장비들을 받으며 전력을 강화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공과 글러브 그리고 우유와 스테이크
 
경동고가 1960년에 전승을 했죠. 32연승. 청룡기랑 황금사자기 그리고 부산 쌍룡기를 다 우승했고. 경동고가 강했던 건 미군들하고 연습경기를 해서야. 우리 감독님이 영어를 잘 해서 미군하고 교섭이 됐거든. 그래서 용산 미군기지 안에 있는 야구장에 가서 경기를 자주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지면, 자기들은 이겼으니까 기분이 좋아서 배트랑 공이랑 이런 것들을 막 주거든. 미군들은 야구 장비들도 보급이 나오니까 비교적 흔했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돈이 있어도 사기 어려운 좋은 장비들을 쓸 수가 있었지.

특히 나는 포수였으니까 포수 미트가 필요한데, 그건 구하기가 쉽지 않았거든. 그런데 포수 미트를 하나 받았는데, 정말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어. 또 아무래도 미국에서 야구를 했던 선수들이 징집돼서 온 경우도 있고 하다 보니 야구를 상당히 잘 했는데, 그런 팀을 상대하다보니까 그 다음에 고등학교 팀들하고 경기를 하면 너무 쉬웠지."(백인천, 전 LG 트윈스 감독)
 
60년대 말에 실업팀에 있을 때 미군 용산기지에 있는 야구장에 들어가서 연습경기를 할 기회가 있어요. 그러면 경기하기 전에 밥을 주거든. 그게 그렇게 좋았어. 스테이크랑 우유, 바나나 같은 음식들을 마음대로 갖다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 그게 흔히 먹을 수가 없는 거니까 욕심껏 너무 많이들 먹고 그러는데, 또 그 때는 기름진 음식들도 그렇지만 우유도 많이 먹지 못하던 시절이니까, 경기하다가 막 설사들을 하고 그랬다고.

또 이겨도 안 되고, 너무 크게 져도 안 되고, 대등하게 하다가 지면 기분이 좋아져서 장비들도 막 주고. 그래서 나중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일부러 지고 그랬다고. 이길 수 있을 때도." (박용진, 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용산미군기지 야구장 1960년대에 용산의 미군기지에는 천연잔디가 깔린 당대 국내 최고 수준의 야구장이 있었고, 좋은 식사와 수준 높은 연습경기 그리고 결과에 따라서는 푸짐한 선물이 있었다. 그곳에 초청받은 한국인 야구팀들이 드러나지 않는 전력 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197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서 야구가 성행한 4대 도시로 서울과 인천, 부산과 대구가 꼽혔는데 그 네 곳은 모두 주한미군의 대규모 주둔지가 있던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네 도시에서는 상대적으로 야구 경기를 경험하기 쉬웠을 뿐 아니라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나오는 공을 비롯한 야구 장비들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예컨대 1952년과 1953년 인천고의 고교야구 전국대회 전관왕 신화를 이끈 데 이어 국가대표와 실업팀의 선수와 지도자 그리고 야구해설자로서 이름을 날린 고 서동준 선생의 경우에도 인천에서 보낸 어린 시절 '미군들이 야구 경기 하는 걸 구경하다가 파울볼을 주워 들고 도망쳐서 인천군(안완식 등이 주축을 이루던 사회인야구팀) 아저씨들에게 가져다주면 귀여움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즉, 1940년대에 주한미군이 한국에 야구 기술과 장비를 전파하고 규모 있는 경기와 대회를 열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했다면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주둔지 인근에서 활동하던 야구팀들에 선진 기술과 장비를 전파함으로써 전국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하고 기술 발전을 선도하게 하는 드러나지 않는 배경으로서 기능한 셈이다.

미국 야구의 중계자, 주한미군

한국이 미국 야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서도 프로야구가 창설된 1982년 이후였다. 1982년에는 홈런왕 출신의 부사장 행크 애런이 이끄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마이너리그 선발팀이 내한 경기를 하며 야구 기술과 리그 운영에 관한 조언을 한 적이 있고, 1985년 시즌 전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미국 베로비치의 LA 다저스 캠프에서 전지 훈련하며 다저스 코치진의 지도를 받아 이후 팀 수비전략의 틀을 만든 적이 있다.

1990년대 말 이후로는 미국 출신 선수들이 들어오고 한국 선수들이 미국 무대에서 뛰면서 두 나라의 야구는 부쩍 가까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한국에 미국 야구의 기술과 문화와 장비를 전해준 간접적 중개자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주한미군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주한미군들을 상대로 펼쳐졌던 '미8군쇼' 무대는 길옥윤, 이봉조, 신중현, 패티김 등을 길러낸 요람이었고 그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굵은 뿌리가 됐다. 주한미군이 한국 야구에 미친 영향을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역시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자양분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행크 애런 삼성 라이온즈 초청으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마이너리그 선발팀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한 홈런왕 행크 애런이 이만수에게 타격에 관해 조언하고 있다. 중간에서 지켜보는 것은 서영무 감독. ⓒ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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