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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심판하지 못한 독재자, 이 영화가 쓰러뜨린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399] <헌트>

22.09.13 17:33최종업데이트22.09.1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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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트 포스터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1980년 광주 민주화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손꼽힌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신군부 세력이 자국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해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낳았기 때문이다. 민주화 집회를 벌이는 시민을 폭도로 몰아가고 진압까지 허가한 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다. 그는 광주에서 벌인 참극 직후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8년까지 장기 집권한다.

한국은 전두환을 심판하는 데 실패했다. 1987년 서울의 봄 이후에도 말 많고 탈 많은 삼당합당으로 신군부 일파인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역사 바로세우기'를 표방한 문민정부 시절에 들어서야 구속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을 받았다.

구속 2년 만인 1997년 제15대 대선 후보 전원(김대중, 이회창, 이인제)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선 직후 대통령 김영삼과 당선자 김대중의 결단으로 이들은 결국 사면되기에 이른다. 군사반란에 자국민에 대한 학살까지 자행한 책임자들이 단 2년 만에 자유를 얻은 것이다. 이후에도 전두환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으나 형이 확정되고 법이 집행된 뒤 사면까지 해주었으니 방도가 없게 되었다.

지속적으로 터져 나온 비자금 논란 역시도 해결되지 못하였다. 2003년 재산명시 관련 재판에서 전두환이 제 전 재산이 29만 1000원 뿐이라고 한 말은 전 국민적 분노를 샀다. 그러나 전두환은 스스로 그 말을 농담으로 즐기면서도 끝끝내 1000억 원에 가까운 추징금을 내지 않았다. 지난해 전두환이 사망함에 따라 추징금 환수계획 역시 실패로 종결되게 되었다.
 

▲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역사는 심판하지 못했지만

한국은 전두환을 심판하는 데 실패했으나 문화는 그를 그대로 보내려 하지 않는다. 거듭 1980년 5월의 광주와 전두환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발표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헌트>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다.

<헌트>는 역사적 사실 위에 영화적 상상을 가미했다. 시작부터 픽션임을 밝히고 시작하는 영화는, 그러나 처음부터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영화 첫 장면은 미국에서 시작한다. 1983년 워싱턴 D.C. 한 호텔 앞에서 방미 중인 대통령의 암살 시도가 발생하는 장면이다. 이때 호텔 앞엔 시위대가 집회를 벌이고 있는데, 이들이 전두환의 사진을 불에 태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1983년 미얀마(당시 버마)에서 있었던 아웅산 테러를 모티브로 삼았다. 영화 속 태국에서 진행되는 대통령 암살 계획은 먼저 도착한 한국대사가 대통령으로 오인되고 애국가가 반복돼 제창되는 해프닝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아웅산 테러를 끌어다 썼다. 전두환을 목표로 삼은 테러사건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알려지고 시도된 것이 이 한 건에 불과한데, 영화가 이를 폭발적으로 터뜨려 실제 사건 속에선 화를 피한 전두환을 테러의 한가운데 들여놓기까지 한다. 요컨대 감독 이정재는 전두환을 영화 안에서나마 심판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영화를 찍었다고 볼 수 있다.
 

▲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장르적 쾌감도 놓치지 않는다

전두환에 대한 심판 외에 영화의 주된 관심은 첩보물로서의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둘로, 모두 안기부 차장급 요원이다. 하나는 국제파트를 이끄는 박평호(이정재 분)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파트 수장인 김정도(정우성 분)다.

이들은 변화하는 역학구도 속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나중엔 서로가 북한에서 심은 대남공작원 '동림'일 수 있다는 의심을 한다. 둘 중 하나가 간첩이란 사실이 밝혀진 뒤엔 북한 고정간첩단이 모습을 드러내고, 대통령을 처단하려는 남한의 군부 조직까지 수면 위로 떠오른다. 결국 영화는 대통령 암살작전의 클라이막스로 귀결되는데, 그 과정이 때 되면 불판을 척척 갈아주는 프랜차이즈 고깃집에 온 듯 능숙하기 짝이 없다.

신인답지 않은 솜씨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연출 덕에 관객은 지루할 틈 없이 영화에 빠져든다. 평호와 정도 사이에 서로를 깊이 이해할 만큼의 사연이 없는 탓에 브로맨스로 전개되진 못하지만, 대신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해야 하는 긴박감이 분위기를 장악한다. 그 과정에서 두 인물 모두를 악당이 아닌 이해받을 수 있는 캐릭터로 놓아두려는 감독의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나기까지 한다.
 

▲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전두환 심판한 영화 중 단연 돋보인다

결국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역사적 사실과 달리 전두환을 테러의 한가운데 쓰려뜨려 놓는다. 그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지는 못하지만 극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 또 그들의 처절한 삶을 통하여 전두환과 신군부가 자행한 일들이 얼마만큼 악한 것이었는지를 내보이는 것이다.

<헌트>가 처음은 아니다. 광주 민주화항쟁을 다룬 영화로 <꽃잎>과 <박하사탕>  <스카우트>와 <화려한 휴가>가 있었다. 보다 직접적으로 전두환 암살작전을 다룬 < 26년 > 같은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앞의 영화들은 완성도와는 별개로 1980년 광주의 비극에 집중했고, 뒤의 영화는 전두환에 대한 심판까지 도모했으나 작품이 의도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 사이 전두환은 사죄도, 추징금 납부도 없이 숨을 거뒀다. 1980년 광주의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 그 뜻을 이어받은 민주시민들은 민주화된 세상에서조차 그들을 원을 푸는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헌트>와 같은 작품조차 없었다면 한국 영화계의 정신이 어떻게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감독 이정재의 첫 연출작은 기대보다 훨씬 나았다. '동림(東林)'이라는 암호명에서 짐작되듯이 같은 배우 출신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동경을 품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영화적 소양이 깃든 대목도 여럿 보였다.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분위기, 거침없는 액션에 집중한 나머지 인물들의 드라마와 캐릭터에 있어선 아쉬운 면도 없지 않았으나 이번이 첫 작품이란 점을 고려하면 상찬할 것들로 훨씬 많은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역사가 심판하지 못한 독재자를 거침없이 태우고 쓰러뜨렸다는 점이 그러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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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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