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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딸에게 돌봄을 요구하는 세상, 화가 납니다

노부토모 나오코가 쓴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를 읽고

등록 2022.08.28 18:44수정 2022.08.2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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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표지 이미지 ⓒ 시공사

 
노부토모 나오코의 책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는 부모의 치매 간병 길잡이로 유용하다. 물론 일본과 한국이라는 국가 간 문화와 복지 시스템의 차이는 있지만, 돌봄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관계적 측면에서 참고할 지점이 있다. 특히 부모가 치매를 겪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사실 당사자가 더 걱정할 테지만) 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준다.

반면 이미 치매 돌봄으로 난관에 봉착한 이들에게는 노부토모 나오코의 돌봄 경험이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가 천진하다는 말이 아니라, 치매라는 질병에 처한 각자의 사정이, 빈약한 복지 시스템 하에선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의 치매 돌봄 경험도 노부토모 나오코와 괴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계속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 책에서 소개되는 치매 겪는 엄마의 상황은 매우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만 치매가 발생한 이들 가족의 대처나 상황이 너무나 안정적이기에,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이 가정에선 청각의 쇠약 말고는 95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아버지가 엄마의 돌봄을 전담하고 나선다. 하지만 실상 이럴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되겠는가. "너는 네 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조력 덕에, 노무토모 나오코는 자신의 삶을 위협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에겐 큰 다행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딸에게 이런 아버지는 없다. 내 경험은 이렇게 괜찮지 않았고, 미디어에서 보도되거나 재현되는 치매 역시 이렇게 매끄럽지 않다(물론 치매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재현하는 것도 문제지만). 내 경험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불쾌함에도 책을 완독한 건, 줄곧 틈입하는 엄마 때문이었다. 경증의 치매 증상을 보이다 돌아가신 엄마가 노부토모 나오코의 엄마와 겹쳤다.

돌봄, '비탈에서 균형잡기'

아버지의 헌신으로 노부토모 가의 치매 돌봄은 '비탈에서 균형 잡기'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었다. 아버지와 가족 사랑에 대한 미담으로 흘러가던 기록에 균열이 난 건 후반부였다. 노부토모 나오코가 조심스럽고 고통스럽게 자신의 가면을 벗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지금의 엄마를 더는, 노력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못돼먹은 딸이다 싶겠지만 지금의 엄마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고백은 쓰라리지만 정제된 언어다. 정제되기 전 그의 소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악쓰는 비명에 가깝다. 그가 용기를 내 공개한 그날의 일기는 이렇다.
 
"어려서부터 엄마 바라기였고 늘 팔짱을 끼고 걸을 만큼 엄마와 사이가 좋았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엄마가 치매에 걸렸다. 당연히 처음에는 충격이었으나 전에 없던 언동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일상이 되었고 점차 엄마의 기행에도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기보다는 정나미가 떨어졌다. 진심으로 상대를 안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 안에서 엄마가 조금씩 죽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신이 엄마를 치매에 걸리게 해서 엄마가 세상을 떠나도 내가 많이 슬퍼하지 않도록 '평온하게 체념하는 죽음'을 준비해 줬다고 생각하고 있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혼돈의 고백에서 나는 비로소 그의 안정된 기록에 누락된 감정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선량하기만 한 돌봄은 거짓이다. 그의 고백이 없었다면, 돌봄으로 고통받았던 내 경험은 죄책감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타자화되지 않은 저자의 고백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정나미가 떨어"지는 그 경험은 나의 것이기도 했고, 노력하지 않으면 엄마와의 일상의 대화가 버거웠던 그 시간들 또한 내가 겪어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애써 돌보고도 죄책감으로만 얼룩져 있던 내 돌봄 경험이 내가 못돼먹은 딸이라서 생긴 불상사가 아니라고 얘기해 주는 듯했다.

엄마의 마지막을 돌본 경험을 쓴 권혁란은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에서 노쇠의 막바지에서 급격히 달라진 엄마에 당황해 이렇게 썼다.
 
"예뻐진다는 말과 잘 한다는 말. 시집을 보내준다는 말에 행복해하는 이 할머니가 내 엄마인 것이다....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말투까지 바꾼 엄마..."
 
변해버린 엄마만큼 혼란스러운 존재가 있을까. 치매에 걸리면 물론이지만 치매가 아니더라도 늙은 엄마는 달라진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리라 결심한 듯, 욕심쟁이 심술쟁이로 돌변한다. 아이로 돌아간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멋대로, 최대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볼 타이밍을 잡은 듯 원 없이 못돼지기도 한다.

노부토모 나오코, 권혁란, 그리고 나의 엄마처럼 일제 식민지와 전쟁의 참화를 겪은 세대들은 많은 고통과 억압 속에 살았다. "모든 사람이 죽기 직전에 욕을" 한다는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인용은 이들 세대가 겪은 억압 고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못다 한 한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도 살가운 자식들을 두는 것도 팔자 좋은 사람의 행운이었을 것이다. 먹고 사느라 바빠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는 본능도 메말라 갔을 테다.

내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쇠약해진 내 엄마가 퀭하지만 말간 얼굴로 나를 힐난하듯 바라보며, "나를 요양원에 버릴 거냐?"라고 물은 건 물음이 아니다. 자식의 배반을 앞서 배반함으로써 자식에게 가장 큰 형벌을 내리려는 복수다. 엄마에게 박탈된 삶에 대한 원한을 풀 대상이 딸이라는 식민지 외 달리 없었던 탓이다. 노부토모 나오코의 엄마가 툭하면 "쓸모 없어졌으니 죽어야지"라며 딸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도 실은, 이 좋은 세상에 멀쩡한 정신으로 더 살고 싶다는 억울함과 소망이 아니겠는가.

종종 '곱게 늙으라'고 훈계하거나, '곱게 늙어야지' 다짐하는 소리를 듣곤 하는데, 모두 이상한 말이다. 치매로, 인지저하로, 노쇠로 덜그럭거리는 몸으로, 대체 무슨 방도로 곱기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실은 곱게 늙어야만 봐주겠다는 엄포다. 늙어 고울 수 없는 몸이 되어 '죽고 싶다'는 것은 곱지 않은 몸이 당할 차별이 서러워서다.

돌봄, 모두의 책임

노부토모 나오코가 엄마 치매 돌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정정한 아버지를 둔 행운이지만, 외동딸인 그가 아버지의 쇠약과 죽음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는 그의 자부심처럼 "제일 건강한 95세"지만, 영원히 건강한 사람은 없다. 그도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노쇠를 돌보는 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간병은 부모가 목숨 걸고 해주는 마지막 육아다.' 나는 이 말이 무서웠다. 나는 이런 육아를 원하지 않고 내 딸이 이런 육아에 놓이는 것도 끔찍하게 싫다. 물론 이 말은 돌봄의 과정에서 자식이 더 나은 인격체로 성장한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지만, 나는 이 말에 깔린 전제에 분노한다.

이 말에는 부모 간병을 자식이 인륜으로 해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가족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육아 당사자는 딸(여성)이라는 강한 젠더 편향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부토모 나오코, 권혁란, 그리고 나, 모두 돌봄으로 고통받은 개인이지만, 모두 딸이고 여자다.

나는 딸에게 '치매니까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왜 (비혼)딸이 노후대책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오직 딸(자식, 가족)에게 돌봄을 부과하는 세상에 반대한다. 내 돌봄을 어딘가에 부탁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공동체여야 한다. 우리 사회는 돌봄이 정의롭게 분배되는 일에 적극적인 고민에 나서야 한다. 딸(자식, 가족)은 잘못이 없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됩니다.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노부토모 나오코 (지은이), 최윤영 (옮긴이),
시공사, 2021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치매 #부모 돌봄 #간병 #돌봄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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