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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출신 1호 '대통령'은 이 사람, 그의 특별한 과거

[검찰실록②] 의병 논고 거부했던 홍진... 평생 독립운동한 그의 취임사 일성은 '통합'

등록 2022.08.15 16:47수정 2022.08.1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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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유례가 없는 '검찰공화국'이 만들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검찰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역사의 질곡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과거의 기록, 그리고 '서초동'에는 어떤 역사가 담겨 있을까. 그 이야기들로 오늘의 검찰을 들여다본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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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출신 대통령(국무령) 홍진 선생 ⓒ 자료사진

 
홍진. 

우리 역사상 최초의 검사 출신 1호 '대통령(임시정부 국무령)'이다. 

보훈처 공훈 기록에 따르면 홍진 선생은 1877년 8월 서울 서소문 명문가인 풍산홍씨 집안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느 이름난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듯, 홍진 선생 역시 위기를 기회로 바꿔내며 성장했다. 스물두 살 나이인 1898년에 법관양성소를 졸업한다. 법관양성소는 고종 32년인 1895년 11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우리 역사 최초 근대적 법관양성 교육기관이다. 홍진 선생의 선배가 헤이그특사로 유명한 대한민국 1호 검사 이준 열사다.

"일제에 저항한 의병에 대한 논고 거부한 검사"

홍진 선생은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뒤 한성평리원 주사직을 거쳐 1899년 평리원 판사가 됐다. 1905년부터는 충주재판소 검사로 전보돼 근무했다. 1908년 선생은 검사직을 사직한다. '죄수 석방에 착오가 많다'는 이유로 법부로부터 받은 견책 때문이다.

당시 충주는 구한말 의병활동이 집중됐던 지역 중 한 곳이다. 선생은 검사로서 의도적으로 의병들의 죄를 감해 기소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공훈록에도 "홍진은 검사직에 있으면서도 일제에 저항한 의병에 대한 '논고'를 거부한 사실이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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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 2년(1908), 검사 홍진을 변호사로 인가한다는 문서. ⓒ 자료사진

 
1908년 선생은 검사직을 사임하고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가 된다. 이때부터 검사로서 하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법적지원을 변호사로서 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1908년 융희(순종황제) 2년 5월 29일 전 검사 홍면희(홍진 옛 이름)를 변호사로 인가한다'는 내용의 법부대신 조중응 명의 인가장이 전해지고 있다.

1919년 일제강점기 민족 최대 항거인 3.1운동이 발발하자 선생의 기조는 '지원'에서 '직접 투쟁'으로 바뀐다. 대표적인 것이 충무공의 9대손이자 기독교 목사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규갑 등과 함께 '한성정부'를 수립한 일. 1919년 4월 2일 선생의 주도로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해 '한성정부'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로 결의한다.

같은 시기 중국 상하이에서도 3.1운동의 뜻을 이어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선생은 상하이에서 '임정이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4월 중순 중국으로 건너간다. 이때 선생은 압록강을 건너며 자신의 원래 이름인 '홍면희'를 버리고 '홍진'이란 이름을 택한다. 선생이 삼은 '진(震)'자는 '벼락'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다. 

'이승만' 믿고 임정 분열을 막고자 했으나...

상하이에 온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돼 활동하기 시작한다. 1919년 5월 2일 열린 제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낸다. 당장의 시급한 현안인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언급하며 '독립공채 발행 및 독립의연금 수합, 세금 징수' 등을 제안해 실시케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전문 분야인 법조경력을 바탕으로 1919년 7월부터 임시의정원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돼 활약했다. 

선생은 3.1운동 이후 상하이와 한성, 노령(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각각의 임시정부가 통합되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 특히 통합정부의 임시헌법을 마련하는 데 주도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래는 1919년 9월 11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법 중 개정안 중 일부다. 대한민국 임시헌법은 총 8장 58조의 내용으로 구성됐다. 

제1장 총령
제1조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한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있다.
제3조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대한제국)의 판도로 한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일체 평등하다.
제5조 대한민국의 입법권은 의정원이, 행정권은 국무원이, 사법권은 법원이 행사한다.
제6조 대한민국의 주권행사는 헌법규범 내에서 임시 대통령에게 전임한다.
제7조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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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28일 상해 교민단 주최로 열린 이승만 대통령 환영회 사진. ⓒ 위키피디아

 
하지만 임시정부는 곧 무정부 상태에 빠진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됐지만 임시정부 정부 수립 1년이 넘도록 상하이에 부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통치 청원'을 한 사실까지 알려져 논란은 더 거세게 일었다. 1920년 12월, 뒤늦게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했지만 임정 요인 사이의 갈등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승만은 1921년 미국으로 돌아간다.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대혼돈 상태에 봉착했다.

임정이 무정부 상태가 됐음에도 홍진 선생은 임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에서 미국·영국·일본·중국 등 9개국이 참여하는 '워싱턴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당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독립 승인이 될 수 있도록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다한다. '선전'이란 잡지도 발행해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는 지사들에게 일치된 행동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큰 기대를 안고 워싱턴에 도착한 대표단(대표 이승만)은 회담에 발도 걸치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만다. 

임정은 파국의 길로 접어들었고 선생 역시 1924년 4월 임정 법무총장직(1922년 9월 선임)을 끝으로 중국 장쑤성 전장시에 은거했다.

국무령 된 홍진 "분열은 죄악" 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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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중국 충칭에서 찍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제34회 회의 개원식 기념사진. 첫째줄 가운데 백범 김구 바로 옆에 앉은 안경 쓴 사람이 홍진 선생이다. ⓒ 자료사진

 
바닥을 치면 다시 뛰어오르는 법, 이승만은 1925년 3월 탄핵됐다.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에는 "이승만은 7년 동안 취임 선서도, 행정도 맡지 않았으며, 각료들과 다툼을 벌였다. 구미위원부를 세워 국무원과 다투고, 마음대로 법령을 발표하여 혼란을 일으켰다. 임시의정원을 무시하고, 대통령 자리를 황제로 인식하면서 이를 평생 직업으로 여겨 민주주의를 말살했다"라고 적시됐다. 

바로 이어 2대 임시대통령으로 박은식이 취임한다. 박은식 체제의 임정은 곧바로 내각책임제 정부 형태인 국무령제 개헌안을 발의해 통과시킨다. 개정헌법이 발효된 1925년 7월 7일 박은식은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국인'을 전하고 물러난다. 개정헌법에 따른 초대 국무령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상룡이 당선됐다.

하지만 임정의 혼란은 멈추지 않았다. 이상룡은 1926년 2월 국무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 만주로 돌아갔고, 양기탁과 안창호가 국무령으로 선출됐지만 내부 반대 등의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이를 수습한 것이 검사 출신 홍진이다. 홍진은 1926년 7월 8일 대한민국 4대 국무령으로 취임한다.

선생은 내각 인선을 마친 뒤 1926년 9월 27일 정국의 정상화와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시정 방침 3대 강령>을 발표하며 "분열은 죄악"임을 재차 강조했다. 선생이 전한 뜻은 결국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이어진다. 선생은 자신의 뜻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1926년 12월 국무령을 사퇴한 뒤 현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945년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된 모습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1945년 12월 2일 중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온다.

고향땅에 돌아오지만 이내 큰 시련을 맞는다. 귀국 직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된 것. 선생은 반탁운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선생은 이듬해인 1946년 2월 전국적 반탁운동 단체인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선생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탁활동을 전개하던 중인 1946년 9월 9일 69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선생은 현재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소 최상단에 잠들어 있다. 그의 곁에는 국무령 출신 이상룡과 양기탁, 임정 2대 대통령 박은식도 함께 누워있다. 1996년 9월 우리 정부는 '국무령 홍진 선생'을 "좌·우익단체를 묶는 '민족유일당' 건설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내부 갈등 수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다. 

실제 '대통령'으로서 그의 취임 일성은 통합이었다. 

"죄악 중 가장 큰 죄악은 분열이고 공능(공적과 재능) 중 가장 큰 공능은 결합이다."

취임 후 그는 자신의 말대로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민족대당' 결성을 주장하며 정국을 주도한다. 결과적으로 같은 해 10월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가 조직되고, 이듬해인 1927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최대 규모 단체로 평가받는 신간회가 조직될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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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출신 대통령(국무령) 홍진 선생의 묘.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인묘역에 자리해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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