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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에 무너진 가족... 나를 키운 건 동네사람들이었다

[제주 4.3과 엄마 6] 기본 생존지식을 가르친 마을학교, 삶의 요령을 가르친 동네 어른들

등록 2022.08.13 18:41수정 2022.08.1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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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9일 제주4.3사건 희생자에 대한 국가차원의 보상 기준을 규정한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민간인 집단 희생 과거사 사건 중 법원 판결이 아닌 국회 입법으로 피해 보상을 해주는 사례는 제주4·3사건이 처음이다. 국가에 의한 폭력은 돈으로 모두 회복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제주에서 삶을 살아갔던 이들은 어떤 폭력의 순간들을 통과했는지 우리는 선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1940년에 태어나 1948년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지만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이다. 글은 엄마의 시점에서 서술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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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의 희생자들 제주4.3평화공원 내 기념관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4.3사건의 희생자들 모습(자료사진). ⓒ 김동이

 
당시 나의 10대는,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기에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친구들과 의미 없는 수다를 떨며 깔깔대며 흘러갔다. 학교는 문턱에도 갈 수 없었다. 하지만 배움은 지속됐다. 마을은 나의 놀이터이면서 곧 학교였다.

이호2동 오도롱은 옛날부터 선비촌이었고, 그래서인지 배움을 중시하는 교육적인 분위기가 강한 동네였다. 하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여전히 '여자를 굳이 교육시켜야 하느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학교에 다녔던 시간은 1948년 4.3 전후 1년도 채 안된다.

산에서 내려온 후에는 폐허가 된 마을에서 굶어죽지 않으려고 동동거리느라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도두에 국민학교가 있긴 했지만 낮에 부모를 도와 밭일을 해야 하는 여자 아이들 중에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이는 다섯도 되지 않았다. 젊은 층들 사이에서는 여자들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마을은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공회당에 공간을 마련했고, 마을에서 글자와 숫자를 알거나 중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돌아가면서 교사 역할을 했다.

무거운 짐 내려놓고... 배우고 놀았던 마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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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공회당 건물이 헐리고 새롭게 지어진 마을회관. ⓒ 김순애

 
처음 1~2년은,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중학교는 졸업한 김성수 선생이 학생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그 후에는 고등학교 다니는 이들이 당번을 정해서 가르쳤는데 주간에는 본인들도 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녀야 했고 저녁에는 부족하지만 성실한 선생으로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과서는 없이 그때 그때 선생들이 내용을 만들어서 가르쳤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보다 기껏해야 서너 살 위인 이들이었고 과목도 국어, 수학 정도였다.

당시에는 상고에 다니던 이들이 마을 학교 선생을 많이 했는데 수학을 가르치면서 주산을 함께 가르쳤다. 6년 정도 주산을 배웠는데 상고생들과 나란히 주산을 할 정도로 그 때는 꽤 잘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동네는 공동으로 비료 대금을 지불했는데 우리가 같이 주산으로 계산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주산을 하라고 하면 다 까먹어서 할 수가 없다.

당시 교사였던 김치종 선생은 방학 때 서울 친척집에 놀러가서 한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안타깝게 물에 빠져 죽었다. 김치종 선생의 시신이 동네에 오자 우리 학생들 모두 가서 3일 동안 시신 옆을 지키면서 꽃을 만들어 올렸다. 당시 여자들은 고등학교 교육까지 시키는 경우가 없다시피 했기에 마을 학교 선생 중에서도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선생들은 모두 남자, 학생들은 거의 여자였다.

열일곱에 육지에 일을 찾아 올라가기 전 2년 동안은 동네의 김욱림 선생에게서 천자문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김욱림 선생 역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고 기껏해야 우리보다 서너 살 많았지만 우리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진 지식을 나누면서 본인의 배움도 더 자극하기 위해 형의 집 방 한 칸을 내어서 천자문을 가르쳤다. 작은 방에 네다섯 명 정도가 모여 앉아 천자문을 반복해서 익혔다. 덕분에 신문에 나오는 한자는 다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자 실력도 한동안 쓰지 않다보니 다 녹이 슬어서 지금은 한자를 다시 읽으라고 해도 읽지를 못하겠다.
  
어느날 리서기를 맡고 있던 문자의 아버지가 시에서 보급한 '생활 개선책'이라는 책자를 집으로 가지고 왔다. 문자는 그 책을 아버지 몰래 가지고 와서 우리와 같이 펼쳐보았는데 그 책에는 남자와 여자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나와 있었다. 우리는 신기하면서도 창피하기도 하고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면서 그 책을 며칠 씩 돌려보았다. 그런데 그만 그 책을 김욱림선생에게 압수당해버렸다.

우리는 그날 내내 선생님 집 울타리에 서서 집안을 빼꼼이 훔쳐보며 선생님이 그 책을 펼쳐보며 어쩌나 걱정했다. 생리 등 여자의 성장과정이 그대로 나와 있는 그 책을 봤다는 사실을 들킨 것만으로도 창피했다. 담벼락에 서서 몰래 선생님의 동향을 살피면서, 혹시라도 선생님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선생님이 그 책을 보고 있구나' 생각하며 우리끼리 얼굴을 붉혔다.

4.3 이후 6년의 시간 동안, 낮에는 밭일을 하거나 산에 가서 나무를 했지만 밤이 되면 꾸벅 꾸벅 졸면서라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을 학교에 나갔다. 마을 학교는 친구들과 맘껏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공부 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 반이었다.

우리는 어쩌다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몇십원 돈을 모아서 '비가'(옛날 사탕)를 샀다. 그리고 우르르 동네 언덕 아래 몰려가서 서로 나눠먹기도 하고 때로는 추운 겨울 날 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옷을 뒤집어쓰고 그 사탕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10대 시절을 그나마 제 나이답게 누렸던 시간과 공간이었다.

수다 떨며 함께 배운 천자문... 나무하기·농사짓기 가르쳐 줬던 동네 어른들

낮에는 밭에 가서 일하거나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면서 조금이라도 집에 돈을 보탰다. 가까운 산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가서 나무를 했고 한라산 입구인 어승생까지 갈 때는 동네 어른들과 함께 갔다. 아마도 동네에서 어른들과 가장 자주 어승생까지 나무하러 다닌 아이는 나일 것이다.

어른들 틈바구니에 껴서 야무지게 나무를 잘한 날은 한 짐 가득 지고 올 수 있었지만, 잘 못한 날에는 초라한 양만 등에 지고 와야 했고 그런 날은 어른들이 내 등에 나무 하나씩 내 짐에 보태줘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어른들은 산에서 구해온 나무들을 도두 오일장이나 시내 장에 가서 팔았지만 내가 마련한 나무들은 집에서 땔감으로 사용하기에도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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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공설시장 화장실 타일벽에 새겨진 1950년대 나무시장의 모습 ⓒ 김순애

 
한 해는 조 씨앗을 구해서 밭에다 뿌렸는데 이상하게 싹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밭을 보면서 안타까운 한숨을 쉬더니 조 묘종을 하나 둘 가져다주었고 나는 동생들과 함께 그것을 정성들여 밭에다 심었다. 동네사람들은 나와 동생들이 밭일을 참 성실하고 야무지게 한다고 칭찬하면서 이런 저런 농사 요령을 알려주었고 어른들의 칭찬에 맏이로서 뿌듯함을 느끼면서 어른들의 말을 잘 따라했다.

당시엔 수도가 없던 시절이어서 밭에 땅이 마르면 걸어서 덕지물까지 가서 허벅에 물을 길어다가 물을 주어야 했다. 마른 땅에 시들시들하던 조는 정성을 들여 허벅에 물을 길어다 땅을 적신 끝에 푸르게 다 살아났다. 그리고 두 섬 정도의 좁쌀을 수확했다.

그 당시에는 도두, 외도 등 큰 동네에는 웬만하면 5일마다 오일장이 섰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청집 할아버지(청은 제주어로 꿀의 의미인데 양봉하는 분이어서 청집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여졌다)가 토마토를 수확하면 그것을 조금 사서 바구니에 담아 등에 지고 친구들과 같이 오일장에 가서 그것을 팔기 위해 좌판을 벌였다.

친구 경자는 가지고 간 토마토를 흥정을 하며 다 팔아치우는데, 이상하게 내 것은 하나도 팔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가 열무씨를 해서 밭에 뿌리면 그것을 힘겹게 호미로 파서 수확한 후 역시 오일장에 가서 내다 팔아도 내 것을 사는 손님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장사수완이 없었고 그 때 '나는 장사를 해서 먹고 살 팔자는 아닌가보다' 생각했다.

마을 어른, 영화 어머니에게 배우다 

당시 내가 크게 의지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 이는 마을 어른이면서 친척인 영화 어머니였다. 영화어머니는 참으로 용기와 결단력, 추진력을 두루 갖춘 여성이었다. 4.3 이후 남편이 육지수용소로 끌려가고 수용소에서 병에 걸려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과감히 땅을 팔고 혼자 육지로 올라가 남편의 시체를 제주에 데려와 장례식을 치룰 수 있었다. 당시 육지 수용소에서 죽은 이들이 많았고 그들을 데리고 오려 땅을 판 이들이 많았지만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서 6.25 등으로 육지 땅 조차 밟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영화 어머니네 집에는 아들인 영화와 나보다 나이가 한두살 어린 딸 둘이 있었는데, 그들 부모는 과감히 딸 둘을 보육원에 보내고는 아들의 교육에 매달렸다. 당시에는 그 집이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삼촌이라고는 했지만, 속으로 '어떻게 부모가 저럴 수 있나? 자식들을 데리고 잘 키워야지. 어떻게 보육원에 보낼 수 있나?' 생각이 들었다. 동네는 유교적인 분위기가 강했고 그 집 말고는 보육원에 보낸 집이 없었기에 동네에서도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철이 들자 현명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식 셋을 데리고 있어봐야 모두 제대로 먹이고 교육을 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집에서 마르느니 보육원에서 제대로 먹고 교육까지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선택하는 것이 모두에게 맞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보육원에 간 그 딸 둘은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다 마친 후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그들의 깊은 속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영화와 여동생들은 스스럼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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