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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말하는 의와 불의의 싸움은 어디로

[리뷰] 영화 <한산: 용의 출현>

22.08.01 15:55최종업데이트22.08.0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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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간이 만들어낸 최악의 재앙이다. 인근의 땅과 사람들을 초토화하는 전쟁이 발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내부에서 감당할 수 없는 소요,를 바깥으로 돌리거나, 지도부의 탐욕 때문이다. 2차대전의 히틀러가 그러했고, 임진왜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러했다. 허버트 후버가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늙은이지만, 싸우다 죽는 이들은 젊은이'라고 지적한 것을 곱씹어 본다면, 전쟁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누군가에게 비극을 낳고야 마는 불의의 지옥도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는 영웅이 탄생한다.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영웅이 불의에 맞서 싸워 무고한 생명을 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와 같은 영상 매체로 접했을 때의 시각적·청각적 효과는 때론 처절함을 안겨주기도 하고, 때론 통쾌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지난 6월 22일 개봉하여, 흥행 신화를 써 내려가는 <탑건: 매버릭>도 그런 점에서 평단과 관객들의 극찬을 받고 있다. CG 대신 직접 전투기에 탑승하여 촬영한 사실성 덕분에 박진감 넘치고 화려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해전 하나만으로 볼만한 영화
 
<탑건>도 물론 탁월한 전쟁 영화이지만, <한산: 용의 출현>도 훌륭한 차별성을 갖추고 있다. 전투기 액션은 서로의 뒤를 잡는 일대일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퓨리>와 같은 전차 액션도 주포 하나에 표적 하나씩만 공격하는 반면, 「한산」은 둘러싸인 일대다 형국에서 이를 박살 내는, 마치 아이언맨과 토르를 떠올리게 하는 통쾌함이 독보적이다. 그리고 전작 <명량>의 함포전에서 진일보한 거북선이라는 존재도 돋보인다. <한산>은 함포전, 도선을 통한 백병전, 거북선을 통한 충각 등 다양한 전투를 담은 종합선물세트이다.
 
두 번째로 좋았던 점은 적장으로 등장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선명한 캐릭터 서사이다. 영화는 후반의 한산 대첩 하나만을 위해 질주하는 구조인데, 그 과정에서 와키자카의 심도 있는 캐릭터 구축 덕분에 이를 상대하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도 빛날 수 있었다. 와키자카는 다케다 신겐이 도쿠가와의 학익진을 일점돌파로 깨부순 미카타가하라 전투를 학습했고, 이를 바탕으로 용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연전연승하는 이순신의 학익진을 상대로도 성공하여 명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욕을 지켜보며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조선 수군 역시 사천 해전에서 약점을 노출한 거북선을 어떻게 개량할 수 있을지 나대용을 통해 드러내고,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학익진을 펼치는 애로사항을 훈련 장면으로 보여주는 등, 관객 모두가 한산 대첩의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영화의 절정인 한산 대첩에서도 첩보전을 통해 서로를 간파하고 있는 양측이 왜 견내량을 전장으로 삼았고,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당위를 친절히 설명해주었으며, 평저선인 판옥선과 달리 첨저선인 왜선이 암초에 부딪히는 등 섬세한 묘사들이 전작보다 일취월장했다.
 
희미한 주제의식, 의와 불의의 싸움
 
<탑건>의 주제는 '베테랑의 분투'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인기의 대세를 거스르고 다크스타 비행을 강행하던 오프닝, 퇴역의 압박 속에서 무단으로 훈련에 나선 매버릭, 최신 전투기가 아닌 구형 전투기로 임무를 완수하는 등 일관된 드라마가 마지막 전투 장면의 카타르시스를 더욱 극대화한 것이 열광의 원인이었다. 게다가 훈련보다 첩보전의 비중이 큰 <한산>과 달리, 긴 분량의 훈련을 통해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매버릭의 캐릭터가 살아나고, 동고동락하는 훈련생과 유대 등 전투 외 장면에서도 볼거리와 감동 요소가 충분했다.
 
그러나 <한산>은 이순신이 강조하는 '의와 불의의 싸움'이 무엇인지 모호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에 동조한 항왜 준사라는 캐릭터도 애매해졌다. 사천 해전에서 버림받은 자신과 달리 나대용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이순신에게 감동했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다분히 사적인 이유라 그렇게 설득력 있는 '대의'로 비치진 못했다. 선조가 함경도 대신 망명이 쉬운 의주로 파천을 하면서, 고군분투하며 승전을 알린 이순신 개인의 의로움이 더 강조될 수도 있었지만, 정작 영화의 주인공인 이순신의 캐릭터는 수동적이고 과묵하기만 해 답답해 보였다.
 
적어도 전작인 <명량>에서는 그게 촌스럽게 다가왔을지는 몰라도, 국가 대신 백성을 위해 싸우고 백성도 그런 이순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忠'이란 주제의식이 분명했다. 그러나 <한산>이 말하는 '의義'란 무엇이고 그것이 전작의 충과는 무엇이 다른지 더 뚜렷했다면 전투 장면 외에도 호평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와키자카 등 일본은 명이라는 최종 목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이처럼 '가도정명'이라는 터무니없는 명분을 강조하고 각 다이묘의 영지와 군공에 대한 탐욕이 더 분명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전작을 의식해 도전조차 포기한 영화
 
관객 수 1761만 명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전작 <명량>이 너무 신파극이었다는 비평을 의식한 탓인지, 감독이 지나치게 몸을 사렸다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다. 어차피 성웅 이순신이라는 존재는 클리셰 그 자체인데, 여기서 하나 더 얹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전작이 비판받았던 것은 클리셰의 사용법이 부적절했던 탓이지, 클리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충무공이 써낸 역사의 시작과 끝을 모를 수가 없기에, 감독은 이순신이 말하고자 한 의가 무엇인지 적극적이면서도 세련된 해석을 보여줬어야 했다.
 
물론, 류승완 감독이 <군함도>에서 반일 감정과 애국심을 부추기는 선전으로 대중의 반감을 산 반면, 차기작인 <모가디슈>를 통해 남북관계를 담백하게 그려내 반등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공이 얼마나 의롭지 않았는지는 명백한 사실이며, 영화에 그러한 역사를 고증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일본군의 잔악한 만행들과 이에 대항하여 거병한 의병들의 비중을 늘렸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준사의 캐릭터와 의라는 주제의식, 웅치 전투의 감동도 더 와닿았을 것이다.
 
기능적으로도 불필요한 캐릭터의 낭비
 
그렇다고 과유불급의 신파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전투 이후 언덕에서 정보름이 지켜보는 장면이나 황박의 전사 장면 등에서 상술했던 모호한 태도의 신파가 존재했다. 이 장면들이 불필요했단 것이 아니라 빌드업이 부족해 세련되지 않았단 뜻이다. 기생으로 잠입해 첩보전에 기여한 정보름의 경우, 별 중요한 대목도 아닌데 일본군 작전 회의 때마다 쓸데없는 클로즈업이 반복돼 몰입을 깼으며, 의미심장하게 다룬 것과 달리 정보름과 준사가 전해준 첩보는 전략 등 전투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해 존재의의에 의문이 들었다. 더군다나, 임준영은 준사와 정보름이 첩보를 대신 전해준 덕분에 전작과의 연결성, 오마주 외엔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일본군 첩자들 역시 거북선의 설계도를 탈취하긴 했으나, 해당 첩보가 없었어도 대세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한산 대첩 이전에 영화 대부분을 차지한 첩보전의 비중과 이에 참여한 캐릭터는 사실상 낭비나 다름없던 셈이다. 실제로, 해당 분량들이 너무 지루했고, 전투 장면 덕에 참고 봤다는 의견이 많았다. 차라리, 앞서 지적했듯이 「탑건」처럼 사전 준비를 늘려 이순신 캐릭터 및 부하와의 유대 강화를 노리고, 준사는 마지막 깃발처럼 '의義'를 대표하여 더 활발한 의병 활동을 보여주며, 정보름과 임준영은 좌수영과 의병 간의 부족한 연계성을 강화해주는 한편, 일본군 첩자들은 일본군의 불의를 상징하는 모습을 대비해서 보여줬으면 싶었다. 나아가, 화망 속에서 희생하는 거북선, 유인책에 자원한 어영담, 이운룡의 살신성인을 강조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주인공이 이순신인지, 거북선인지
 
상기한 바대로 이순신 캐릭터가 너무 소극적이라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헤어질 결심」의 대사처럼 박해일이 워낙 꼿꼿한 인상이라서 그가 맡은 이순신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었지만, 원균 등이 공세와 수세를 가지고 갑론을박을 벌일 때나 나대용과 거북선을 어떻게 보완할지 모색할 때, 견내량으로 출정할지 여부 등을 논할 때 등 이순신은 묵묵히 듣거나 최소한의 말만 하는 등 어떤 캐릭터인지 매력·리더십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다른 캐릭터까지 죽이는 악순환을 낳았고, 빈약한 주제의식과 함께 관객들의 감동도 줄어들었다.
 
준사에게 의란 무엇인지 강한 울림으로 설득했으면 영화의 주제의식도 살아났을 것이며, 전주성 대신 좌수영을 공격한다는 첩보를 통해 전라도를 방어하는 의병과 연계를 확대하는 등 모습을 보여줬다면 앞서 지적한 첩보전의 존재의의도 확보됐을 것이다. 게다가 '압도적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마지막 통제영의 모습을 얼핏 보여주는 등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야욕을 꺾겠다는 의미겠지만 너무 막연하게 느껴져, 이순신의 목표의식과 그에 대한 절박함이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전라도 방어의 의의를 강조했어야만 했다.
 
영화에 기대하는 것은 감독만의 주관
 
외적을 무찔러 삼한일통을 이루어내고 통일신라를 개막한 문무왕은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고자 동해 바다 대왕암에 장사를 지냈다. 신라는 예로부터 왜구의 침입에 시달렸기 때문에 죽어서도 이를 경계한 듯싶다. 그리고 문무왕의 맏아들인 신문왕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감은사를 지었고, 그때 나타난 용이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만파식적이란 피리를 전해주어 대대로 국보로 삼았다. 물론, 용이 나타나 보물을 주었다는 설화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후대인들이 마치 훗날의 이순신처럼, 살아서는 외적을 물리치고 죽어서도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 문무왕의 유지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그의 염원을 설화로 재해석한 것일 터이다.
 
내가 창작극을 감상할 때 가장 주목하는 것은 창작자만의 특별하고 설득력 있는 해석의 여부이다. 특히,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를 기반으로 한 창작극은 실제 역사에 기반한 창작자의 주관이 담기지 않는다면 굳이 볼 유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덩케르크>나 <모가디슈>처럼 담백하게 그려내는 것이 의도였다 하더라도, 불필요한 장면이나 캐릭터가 너무 많았다. 즉, 마지막 전투 외에는 볼 가치가 없는 영화로 전락할 수 있다. 감독이 새롭게 해석한 이순신은 어떠했고, 감독이 말하고자 한 '의義'란 무엇이었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최종장인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미 작년 상반기 촬영을 마치고 내년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감독이 전작 <명량>에서 지적당한 과잉된 신파를 차기작 <한산>에서 절제했듯이, <노량>에서는 전작의 충과 의와 구분되는 뚜렷한 주제의식과 이를 주변 인물과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생동감 있는 이순신 캐릭터로 개선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성웅 이순신의 장렬한 최후가 더욱 벅차오르는 비통함으로 전해질 것이며, 3부작은 우리의 가슴 깊이 명작으로 기억되리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호중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영화 리뷰 한산 이순신 김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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