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매달 아파트 3채값이 두 손에... 화교도 뛰어든 의외의 사업

'시민의 발' 운수사업에 참여한 인천 화교... 기업화되며 역사 속으로

등록 2022.07.25 14:03수정 2022.07.25 14:03
0
원고료로 응원
a

1964년 인천화교학교 앨범에는 ‘화교경영지교통사업’ 광고 실려있다. 이 앨범 광고를 통해 인천의 화교들이 버스 사업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 아이-뷰

 
인천 화교들의 옛 이야기를 발굴하다 보면 인천의 근현대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인천의 변화와 발전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화교들도 사회에 뿌리내리려 다양한 현장에서 일했기에, 그들의 모습은 인천의 시간 속에 켜켜이 숨어있다 나타난다. 과거 기록에서 발견된 화교들의 운수사업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박사업이었던 버스, 식당·농사짓던 화교들 참여


인천시민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사업에 인천 화교들이 참여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1960년 초부터 1979년까지 인천 버스사업에 뛰어든 것.

1964년 인천화교학교인 중산학교 졸업앨범에는 화교들이 교통사업을 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광고가 실렸다. '화교경영지교통사업(華僑經營之交通事業)'이라는 제목과 함께 당시 화교들이 운영했던 마이크로버스 사진과 이 사업을 이끌었던 화교 대표들의 이름이 있다. 장후상(張厚祥), 사영발(沙永發), 하덕재(夏德才), 왕소해(王昭楷), 유택민(劉澤民) 등이다.

운수업은 당시 '대박'사업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소문이 나면서, 농사를 짓거나 식당을 하던 인천 화교들이 너도나도 참여했다.

1950년대 말 화교들이 처음 운수업으로 시작한 차는 5~6인승의 승합차였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마이크로버스로 바뀌었다. 버스에는 대략 25명 정도의 인원이 탑승할 수 있었다. 차량은 미군이 사용했던 군용트럭이나 중형차를 개조한 것으로, 전쟁이 끝난 뒤 쏟아져 나온 차들을 받아 망치로 두드리고 펴서 만들었다.
 
a

화교 성복수는 중식당을 하면서 부업으로 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79년까지 꽤 오랜 기간 버스사업에 종사했다. ⓒ 아이-뷰

 
화교 성원정(盛元正, 70)의 아버지 성복수(盛福綬)도 화교 유택민과 승합차 동업을 하면서 운수사업에 뛰어들었다. 성원정은 중학생이 되기 전부터 아버지가 버스사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1960년대 초중반이다. 성복수는 1979년까지 꽤 오랜기간 버스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중식당을 운영하면서 부업으로 차 사업을 했다고 전해진다.

성복수는 유택민과 동업을 끝낸 뒤 1960년대 초 마이크로버스 1대를 사서 버스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차량번호는 28-18번이었다. 같이 버스사업을 했던 화교 장후상의 차량번호는 28-48, 49번이었다고 화교 성원정은 기억했다.


당시 버스사업에 참여했던 화교들은 대부분 중고차를 매입한 뒤 인천 최초 버스회사였던 항도교통(港都交通)에 지입버스(운수회사에 개인 차량을 등록해 일감을 받아 보수를 받는 형식)로 들어갔다. 항도교통에는 지입비만 냈고, 버스운전사와 차장을 고용해 이들의 월급 지급은 차주의 몫이었다. 지금하고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었다.
 
a

1960년대만해도 인천은 규모가 작았기에 지금처럼 버스노선이 많지 않았다. 약 10개 정도의 시내버스 노선이 있었다고 한다. ⓒ 아이-뷰

 
1960년대만 해도 인천은 규모가 작았기에 지금처럼 버스 노선이 많지 않았다. 약 10개 정도의 시내버스 노선이 있었다고 한다. 노선은 고정이 아니었기에 매주 월요일마다 바뀌었다. 항도교통은 1201~1294번까지 총 94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중반 인천 버스비는 35원이었고 한다.

화교 성복수가 작은 마이크로버스에서 대형버스로 차를 교체한 시기는 1974년경이다. 차량번호는 1252번이었다. 성복수는 새 차를 280만 원에 주고샀는데 이 값은 당시 이층집 한 채를 살 정도의 큰 금액이었다.

버스사업으로 가족 뒷바라지... 1979년 차 팔고 사업 접어

성복수의 아들 성원정은 1975~1977년까지 아버지가 운영했던 버스에서 '조과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차량정비·인력 관리를 했다. 조과장의 뜻은 운전기사의 조수에다 과장이라는 직함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조과장의 업무는 안내양이 나오기 전 첫차를 타는 승객들에게 요금을 받거나, 하루 일과를 마친 차량의 청소와 고장난 차량 정비였다.
 
a

성복수의 아들 성원정씨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버스에서 조과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버스 운전사 밑에 조수가 있었는데 조수에다 과장이라는 직함을 붙여 '조과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 아이-뷰

 
성원정은 아버지의 버스사업으로 동생들 대학공부를 다 시킬 수 있었다고 전한다. 버스사업이 가족에게 큰 힘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의 가족이 버스사업을 접은 것은 1979년이다. 차는 항도교통에 판 뒤 차 사업을 그만두었다. 운수사업이 기업형으로 바뀌면서 개인이 버스를 운영하기엔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화교 유영성(劉榮盛, 55)의 아버지 유택민도 처음엔 동업형태로 운수업을 했다. 유택민(劉澤民)은 미군이 남긴 덤프트럭으로 월미도문화의 거리 조성사업에 뛰어들었다. 덤프트럭으로 흙과 돌멩이를 실어 나르면서 월미도에 길을 내는 데 참여했다.

유택민은 다른 화교들보다 빨리 차 사업에 눈을 떴다. 그는 삼발이차를 개조해 승합차로 만들어 운영한 경력도 있으며, 화교 교통사업체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유영성은 아버지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버스의 차량번호는 1287번이었다. 유택민은 승합차, 버스, 덤프트럭 사업으로 돈을 잘 벌었다. 누구나 버스를 타는 시대였기에 버스는 승객들로 항상 만원이었다. 당시 인천의 아파트 한 채가 200만 원이었는데 월 600만 원~1천만 원 현금 수입이 들어왔다고 한다.
 
a

화교 유택민도 오랫동안 버스사업을 했다. 유택민은 승합차, 버스, 덤프트럭 사업으로 돈을 잘 벌었다. 유택민의 아들 유영성은 아버지의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고 아버지의 버스사업은 끝이 좋지 않았다고 말한다. ⓒ 아이-뷰

 
유택민은 오랫동안 버스사업을 했지만 끝이 좋지는 않았다. 아들 유영성에 따르면, 아버지 유택민은 버스 사업권을 놓고 항도교통과 재판을 벌였으나 패소했다. 당시 외국인들은 사업자를 낼 수 없었기에 화교들이 투자를 하고 한국인 명의로 사업자등록을 냈는데, 이런 권리를 인정 못받아 사업체를 빼앗겼다는 게 유영성의 주장이다. 아버지는 재판에 진 뒤 뇌출혈로 쓰러져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하다 작고했다.

유택민은 처음엔 고량주공장에서 일해 돈을 모은 뒤, 버스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유택민 가족은 재판에 진 뒤 먹고살기 위해 1970~1972년경 신흥동에 '신동양'이라는 중식당을 차렸다. 현재도 운영 중이다. 신동양 자리는 차 사업을 할 당시 버스나 덤프트럭을 수리하던 창고였다.
 
a

1960년대 인천화교들의 버스사업은 항도교통에 지입버스로 들어가 회사에 지입비를 내고 나머지 이익금은 차주가 가져가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 아이-뷰

 
1960년대 화교들에게 운수사업은 가장 '핫한' 아이템이었다. 당시 화교들은 버스를 하면 돈을 잘 번다는 주변인들의 말을 듣고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인천화교협회 회장을 지낸 필명안(畢明安) 고문은 "우리 매형도 1963~1967년까지 버스사업을 했는데 중간에 운영하는 게 힘드니까 버스를 팔고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곡창신 인천화교학교 이사장의 아버지도 버스사업에 참여했다. 곡 이사장의 아버지는 1965년부터 7~8년간 버스사업을 하다 대형버스가 나온다는 소식에 버스를 회사에 팔고 사업을 접었다. 차는 밑지고 팔았다고 한다.

1964년 중산학교 앨범에 화교경영지교통사업의 경리로 이름을 올린 하덕재(夏德才)도 서울화교협회 총무로 일하면서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운수업을 했다. 그는 퇴근한 뒤 버스회사에 가서 그날그날 금액을 정산했다. 그는 4~5년간 버스사업을 했다. 대다수의 화교들이 식당이나 농사를 하면서 부업으로 운수 사업을 했던 셈이다.
 
a

1970년대 인천버스 ⓒ 아이-뷰

 
버스사업이 기업화되면서 지입버스 팔아

화교들의 버스사업은 개인사업이었다. 버스는 항도교통에 지입제로 운영됐기에 지입비만 회사에 냈고 나머지 운전기사, 차장의 월급, 차수리 등은 차주의 몫이었다. 그만큼 사업주의 차량관리가 중요했다.

버스사업은 초창기엔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금이 바로바로 들어오고 안내양과 버스기사의 임금도 쌌기 때문에 사업성이 좋았다. 하지만 당시는 보험제도가 잘 돼 있지도 않았고, 차들도 오래돼서 고장이 잦았다. 점점 세금도 늘었다. 각종 차량수리, 검사비로 들어가는 비용도 많아지면서 빚만 지고 버스에서 손을 터는 화교들이 많아졌다. 버스사업은 빛 좋은 개살구처럼 앞에서는 남고 뒤에서는 빚지는 사업이 됐다.

또 버스사업은 사회가 체계화되면서 예전처럼 개인이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항도교통도 버스사업이 기업화되고 공동관리방식으로 바뀌면서 더는 화교 개인들이 차를 운영하고 굴릴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화교들은 버스사업에서 손을 뗐다. 다만 화교 성복수와 유택민만이 1970년대 중후반까지 버스사업을 계속했다.

화교들의 운수업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화교학교 앨범에 실린 광고만이 그 역사를 알리고 있다.
 
a

1980년대 버스 사진 ⓒ 아이-뷰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인천시 제공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인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는 시민의 알권리와 다양한 정보제공을 위해 발행하며 시민을 대표해서 객원·시민기자들이 콘텐츠 발굴과 신문제작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제작된 신문은 뉴스레터로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4. 4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5. 5 김종인 "윤 대통령 경제에 문외한...민생 파탄나면 정권은 붕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