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경주 '낭산'에 가지 않고도 산을 제대로 느끼는 법

[고도를 찾아가다 2-3] 운민의 경주별곡

등록 2022.07.13 12:05수정 2022.07.13 12:30
0
원고료로 응원
a

십일면관음보살 낭산은 고대부터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 일대에는 많은 수의 사찰과 불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빌기 위해 모여들었다. ⓒ 운민


천년고도 서라벌을 감싸고 있는 5개의 신령스러운 산이 있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리하고 있는 토함산, 불교를 신라에 전래한 이차돈의 일화가 담겨있는 소금강산, 김유신과 태종 무열왕을 품고 있는 선도산, 그리고 골짜기마다 탑과 불상이 모셔져 있는 남산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 동남쪽에 위치한 나지막한 동산인 낭산에 대해 좀처럼 관심을 가지는 분은 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높이가 채 100미터도 안 되는 작은 동산에 경주의 다른 지역 그 이상으로 유적이 촘촘히 배치된 지역은 보기 드물다. 낭산과 관련된 사서의 기록도 풍부한 편이다.
 
a

낭산, 도리천 가는 길이 열리는 특별전시관 경주의 특별전시관에서는 9월 12일까지 낭산, 도리천 가는 길을 주제로 특별전을 하고 있다. ⓒ 운민


<삼국사기> 실성 이사금 12년(413)의 기록을 살펴보면 낭산에서 누각과 같은 형태의 구름이 일어났고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실성 이사금은 "이는 반드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이곳은 복스러운 땅이다"라고 하며, 낭산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했다고 하니 이때부터 이 산은 하나의 신앙의 대상이지 않았을까 싶다.

낭산의 정상부에 자리 잡은 선덕여왕릉을 비롯해, 사천왕사지, 황복사지, 능지탑, 중생사 등 다양한 문화유적은 물론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공예의 진수를 보여준다 평가받고 있다. 마침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9월 12일까지 "낭산, 도리천 가는 길"이란 주제로 야심 차게 준비한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a

사천왕사지 녹유 신장상 낭산의 초입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 신장상(복원품)은 이곳의 위엄과 화려함을 보여준다. ⓒ 운민


반월성, 황룡사 등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유적을 위주로 전시가 이어지곤 했는데 남산도 아닌 낭산을 주제로 특별전을 개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 국립박물관을 한때 문을 닫기도 했으며 한동안 제한된 인원만 입장해야만 했던 어려움이 있었다. 모두의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이 시기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낭산이 고대 신라인들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나당전쟁 같은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 부왕의 명복을 비는 등 신라인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낭산을 찾았다.


그런 연유로 이번 전시회에는 코로나 극복에 대한 소망도 담겨있다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낭산은 신라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산 이름의 유래조차 명확하지 않을 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총 3부로 특별전을 구성하고 있는데 1부 신들이 노닐던 세계에서는 사천왕사의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던 현실감 넘치는 묘사의 신장상을 살필 수 있다. 원래 낭산은 신라에서 중요한 국가제사를 지내는 등 토착 신앙의 성지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의 제사와 불교 의례의 공간으로 점차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낭산이 신성한 공간이라는 인식은 기록과 유물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다.     
 
a

문무왕비 낭산에서 출토된 문무왕비는 문무왕의 업적과 화장되어 동해에 뿌려졌던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료다. ⓒ 운민


2부 왕들이 잠든 세상으로 넘어가면 이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 왕릉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게 된다. 신라인이 도리천으로 여긴 낭산의 정상부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이 주변으로는 진평왕릉, 신문왕릉으로 알려진 왕릉들이 다수 분포한다. 왕릉의 주인이 실제로 누구인지 논란이 있으나 선덕여왕릉의 주인은 변함없이 선덕여왕이다.

2부의 인상적인 유물로는 문무왕릉비를 들 수 있겠다. 1796년 경주 주민이 밭을 갈다가 우연히 문무왕비를 발견했고, 20년 후 1817년 추사 김정희는 경주를 방문해 선덕여왕릉 아래의 낭산 남쪽 기슭에서 재차 확인해 이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비석에는 김 씨의 내력과 무열왕, 문무왕의 업적, 문무왕을 화장해 뼛가루를 바다에 뿌렸다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보통 왕릉 앞에 세워지는 왕릉비를 사천왕사 입구에 세워진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경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이므로 왕경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무왕의 업적과 의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세웠으리라 추정한다.
 
a

능지탑에서 출토된 석불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에서는 많은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그중 석불은 고려, 조선시대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를 통해 낭산일대가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운민


낭산 주위의 또 다른 절터인 황복사지에서 출토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도 이번 전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유물이다. 3부 소망과 포용의 공간에서는 호국의 상징이었던 사천왕사와 망덕사를 조명하고 중생사로 대표되는 소망의 공간에 대한 전시가 이어진다.

특히 낭산 서편에 위치한 능지탑은 오랜 기간 동안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분묘와 제단의 성격이 불교적 관념과 융합된 독특한 형식의 불탑이었다는 추론도 있다. 그 증거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능지탑에서 수습된 소조불이다.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은 석불에 비해 부서지기 쉬어 대부분 온전치 못한 상태로 출토되었지만 옷 주름이 선명히 남아있다.

필자는 이곳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로 능지탑의 석조불을 꼽는다. 조형미가 완벽한 다른 불상과 달리 앙증맞게 생긴 친근한 모습을 띄고 있다. 혹자는 제작연대를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로 추정하는 것으로 봐서 신라 이후에도 낭산이 지속적으로 불교신앙의 성지로 여겼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낭산에서 발견된 십일면관음보살, 약사불 등의 석불도 함께 살필 수 있다.


낭산은 이처럼 신라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경주를 지키는 진산으로 인식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낭산을 가로지르듯 동해남부선 철도를 부설했다. 얼마 전 낭산을 지속적으로 병들게 했던 철마는 멈추었고, 세간에 잊혔던 낭산이 다시금 우리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다시 경주로 찾아가 박물관에서 낭산 특별전을 보고 낭산에 산재해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경기별곡 2편)가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인문학 강연, 기고 문의 ugzm@naver.com
#경주 #경주여행 #운민 #고도를찾아서 #경주박물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 경기별곡2편>, 경기별곡 3편 저자. kbs, mbc, ebs 등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3. 3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