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말 한마디, 소낙비와 소나기의 경계에서

누군가에겐 시원함, 다른 누군가에겐 고단함

등록 2022.06.28 10:13수정 2022.06.2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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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된 모양이다. 굳은 땅에 물고랑이 생길 정도이니 때 이른 장마와도 같다. 혹여 기후변화의 징후라면 심상치 않다. 하지만 비 온 뒤 산사는 참 맑다. 깨끗함을 넘어 청량감마저 준다. 때마침 불어온 하늬바람은 산사의 즐거움을 더한다.


한여름에나 즐길법한 느낌이다. 이 해맑음은 1952년 발표된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 그려진 순애보와 같은 청초함을 비켜설 만큼 순수하다. 몇 호흡으로 받는 신선한 기운은 온몸을 깨끗하게 하고, 정신까지 맑게 한다.

산사의 즐거움이 아니라 자연과 가까이하는 이들이라면 먼저 느낄 수 있는 감상일 거다. 도회의 바쁜 일상과 다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혜택이다. 도시에서의 삶에 소나기는 비를 피하고, 우산을 챙겨야 하는 불청객쯤이다. 우리 속담에도 "소나기는 피하고 볼 일이다"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와 지시를 듣는 사람은 상급자의 소나기 같은 말을 피하는 것도 상책이다.

소나기는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강조한 우리말이다. 소낙비는 떨어지는 비의 모양새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표준어다. 1935년 김유정의 <소낙비>는 근대화 속 비애감을 실은 작품이고, 1930년 김동인의 장편소설 <젊은 그들>에도 소낙비가 표현됐다.

당나라 두보의 시를 번역한 <두시언해>와 최세진의 <훈몽자회>에는 심히 쏟아지는 폭우란 뜻의 쇠나기를 '동우(凍雨)'로 기록했다. 15~18세기 문헌들에 나오는 '쇠나기'는 오늘날 소나기로 변한 말이다. 갑자기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란 '급우(急雨)'와 번개·천둥·강풍 등 여러 가지를 동반하는 비란 뜻의 '백우(白雨)' 등으로 적었다.

가장 오래된 표현은 기원전 노자의 <도덕경>과 공자의 <가어>에 매우 세찬 빗줄기 또는 야생마가 달리듯 내리는 비인 '취우(驟雨)'라고 했다. 신라 최치원의 <계원필경>과 고려 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도 '취우'로 적었으나, 이색은 시 <목은시고>에서 "가을 더위에 쇠한 노인 지쳤는데, 서늘한 비가 한번 쏵 씻어 주누나"라며 소나기를 '동우'라 했다.


소나기는 <태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이의 <율곡전서> 등에 '취우'로, 18세기 말 윤선도의 <고산유고>에 차가운 비란 뜻의 '동우'라 적는 등 실록과 개인 문헌에 여러 가지로 기록됐다. 요즘에도 소나기가 표준어이고, 소낙비는 옛말 또는 사투리로 헷갈리지만 두 단어는 동의어로 표준말이다.

이런 말의 경계조차도 삶에서나 자연을 관조할 때 볼 수 있다. 소낙비와 소나기는 자연이나 인간에게 동전의 양면처럼 이로움과 해로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소낙비는 대지의 열기를 식히는 것은 물론, 메마른 논밭 농작물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윗사람의 소나기 말은 자기에겐 속이 시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씻을 수 없는 말갈퀴의 생채기를 남기곤 한다. 비록 도구를 쓰지 않더라도 잘못된 말 한마디는 어떤 비수보다 더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 안 될 일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성질대로 삶을 산다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아야 하고, 참으면서 수긍할 때에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엔, 어떤 이에게는 시원함을 주지만, 앞마당에 콩과 참깨를 펴놓은 농부에겐 맨발로 뛰어나가야 하는 갑작스런 일과가 생겨나는 고단함이 뒤따른다.

그래도 소나기는 무지개 아들딸을 품은 아름다움의 고향이다. 소낙비 내리는 날엔 잃어버린 나만의 무지개를 찾아 나서보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대한불교조계종 백령사 주지입니다.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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