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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적어낸 추석 소원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떠 올라 많은 이들의 소원 들어주었으면

등록 2021.09.18 17:15수정 2021.09.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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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날이 흐려 보름달을 보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바라는 것을 종이에 써 보자.(사진은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경궁 풍기대 주변에 설치된 대형 보름달 모형) ⓒ 연합뉴스

 
추석을 앞두고 추석 관련 주제를 한 가지 다뤄볼 요량으로 동학년 선생님들과 수업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보름달빛 아래 강강술래를 하며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던 선조들처럼 강강술래 그림을 꾸미고 보름달에 소원을 써넣어 보는 활동을 하기로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은 어떤 소원을 빌지 궁금했다.


"애들아,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추석날 밤에 하는 일이 있었어. 그게 뭔 줄 아니?"

아이들은 호기심에 찬 눈동자만 또로록 굴릴 뿐 선뜻 대답이 없었다. 답이라고 생각할만한 실낱같은 힌트라도 생기면 우선 손부터 들고 보는 우리 반 발표 쟁이 은정(가명)이가 잠잠하다면 모두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란 뜻이다.

"컴퓨터 게임...이요?"

어디선가 자신은 없지만 꼭 말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담은 말이 새어 나왔다. 푸핫! 컴퓨터 게임이라니,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이들의 대답은 하나도 허투루 대하면 안 된다. 가끔 엉뚱하다고 생각한 말이 대단한 창의력을 품은 답일 때가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자신의 관심사와 연결 짓는 아이들에게 컴퓨터 게임을 하는 조상이라면 꽤 친구 하고 싶은 대상일 것임은 분명하다.

보름달에게 소원을 빌었던 우리 조상들처럼 우리도 소원을 써 볼 거라고 했더니 한 아이가 말했다.


"그럼, 진짜 소원이 이루어져요?"

아직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믿음이 큰 아이들이다. 산타할아버지, 소원 인형, 이빨 요정과 같이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은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럼! 마음을 담아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담임 선생님의 확신에 찬 말에 환희(가명)의 얼굴에 희색이 돈다.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는 표시다. 그런데 어쩌니? 선생님은 너의 소원을 이미 알 것 같은데. 환희는 얼마 전, 자신이 만든 물건을 만지다 고장 낸 동생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린 이야기로 친구들에게 히트를 쳤었다. 동생(특히 장난이 심한 남동생)이 있는 다른 형, 누나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준 이야기라 친구들의 공감을 샀었다.

그래서인지, 환희는 틈만 나면 그 이야기를 또 우려먹고 싶어 했다. 분명 이번에도 그와 관련된 소원을 빌고 싶어 하는 거다.

"근데 달님은 다른 사람들을 응징하고 복수하는 소원은 안 들어주셔. 행복과 평화를 기원하는 소원만 들어주신대."

환희의 표정이 금세 실망스러워진다. 녀석은 분명, "동생에게 울트라 파워엔진을 100개 장착해 등짝 스매싱을 날리게 해 주세요" 류의 소원을 빌려고 했을 것이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원하는 소원을 모두 말해봐, 했어야 한다. 하지만 건너면 위험한 테두리를 정해주지 않으면 뒷수습이 곤란해지는 경험을 모르는 바 아닌 20년 차 교사는 재미를 줄이는 쪽으로 아이들을 소몰이하게 된다.

형의 입장이 그러하다면 동생도 할 말이 많다.

"누나가 제게 친절하게 말하게 해 주세요."

누나를 좋아하지만 자신을 귀찮아하는 누나에 대한 원망도 많은 기범(가명)이의 누나의 대한 양가감정은 늘 기범이의 이야기 소재다. 좋아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다칠 수 있는 장미의 가시를 가진 사람.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하면서도 멀리하지 못한다. 그 사람과 함께일 때 행복감이 크니 가시에 찔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코로나가 사라지게 해 주세요."

준호(가명)의 소원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다. 백신을 2차까지 맞으면 마음 놓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확진자 수는 오히려 훨씬 늘었고 거리두기는 여전하다. 이제 '위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자고 애써 위안 삼지만 여전히 모임과 여행이 제한적이라는 점은 아쉽다. 보고 싶을 때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요즘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는 가정이 부쩍 증가한 것을 보면 이미 각 가정에서는 코로나와 동반한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울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 반 울보 민지(가명)의 소원이다. 이 소원을 쓰기 전에도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울지 않게 해 달라고 써도 되냐고 묻던 민지. 1학기 내내 "~ 해도 되냐"는 민지의 질문에 "물론이지!"를 매번 외쳤건만, 민지에게는 여전히 해도 된다는 승인이 있어야 안심이 되나 보다. 

학기 초기엔 아직도 나와 라포 형성이 덜 된 것인가, 싶어 아쉽기도 했지만 민지는 그냥 그래야 마음이 편한 아이인 거다. 확신이 있어야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아이. 기왕이면 안심하고 임할 수 있도록 해 주자.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울음이 얼마나 스트레스였으면 이런 소원을 빌까, 싶으니 안쓰럽고 짠하다. 큰 소리로 소원을 빌 수 있도록 마이크를 대고 말하게 했다. 민지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친구들이 보태는 박수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축구를 더 잘하게 해 주시고 키가 10cm 더 크게 해 주세요."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 키가 작은 준기(가명)의 이번 소원에도 역시 '축구'가 등장했다. 준기야, 너는 10cm나 크게 해 달라고 소원 빌 수 있어 좋겠다. 선생님은 3cm 이상 빌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만큼만 더 컸으면 선생님 삶이 엄청 달라졌을 거라고 늘 생각했단다. 근데 살아보니 키가 큰 사람이 더 행복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지금은 그냥 만족하며 살려고 해. 준기는 앞으로 10cm가 아니라  분명 50~60cm 더 클 테니 그 소원은 선생님이 들어주마.

그밖에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장수와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아이, 공부를 더 잘하게 해 달라는 아이, 추석에 용돈을 많이 받게 해 달라는 아이 등 아이들의 소원은 각양각색이었다. 소원을 떠올리고 보름달 그림에 글로 쓰며 마음을 담아 빌어보는 행위 자체로 아이들은 자신들이 소망하는 것에 한 발짝 더 다가섰을 것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계속 마음에 떠올리고 구체화해야 실현 가능해지는 것이니까.

알맹이가 꽉 찬 햇곡식, 햇과일과 그 모습이 닮았다 하여 '풍요와 풍작'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보름달. 그렇기에 보름달에 비는 소원은 더 큰 위력이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는 말, '추석'.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떠 올라 많은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날이 흐려 보름달을 보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바라는 것을 종이에 써 보자.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 보자.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청각이 받아들여 뇌에 각인되게 하자. 행동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나의 뇌가 내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지 살펴보자.

한 가지, 추석에 소원을 빌 때는 꼭 기억하자.

다른 사람들을 응징하고 복수하는 소원은 잘 안 이루어진다 것을. 행복과 평화를 바라는 소원이라야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추석 #보름달 #소원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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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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