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8 10:45최종 업데이트 21.11.0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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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11월 1일 오후 3시 25분]

"추석 때는 열세 명의 자매들이 모여 에버랜드로 놀러 가려구요."


2017년 만 열여덟이 되었을 때 시설을 나온 김영. 지금은 17학번으로 입학했던 전북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다. 그가 말한 열세 명의 자매는 시설에서 만난 같은 나이 동기들을 뜻한다. 들어온 시기는 조금씩 달라도 대체로 10년 이상을 함께 먹고 자며 의지했으니 피를 나눈 형제와 다를 바 없다. 시설을 나와서도 명절 때면 함께 모여 외로움을 달랬다.

"제 이름은 꽃부리 '영(英)', 수녀님이 지어주셨어요. 엄마는 미혼모였대요, 알고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요."

김영의 생모는 시설에 와서 갓난쟁이를 내려놓고 총총걸음으로 돌아섰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이가 커서 부모를 찾고자 할 때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이름이 뭐냐는 물음에 '아직이요'라며 말끝을 흐렸을 뿐.

엄마 수녀님과 행복했던 어린 시절

그해 1997년은 IMF 사태로 특히 많은 아이들이 시설에 맡겨지던 때, 김영은 수녀님이 지어 준 이름을 얻었고 생일은 태어났을 법한 날짜를 헤아려 정해졌다. 시설 안에 있는 성당을 다니면서 스스로 지은 이름은 유스티나, 성인 사전을 보고 예뻐서 정했다나...

그래서 그는 김영·김유스티나 이렇게 두 개의 이름과 열세 명의 자매, 여러 엄마 수녀님을 둔 '부자'로 자랐다. 그는 시설에서의 어린 시절이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눈을 떠보니 '수녀님 품'이었고 친구들은 옹알거렸다. 시설 안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기에 시설 안은 세상의 전부였다. 성적 때문에 보습학원으로 내몰리지도 않았고 수녀님과 사회복지사들은 체벌보다는 사랑을 앞세웠다.  
 

꿈터 놀이터에서 어린 시절 오른 쪽이 김영이다. ⓒ 김영 제공

 
초등학교 5학년인가 만난 엄마 수녀님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면 CD를 틀어주셨다. 시설 바로 뒤 뒷산에서는 음악소리 따라 산들바람이 내려와 창문을 가만가만 두드렸고 소쩍새는 배롱나무 위에서 여린 울음을 토해냈다. 친구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깊어질 때 김영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중에 제가 사랑했던 노래가 'Time to say goodbye(타임 투 세이 굿바이)'인 걸 알았어요. 노래는 웅장했고 안드레아 보첼리의 슬픈 목소리가 나를 사로 잡았어요."

그렇게 김영은 잠자리에서 CD가 끝날 때까지 행복한 소녀였고 꿈속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달빛 여행을 떠나곤 했다. 하지만 행복이 언제까지나 너그럽지는 않았다. 김영이 '커터칼'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중학교는 시설밖으로 다녀야 했는데 배정받은 곳은 시설에서 30분 거리인 OO중학교. 중학교 가는 길이 김영에겐 시설 밖으로 난생 처음 '혼자' 걷는 길이었다.

시설애라는 낙인

그 해 시설에서 전부 열두 명이 같은 중학교에 배정되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면 시설에 산다는 게 알려질 수 있고 홀로 움직이긴 무섭고... 여러 날 고민 끝에 김영은 (다른 아이들처럼) 혼자 다니는 걸 택했다.

언니들이 괜찮다고 금방 적응한다고 일러주었지만 김영이 세운 대비책은 커터칼, 등교 첫날 문을 나서니 무서웠다, 교복 사이로 3월의 살바람이 채찍처럼 감겨왔다. 버스를 타면 '너는 탈 자격이 없어'라고 가로 막을 것 같았고 어디선가 거친 손이 나타나 무서운 곳으로 끌고 갈 것 같았다. 열네 살 소녀는 학교 가는 길 내내 커터칼을 꼭 쥐었다.

"막상 쓸 일은 없더라구요, 며칠 지나니까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새 친구들을 사귀면서 속상한 일이 많았어요. 친구 집에 놀러가면 가족 얘기가 나오고 너희 집에 놀러가고 싶다고 하잖아요, 그때마다 움찔했고 서둘러 다른 얘기를 꺼냈죠."

시설 울타리 밖에서 제일 힘들게 마주한 건 '시설애'라는 낙인. 시설에는 전해 내려오는 얘기들이 많았다. 학교 급식이 시행되기 전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던 시절, "너네는 반찬이 왜 맨날 똑같애"라는 질문에 우물쭈물하다가 들켰다거나, 담임 선생님이 가정환경조사를 한다고 부모님 직업을 묻는데 머뭇거려 알려졌다거나 시설에서 나오는데 친구를 마주쳐 드러났다거나 그런 얘기들이 끝도 없었다. 김영은 그 사례들을 되짚으며 마음속에 차곡차곡 쟁여뒀었고 상황마다 요령껏 대처했다. 안타깝게도 '발각'된 친구들은 3년 내 수군거림에 시달렸고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라도 나면 무조건 의심을 받았다.

그런데 세상은 묘하게도 '시설'에 사는 게 불행하다고만 얘기하지는 않았다.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동생들을 셋인가 돌보면서 일 나간 부모님을 대신해 빨래며 집안일을 하더라구요. 친구가 무척 지쳐 보였어요. 그때 내 처지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죠."

그렇게 중학생 소녀 김영은 한걸음씩 성장해 OO여고에 들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 때가 다가왔다. 법적으로 만 열여덟 살은 '보호종료'가 되는 나이이기에 시설에서 나가야만 했다.

500만원 달랑 들고 세상 밖으로

2021년 7월 정부는 보호종료 아동에 대한 제도 개선책을 내놨다. 만 열여덟이 아니라 본인이 원하면 24세까지 시설에 머물 수 있고, 자립수당 30만 원을 2년 늘려 5년까지 연장 지급하겠다는 내용 등이다. 서울시도 자립 정착금을 천만 원까지 증액하겠다고 대책을 발표했다. 용어도 손을 봐 '보호종료아동'에서 '자립준비청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김영이 열여덟이 되던 2017년은 사정이 달랐다. 자립정착금이라고 달랑 500만 원을 쥐어주고 내보내던 시절. 서울이건 지방이건 방 하나에 보증금이 수천만 원이고 월세가 50만~60만 원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면 열여덟 아이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이었다. 
   
김영으로서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자립 준비까지 하는 건 버거웠다. 그는 전주의 전북대학교를 택했다. 가장 먼 거리의 유학생인 편이고 기초생활 수급자 자격도 되어 1순위로 기숙사를 배정받으면 진학과 주거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공을 산림공학으로 택했는데 여기엔 까닭이 있었다.

김영은 시설에서 일요일이면 엄마 수녀님 손을 잡고 뒷산에 올랐다. 나지막하지만 팔을 벌려 소녀 김영을 감싸주었던 산. 봄에는 수녀님과 함께 디딤발로 버찌를 땄다. 아침 햇살에 수녀님이 머리엔 쓴 하얀 베일이 빛났고 벚꽃 잎의 연한 홍색은 김영의 단발머리를 은은하게 어루만졌다. 산책길 안쪽, 빨간 빛이 반짝여 다가가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산딸기가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개망초가 무리 지어 피어있어 친구들과 반지와 팔찌를 만들며 놀았다.

여고 시절에는 학교 텃밭을 돌봤다. 깻잎이나 상추 같은 흔한 야채들이지만 쉬는 시간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며 물을 줬다. 쑥쑥 자라난 녀석들을 밥 시간에 맞춰 거둬오면 점심 메뉴는 갑자기 야채비빔밥이 되었다. 그렇게 뒷산에서 꽃을 만나고 고등학교에서 생명을 가꾼 탓에 김영은 식물을 가꾸고 환경을 돌보는 산림공학을 택했다.

학비는 국가장학금으로, 기숙사비와 생활비는 기초생활수급자여서 나오는 50만 원으로 해결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소득이 생기면 수급비가 줄어들기에 모든 것을 50만 원에 맞춰서 살고 학업에만 충실했다. 덕분에 무사히 4년 공부를 마쳤고 지금은 연구자의 길을 가려 한다.

김영에게 대학 시절은 시설에서 나온 이래 진정으로 독립을 한 시간이었다. 변화의 계기는 '주거통합지원서비스', 시설 출신에게 배정되는 공공임대주택에 당첨되어 대학 3학년 때 입주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가졌어요. 입주 첫날 방안에 누우니 신기했어요"

김영은 이때서야 단체 생활 아닌 독립 생활을 처음 맛봤다. 요리 학원도 다니고 영어 회화도 공부하고 심리치료도 받으며 홀로 서갔다. 6개월간 굿네이버스에서 받은 심리치료는 특별했다. 김영의 얘기에 귀 기울여 들어준 그 프로그램은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주고 결핍을 채워주었다.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심어주었다. 

열여덟 어른이 된다는 것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도 공공임대주택이 당첨되었다. 보증금 백만 원에 월세 22만 원의 6년 계약, 원하면 20년까지 살 수 있는 조건이다. 월세도 지원받을 수 있어서 주거 근심을 덜었다. 사실 임대주택에 들어가긴 정말 어렵다. 시설 출신 말고도 장애인, 탈북자, 기초생활수급자 등 입주를 희망하는 이들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김영은 전주에서도 그렇고 서울에서도 운이 좋았다.

해마다 보호종료로 시설에서 '열여덟 어른'이 2500명 정도가 나오지만 겨우 30% 남짓만이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고시원이나 원룸으로 간다. 정착지원금 500만 원과 자립수당 30만 원으로는 도저히 보증금과 그 세를 감당할 수 없다. 시설 출신 청년들의 대학진학률이 10%가 채 안 되니 변변한 직장을 가진 경우도 많지 않아 월급이래야 보잘 것없다. 그래서 주거난에 자포자기하고 나쁜 길로 빠지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김영은 살 집이 해결된 게 기쁘면서도 맘이 편치만은 않았다.

'시설 출신'이라는 건 언제나 숨겨야 할 치부였다. 지금은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브라더스 키퍼'를 만든 김성민은 특별하다. 그는 '보호종료아동'들을 모아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의미 있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허진이와 손자영 등은 '아름다운 재단'과 손을 잡고 '열여덟 어른'이라는 캠페인을 벌이며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제도개선운동을 하고 있다. 자신이 겪은 아픔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세상을 향해 함께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서울시의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지원개선안은 이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김영이 열여덟 어른으로 시설을 나온 지 벌써 4년 반. 그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깊게 상의할 수 있는 어른이 옆에 없었던 게 늘 아쉬웠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대학입학과 전공 선택, 대학원 진학 등 어려운 결정들을 홀로 해냈다.

김영이 걸어 갈 길은 자신의 길이되 혼자의 길은 아니다. 김성민, 허진이가 노력한 것처럼 세상으로 나올 후배들에게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내일모레 추석, 김영과 열세 명의 자매들, 서로에게 가족이 되었던 이 청년들이 나눌 수다는 어떤 빛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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