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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쌍노무XX!" 시골마을 할머니의 살벌한 싸움

[프로골퍼의 좌충우돌 마을기업 도전기 13] 출자금 놓고 한판 승부

등록 2021.09.27 07:07수정 2021.09.27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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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 비 앙 로즈>의 한 장면. 남편이 잊어버린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제 장밋빛. ⓒ 프라임엔터테인먼트

 
기대하지 않았던 예비 마을기업에 선정되고, 마른 산수유의 지인 판매에도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남편은 정신 줄을 놓고 틈만 나면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 시간을 탕진했다. 이 인간에게 이제 삶이란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 장밋빛 인생)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함께 본 영화 <라 비 앙 로즈>에서, 그 노래를 부른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의 실제 삶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기억도 못한 걸까? 연인의 비행기 사고 사망 소식을 듣고 절규하는 에디트 피아프(마리옹 코티야르 분)의 표정과 눈물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제 빛깔과 비슷한 것 같다고, 내게 말한 것도 남편이었다.

하지만 자축(自祝)의 시간이 한없이 늘어나도 그냥 내버려 뒀다. 도시에서만 살던 이 남자는 시골살이를 하며 농사와 인간 관계에서 온통 실패와 당혹감만을 맛보았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성취감을 느낄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측은한 마음으로 한 인간의 허랑방탕한 생활을 지켜보기만 했다. 상처받은 짐승에게 기쁨을 음미하고 만끽할 기회를 준다면, 다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 때문이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그런데 이 인간이 부르는 자축의 노래 악보에는 끝없는 반복을 지시하는 도돌이표가 찍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나이 쉰,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이 인간도 쉰내를 풀풀 풍기며 갈 수밖에 없었다. (최영미 시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변주)

이제 남편은 동네에서 기피 인물 1호가 되어 있었다. 마을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 인간이 어디든 나타나기만 하면 주민들은 하나둘 슬금슬금 남편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눈치코치도 없는 이 인간은 필사의 탈주를 하고 있는 작업반장의 뒤통수에다 대고 이런 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반장님, 우리 예비 마을기업인들끼리, 마을을 위해 기업을 위해 술 한 잔 빨죠!"
"아니, 이제는 마을을 위해 기업을 위해, 술을 좀 혼자 있게 내버려 둘 때도 되지 않았나? 이러다간 술이 너무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과로사할 것 같아서 심히 걱정이 되는데."
"그러면 오늘은 술의 과중한 업무를 위로해주는 술자리를 한번 가지는 게···."
"흠, 요즘 물은 셀프, 술은 혼술이 대세라지, 아마."



오갈 데가 없어진 남편을 받아준 건 오직 협동조합 서류들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남편이 우리 대신 서류를 작성하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마을 공동체의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 시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변주)

조급증 환자 vs. 쩨쩨한 쫌생이 한판 승부

출자금 금액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협동조합의 토대가 흔들거리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국 두 갈래로 정리가 되었는데, 이번에도 명분론자들과 실용론자들의 대립으로 수렴되었다.

물론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번에는 합리론을 근거로 한 명분론자들과 경험론에 바탕을 둔 실용론자들의 충돌이라 할 만했다. 출자금 사태에서 가장 충격적이던 점은, 실용론자들의 페르소나(persona, 영화적 의미의 분신)였던 우 이사가 명분론자들이 포진한 합리론의 입장에 찬성하면서 참전한 것이다.

실용론자들은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 이사는 그들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파업 기간 우 이사는 실용론자들을 구국의 강철대오로 조직하고, 학습을 통해 정신적으로 무장시켰다.

명분론자들이 임금에 대한 모든 것을 쟁의대책공동위원회에 백지 위임하고 백기를 든 것은 우 이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우 이사가 출자금 사태에 직면해서는 명분론자들의 편에 서게 된 것이었으니, 실용론자들이 입은 내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명분론자들은 고액의 출자를 원하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의 정신에 입각해 있었고, 실용론자들은 개인의 출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소소익선(少少益善) 혹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의 태도를 강력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실용론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몇몇 주민들은 예전에 영농조합을 경험했는데, 그 조합이 파산하면서 출자금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곤욕을 치른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출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사례를 많이 보고 들은 주민들은 모두 실용론자들의 진영으로 모여들었다. 무산댁과 소평댁, 중평댁과 박 영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이 집단은 결사 항전을 공공연히 외치고 다녔다.

작업반장과 이 이사, 우 이사 그리고 남편이 명분론자들의 핵심이었다. 출자금 사태를 분석한 우 이사가 합리론에 찬성하면서, 명분론자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고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는 듯했다.

명분론자들의 주장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알밤이든 깐 밤이든 아니면 가공식품을 만들든,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시설 장비를 마련하려면 조합원 한 명이 최소 300만 원은 출자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의견이었다.

밤 선별기, 밤 박피기, 저온저장 컨테이너 그리고 진공포장기. 명분론자들이 원하는 시설 장비는 이렇게 네 가지였다. 그들은 선별기와 컨테이너를 중고로 구입하는 경우 40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 든다며, 15명이 300만 원씩만 출자하면 된다고 실용론자들을 설득하려 했다.

허나 실용론자들은 반대 진영의 주장에 합리성이 부족하다며 비난했다. 예비 마을기업을 거쳐 마을기업에 선정돼서 그 보조금으로 시설 장비를 갖추면 될 텐데, 뭐가 그리 급하냐며 이들을 조급증 환자들이라고 낙인찍었다. 또한 계급의 모순을 은폐하는 명분론을 교묘히 합리론으로 위장함으로써 마을 주민들을 분열에 빠트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에 대해 명분론자들은 보조금과 자부담을 합친 금액에서, 30%만 시설 장비 구매에 사용할 수밖에 없으니, 어차피 기본 장비 네 개는 출자금으로 구입해야 한다며, 실용론자들을 쩨쩨한 쫌생이들이라고 놀리며 이죽거렸다. 또한 그들의 편협한 경험의 폭을 조롱하며, 영농조합 경험을 통해 협동조합을 판단하려 드는 것은 '착각적 상관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조급증 환자들과 쩨쩨한 쫌생이들의 출자금을 건 한판 승부. 서로 상대를 규정한 별명으로 따지면, 누가 이겨도 별로 자랑스러울 게 없는 대결이었다. 일단은 협동조합을 구성 중이라, 마을 회의가 아닌 임시 총회라는 이름으로 마을 회관에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포문을 연 건 소평댁이었다.

"내 수중에 300만 원이 어딨노. 너거는 그 돈을 쌓아노코 사는지 모르겄지만, 내는 없다. 그 돈이 있었으먼 내가 손자놈한테 게임기부터 사줬뿌지 이카고 있것나."

무산댁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예비 마을기업인동 됐다매, 그라믄 거서 나오는 돈 가꼬 사믄 되자나. 내가 그 돈이 없어가꼬 이카는 게 아이라, 시간이 쫌 걸리도 순리대로 거서 나오는 돈 가꼬 하믄 되는 거 아이가. 요새 아새끼들은 성질머리가 머가 저래 급한동 모르겄네."

엉뚱하게 작업반장 성토 대회로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의 가장 최근 임시총회 모습 ⓒ 노일영

 
무산댁의 말을 받은 건 '요새 아새끼들' 중 하나인 작업반장이었다.

"아, 형수.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요. 몇 번이나 설명했잖아요, 예비 마을기업 보조금과 자부담 합친 돈으로는 규정상 시설 장비를 못 산다고. 그러니까 출자금을 좀 많이 모아서 장비를 사야지 올해 뭐라도 해 볼 수 있다고. 이거 참, 짐승한테도 이만큼 말해줬으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었겠네."

"뭐라꼬? 니가 내를 짐승보다 못한 년이라고 지금 욕한 거 맞재? 동네 사람들아, 다 들었재? 저 쌍노무 새끼가 내를 짐승보다 못한 년이라고 욕한 거 다 들었재? 내가 남편 없이 산다꼬, 저 어린 노무 새끼가, 나를 업신여기가꼬,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뿌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무산댁은 반장의 말에 처음엔 분통을 터트리다가 이내 눈물샘과 통곡샘을 동시에 터뜨려버렸다. 임시 총회는 출자금 문제가 아니라 반장이 '쌍노무 새끼'라는 걸 입증하는 자리로 서서히 변해 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반장이 혼잣말로 주절거린 건데 목소리의 강약 조절에 실패했다며, 얼른 무산댁에게 사과했다.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 톤에 대한 사과를 듣고 무산댁은 격분을 누르지 못했다. "에라이, 쌍노무 새끼!" 총회는 이미 출자금 따위는 저기 멀리 안드로메다로 떠나보낸 분위기였다.

반장이 '빼박 쌍노무 새끼'라는 증언이 여기저기에서 마구 쏟아졌다. 반장이랍시고 완장질을 한 일부터 고등학교 때 음주를 하고 패싸움을 한 일까지, 사례는 참으로 다양했다. 그럼에도 반장은 형식과 내용의 조화와 일관성을 추구하며,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에 능통하신 분답게, 인격 모독을 넘어서 인격 살인성 발언이 이어져도 묵묵히 견디고 앉아 있었다.

언어를 통한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은 작업반장. 성인군자라도 참지 못하고 무뢰한으로 변할 상황이었지만, 반장은 미동도 않고 자리를 지켰다. 이건 비밀이지만, 반장은 살짝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주민들의 성토가 이어지는 동안 잠깐 졸았던 게 틀림없었다. 나는 반장이 가끔 그런 식으로 부족한 잠을 채우는 장면을 몇 번 목격했었다.

"저 쌍노무 새끼가 국민학교 다닐 쩍에, 우리집 정지(부엌)에 와가꼬 삶은 감자 한 알을 훔치가꼬."

무산댁의 말을 받은 남편은 30분 넘게 이어진 '반장 참살극'을 마무리했다.

"와우, 무산댁 아주머니, 여기 시골에 계시긴 아까운 인재였구나! 정치하셔야겠어요. 물을 타도 어쩜 이렇게 잘 타시는지 몰라. 어쨌든 반장님이 아무리 개차반이라고 해도, 나만한 쌍노무 새끼 찾아내시기 힘들 거니까, 좀 있다 제 욕을 맘껏 좀 해주시고. 지금은 우리 동네 최강의 악당이라고 할 수 있는 출자금 이 쌍노무 새끼를 한번 조져봅시다!"
#마을기업 #협동조합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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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함양으로 귀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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