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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교사입니다, '차별금지법'에 '학력' 빼면 안 돼요

[주장] '학력' 향한 교육부의 맹신... 흑백 텔레비전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등록 2021.06.29 20:48수정 2021.06.29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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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여영국 대표와 배진교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계단 앞에서 열린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대회에 참석, '차별금지법, 이제 국회의 시간'이라는 문구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둑이 무너진 듯 발생하는 학교폭력으로 "힘드시죠? 기운 내세요"라는 말을 아침 인사처럼 들은 지도 벌써 두 달째다. 오늘도 밤사이 인근 학교 학교폭력 책임교사 선생님으로부터 연락받은 건을 포함해 세 건을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교육부에서 학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것에 대해 좀 다른 의견을 냈나 본데 기사 보셨어요?"
"그래요?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 찾아봐야겠네요."


전화를 끊으면서도 설마 했다. 뭔가 오해가 있겠지 싶었다. 그러나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기사를 보니 교육부가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 '학력'을 포함하는 것에 사실상 반대인 '신중 검토' 입장을 제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학력이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니요?   

교육부에서 든 학력을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상당 부분 성취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합리적 차별 요소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과 "학력을 대신해 개인의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표준화된 지표의 사용이 일반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력에 의한 차별을 법률로 규제할 경우 과도한 규제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반대 이유를 읽고는 더 납득할 수 없었다.

'학력'이 개인의 선택과 노력 정도에 따라 달라지므로, 학력이 좋으면 학생이 노력한 거고 그렇지 않으면 노력하지 않은 것이니 그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우이지 차별이 아니라는 것이 교육부 논리였다. '학력'에 대한 '맹신'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경향'이라는 말로 교육부는 그런 생각이 아닌데 사회적 분위기가 그러니 '신중 검토'해야 한다고 한 것은 더 비겁해 보였다.

교육부 주장처럼 '학력'이 개인의 노력에 따라 상당 부분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 좋은 대학 가려면 아빠, 엄마만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재력까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 현실을 순진한(?) 교육부만 모르는 것인가? 교육부가 어려운 형편에도 열심히 공부해 학력고사나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미담이 흑백텔레비전을 통해 나오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교육부는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아이들을 위한 교육 정책을 만드는 부서라고 생각한다. '학력'을 학생 개인의 노력의 결과로 보는 잘못된 현실을 인정하고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아무리 노력해도 환경 좋은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는 진짜 잘못된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정말 내가 노력하면 내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는 근거 있는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다.

'학력을 대신할 표준화된 지표가 없는 현실'을 근거로 '학력'을 차별금지법에서 빼는 것을 사실상 반대한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1960~1980년대 산업화 시대에는 대량 생산을 위해, 속도를 위해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표준화되었다. 아이들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강요받았다. 그 시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었던 선생님의 훈화가 아마도 "왜 너만 그러니?" 같은 말이 아니었을까? 

그 시대 학교에선 남과 다른 아이에겐 '문제아'라는 낙인을 찍어 그 '남다름'의 싹을 싹둑 잘라 버리고 선생님 말을 그대로 따르는 '모범생'만을 대량 생산(?)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빠른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은 개별화되고 창의성이 중요시되는 시대이다. 예전처럼 학생을 국영수 성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대학에서는 입학사정관제, 수시 등으로 창의적이고 자기 분야에서 소질을 가진 학생들을 뽑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을 입시로 연결해 버리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교육부가 이러한 시대 흐름을 애써 모른 채 하고 '표준화된 선발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부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다양한 소질과 창의성을 계발하고 평가할 수 있는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지원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대체 교육부에 '학력'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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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 사진공동취재단


사실 교육부의 주장을 보며 내가 가장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학력'을 국영수 성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국영수 성적이 높아도, 좋은 대학 나왔어도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는 잘하는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며 겪게 되는 다양한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이 능력자다. 학교는 그런 능력자를 키우는 곳이어야 한다. 학력의 개념 역시 '성적'이 아니라 '문제 해결 능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학교는 더 유연화되기를 그리고 더 학생 친화적이기를 요구받고 있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선생님들은 지금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교육부의 이번 반대는 격려가 아니라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굳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11조 1항을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개인의 책임이 아닌 다양한 이유로 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법이 없어서 차별이 행해졌던 것도 아니지만, '차별금지법' 입법이 '차별'에 대한 바람직한 사회분위기 형성에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런 믿음과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교육부의 행동이 더욱 안타깝다.

어제 점심시간에 학교를 둘러보는데 한 아이가 동아리 방에서 혼자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봤다. 다음 주가 기말고사 시험 기간인데 저래도 되나 싶었다. 그래서 뭐라 할까 하다 하지 않았다. 아이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시험이라는 말로 눌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왜 춤을 추는지, 꿈이 댄서인지 나는 잘 모른다. 또 공부를 잘하는지 역시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저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땀을 흘리는 모습이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만들 거라 믿는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요즘 가장 듣기 싫은 말 중 하나가 '꼰대'라는 말이다. '꼰대'라는 말이 쓰이는 상황을 보면 예전 사람이 자신이 아는 것을 '나 때는~' 이러면서 요즘 사람들에게 강요할 때인 거 같다. 부끄럽지만 조심하고 조심하는 데도 나도 모르게 '꼰대 짓'을 하곤 후회한다.

교육부 역시 이번 '학력'을 '차별금지법'에서 빼자는 그리고 비판이 따르자 슬그머니 물러서는 행동이 시대에 뒤떨어진 '비겁한 꼰대짓'이 아닌지 자기 점검해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차별을 없애는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 주기를 바란다.
#차별금지법 #학력 #시대 정신 #성적 #문제해결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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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소재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사입니다. 또 학교에 근무하며 생각하고 느낀 바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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