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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에도 남녀차별이? 그녀가 밝혀낸 '황당한' 진실

[다큐멘터리에 들어서면] 넷플릭스 <글로리아 올레드: 약자 편에 서다>

21.06.19 11:18최종업데이트21.06.1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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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에는 글로리아가 두 명 나온다. 글로리아 올레드와 글로리아 스타이넘. 물론 글로리아 올레드가 주인공이므로 올레드의 출연분량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온 두 글로리아의 결정적 차이점을 스타이넘이 직접 분간해 말해주는 까닭에, 분량이 짧은데도 스타이넘의 출연이 올레드만큼 무게가 있다. 여성운동가의 다양한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엔딩 크레딧 배경음악으로 경쾌한 팝송 '글로리아'가 흐르는데, 그 음악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앞서 열거된 두 글로리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복습하게 되어 재미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
 
철학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여성운동을 창시했다. 이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운 사람이 글로리아 올레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성별 갈등상황에 굳이 들어가지 않으려 했지만, 글로리아 올레드는 오히려 그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도록 자극했다.

 

▲ 스크린샷: 글로리아 올레드(왼쪽) & 글로리아 스타이넘(오른쪽)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글로리아 올레드>는 2018년에 만들어졌으며, 상영시간은 95분이다. 상영시간 내내, 글로리아 올레드의 활약상이 열거된다. 글로리아는 미국에 여성인권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가 그리 많지 않았던 때에, 주로 여성인권 관련사건을 맡으며 매우 열정적으로 여성들을 변호하였다.
 
글로리아는 성희롱·성폭행 피해여성들을 주로 변호하였다. 처음엔 한두 건 소송을 맡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강인하고 저돌적인 변호 태도가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자신의 경험을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수많은 성폭행 피해여성들이 그녀에게 사건을 의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글로리아는 '그런 분야(여성이 성과 권력의 면에서 피해자가 됨)'의 사건을 전담하는 법조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영화는 글로리아가 변호에 나섰던 소송 건들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하는데, 일일이 받아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에서 굵직한 것 두어 가지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폭행 사건에서 공소시효를 없애자는 법안에 관련된 일이다. 이 법안의 필요성을 입증하고자 글로리아는, 유명배우 빌 코스비에게 성폭행당했으나 사건 당시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폭로하기 시작한 50명 이상의 여성들을 차례차례 기자회견장 마이크 앞에 세웠다. 둘째는 이혼 후 법정 양육비를 회피하는 상황을 타개하는 방안으로 이혼한 전남편 월급에서 양육비를 공식차압하는 법률적 집행 방식을 제안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남성들은 기겁했지만, 전남편들의 무책임함에 질려있던 여성들은 환호했다. 다음으로 셋째는 가톨릭 신부에게 성폭행당한 여성들 사례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함으로써 마침내 가톨릭 신부의 공개사과를 받아낸 일이다. 여기에 마치 덤을 얹듯 미국의 직전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에게 성희롱·성폭행당한 여성들의 소송에 관련된 이야기도 덧붙여진다.
 
글로리아는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체로 피해여성들이 즉각 반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집중했고, 그것이 당연한 인간적 반응임을 강조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건 앞에서 평범한 인간은 얼어붙기 쉽다(특수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적합한 반응과 유효한 대응을 생각하기까지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자신에게 과거 개인적으로 친절하게 해줬을 뿐 아니라 품위있고 푸근한 사람으로 존경받는 권위자 남성이 가해자일 경우 그 남성을 상대로 법정에서 1:1로 싸우겠다고 결심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꼭 여성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아동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 피해소년들 역시 피해사실을 발설하기 어려워 한다. 성폭행 피해자는 성별을 불문하고 일단 가해자의 권력과 평판과 위엄(?) 앞에서 얼어붙는 것이다. 그것이 그루밍 성폭행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동의 없는 성행위를 폭력적으로 자행한 가해자에게 법적, 윤리적 책임을 묻기보다,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은 자신을 자책하느라 피해자는 길고긴 고통스러운 시간을 흘려보낸다.
 
글로리아는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들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성폭행 사건의 경우 공소시효에 대해 각별한, 그리고 섬세한 논쟁이 필요하다는 지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후 미국에서는 (주마다 다르지만) 성폭행 사건 공소시효에 대하여 논쟁이 자주 일어났으며, 실제로도 탄력적으로 적용되는 사례가 많아졌다. 
 
글로리아는 성폭행 사건의 피해여성들을 그냥 일로 볼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녀들의 사건이 글로리아 자신에게 개인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에게도 동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해여성들이 무엇 때문에 고소하지 못하는지, 어째서 피해사실조차 숨기며 지낼 수밖에 없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다.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글로리아는 넉넉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너무 늦게(?) 고소할 마음이 생겼으나 공소시효가 이미 끝나버린 경우에 해당되는 여성들을 기자회견장에 세울 때 글로리아는 항상 그 여성들 곁에 바짝 붙어앉는다(혹은 붙어선다). 모든 기자회견장에서 글로리아는 피해여성들 곁을 든든히 지킨다.

혼자서는 마이크 앞에 설 수조차 없었던 피해여성들, 바보같이 당했다고 자책해온 여성들 바로 곁을 지켜주는 것이다. 손도 잡아주고 어깨도 토닥여준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지만 글로리아의 품은 넓고, 손은 따뜻하다. 피해여성들은 글로리아 곁에서 힘을 얻어, 입을 연다. 글로리아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녀들은 힘을 내는 듯 보인다. 피해여성들 중 한 명은 글로리아를 실제로 '글로리아 이모(auntie)'로 호칭한다고 말한다.
 

스크린샷: 글로리아가 피해여성(약자)들 곁에서 격려하며 지지하는 모습. ⓒ 넷플릭스

 
또, 글로리아는 TV 프로그램 토크쇼에 나가서 여성들을 공개적으로 편들어주는 발언을 자주 했다. TV 외에는 여성문제를 대중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던 때에, 글로리아는 토크쇼를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이를 보고 어떤 이들은 글로리아를 조롱하기도 했다. 인기를 얻어, 사건을 더 많이 의뢰받아 떼돈을 벌고 싶어서 저런다는 식으로 깎아내렸다.

그러나, 글로리아는 부유해지기 위해 피해여성들을 도운 게 아니었다. 그게 목적이었다면, 노력 대비 수임료가 '센'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맡았을 것이다. 글로리아가 대중적으로 논쟁을 일으킬 만한 인기인이 연루된 사건들에 뛰어들 때는, 그 인기인을 문제삼음으로써 덩달아 인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성(gender)과 대중적 인기가 부여해준 권력의 문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키우고 싶어서였다. 나아가 여성들이 법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글로리아는 평생 성과 권력 분야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약자들을 도우려 했고, 실제로 그녀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을 도왔다. 다큐멘터리의 한국어 부제 '약자 편에 서다'가 글로리아의 참된 의도였던 것이다. 글로리아는 교사로 일하는 절친에게도 이같이 말한 바 있다.
 
"네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을 위해 싸우는 거야. 그게 우리의 책임인 거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위해 내가 나서는 건 어찌 보면 하기 쉽다. 상실감과 박탈감과 절실함이 나를 추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남을 위해서 내가 나서는 건, 특별히 마음을 먹지 않으면 하기 어렵다. 시간이 없을 수도 있고, 정보가 없을 수도 있고, 마음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남의 문제에 뛰어들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글로리아는 자기가 한 말 그대로 평생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언행일치의 삶이다. 뒤늦게나마 알게 된 자기의 권리를 되찾고자 노력하는 여성들 편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제 권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아직 갈팡질팡하는 여성들을 대신해 남성들의 모순된 논리를 공격한다.
 
예를 들어, 글로리아는 레스토랑 메뉴판이 남성용, 여성용으로 구별되어 있으며 여성용에만 음식값이 적혀있지 않은 이유를 공개적으로 질문했다. 음식값을 지불하는 쪽이 남성이어서 그렇다고 하자, 글로리아는 그곳에선 남성과 동행한 사람만이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는 점, 덮어놓고 여성의 경제력을 깔보는 사회적 통념을 문제삼았다.

그 결과, 메뉴판에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글로리아는 여성의류 수선비를 남성의류 수선비보다 훨씬 비싸게 책정한 백화점을 고소고발하기도 했다. 하여,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글로리아는 마치 싸움꾼 같아 보인다. 흡사 작정하고 공격력을 불사르는 사람 같다. 성폭력 피해여성들에게 푸근하고 따스한 이모였던 여성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여성과 완전히 동일인이다. 
 
여성에겐 푸근하고 남성에겐 저돌적인 글로리아 올레드의 방식이 여성운동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여성운동 방식도 있으며, 사회마다 시대마다 상황마다 다양한 여성운동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글로리아 올레드의 방식이 일정 정도 유의미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 확인되는 사안에 한하여, 그 약자를 돕는 일에서 정작 중요한 논점은 방식이라기보다는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가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글로리아 올레드를 훨씬 긍정적으로 그리며, 그녀에게 집중한다. 이러한 긍정적 입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픈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허나, 의견이 다를지라도 이 다큐멘터리를 나란히 함께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다 보고 나서 찬반토론을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니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약자 편에 서다 SEEING ALL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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