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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 25일 단식 끝에 순국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 / 48회] 25일 동안 단식을 결행하면서 마지막의 말씀은 "정부! 정부!"였다

등록 2021.06.19 20:26수정 2021.06.1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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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신규식 선생. ⓒ .

 
일모도원(日暮途遠) -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고 아득하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오생기차타(五生己蹉跎)' - "몸은 쇠약한데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까마득하게 많음"을 덧붙였다. 

32세 때인 1911년에 망명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며 임시정부의 초석을 놓고, 이승만이 잔뜩 어질러놓고 떠난 정부의 국무총리대리로서 수습에 나섰으나 난마와 같이 엉킨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큰 갈래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고쳐쓰자는 개조파와 임정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이 수립하자는 창조파의 대결이었다. 이같은 대립은 임시정부 안팎에서 전개되어 독립운동전선의 총체적인 분열상으로 나타났다. 

10여 년간 지극정성으로 공들여 쌓은 임시정부라는 희망의 탑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서 신규식은 몸부림쳤다. 동지들을 만나 설득하고 호소했으나 방향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설상가상 격으로 중국광동정부(호법정부)의 분열상이었다. 광동의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쑨원에게 반기를 들고 혁명세력 요인들의 체포령을 내렸다. 

호법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내고, 중국혁명의 성공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그래서 두 정부의 관계를 운명공동체로 인식했던 터여서 충격은 더욱 컸다. 5월 이후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분열과 동지들 사이의 적대로 심장병과 신경쇠약의 증세가 악화되고 있을 즈음에 발생한 진형명의 쿠데타 소식은 그를 병석에 눕게하는데 치명타가 되고 말았다. 

중국혁명의 실패, 임시정부 변혁논의를 둘러싼 계파간의 극한 대립, 임시정부 내부에서 전개된 의정원과 대통령의 대립 등 한국독립운동이 운동방략을 두고 진통을 겪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신규식의 상심은 더욱 깊어졌으며 그로 인해 병도 날로 악화되어 갔다. 

수면과 음식의 양이 날로 줄어들고 말수도 적어져 갔다. 다만 그 눈초리만은 전과 다름없이 예리하였으며 전보다 더 음울한 빛이 감돌았으나 몸은 날로 여위고 파리해졌다. 그래도 예관의 자태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엄숙하고 단정했다고 전한다. (주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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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선생이 살았던 집 계단. 1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 김종훈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 신규식을 보필했던 민필호는 장인의 병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7월 초순경 어느 날인가, 선생께서는 또한 창 앞에 서 계셨다. 점점 움푹하게 들어간 눈으로 선생께서는 슬프게 창밖 하늘을 쳐다보셨다. 역시 점점 홀쭉해진 양쪽 볼에는 아픔을 지닌 주름살이 접혀 있었다. 그날은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바다 바람이 창밖에서 지긋이 불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갑자기 비통하게 높은 목소리를 내셨다. 이번에 하시는 말씀은 옆방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다시 봅시다, 벗들이여…나는 가겠소.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시고, 3천만 동포를 위해 힘을 다해 주시오. 나는 가겠소…. 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그 후로 선생께서는 줄곧 침상에 계시며 음식을 끊으시고 다시는 말씀이 없으셨다. 25일이 지나도록 선생께서는 음식도 안 드시고 말씀도 안 하시고 눈을 감으신 채 줄곧 누워만 계셨다. 매일 약간씩 물을 마실 뿐, 동지들이 혹 음식을 권해도 굳게 거절하셨다. (주석 5)  


그는 9월 1일부터 25일까지 불식(不食)ㆍ불언(不言)ㆍ불약(不藥)으로 일관하면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적인 대의에 따라 단합할 것을 호소하였다. 25일 동안 단식을 결행하면서 마지막의 말씀은 "정부! 정부!"였다. 임시정부로 단합하라는 호소였다.  

우울과 병환과 굶주림이란 세 가지의 시달림에 선생의 병세는 더욱 무거워졌고, 모습이 아주 야위고 쇠약해져서 보기에도 두려울 정도가 되었다. 동지들도 더 참고 볼 수가 없어 드디어는 억지로 음식을 드시도록 했다. 몇 사람이 선생의 팔다리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항문으로 주사하여 우유며 계란 같은 영양품을 보급해 드렸다. 그러자 선생의 몸은 비록 반항하지 못하셨으나, 감았던 눈을 갑자기 뜨고 보시는 눈초리에는 노여움이 자욱했다. 이 며칠 사이 선생의 얼굴에 나타난 고통은 도저히 그려낼 수가 없다. 

선생께서 음식을 끊으신지 25일 되시던 8월 5일, 선생은 그렇게나 사랑하던 대한의 3천만 국민과 그렇게나 사랑하던 중화민국, 그리고 사랑하던 피눈물의 동지들로부터 떠나셨다. 선생께서 임종하실 때의 마지막 유언은 잘 알 수 없으나 다만 '정부! 정부!'라고 하시는 말을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 이외로는 아무 부탁도 하신 바 없었다. 향년 43세로, 자녀에는 따님 한 분과 아드님 한 분이 있었다. 따님의 이름은 명호(明浩)로 민씨(閔氏)집안에 출가했고, 아드님 상호(尙浩)는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열 살이었으나, 열일곱 살 때에 항저우(杭州)에서 요절했다. 그리하여 항저우 교외에 안장했다.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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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칭린 묘역에 있는 신규식 선생 묘비. 1993년 이장 전까지 선생은 중국 땅에서 70년 넘게 잠들어 있었다. ⓒ 김종훈

 
그리고 8월 5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43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접었다.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단식 끝에 절명한 분은 예관 선생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주석
4> 강영심, 앞의 책, 131쪽.
5> 『전집①』, 334쪽. 
6> 앞의 책, 335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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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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