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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떨어진 강호의 도리... 그 도리를 지키는 여자

[김성호의 씨네만세 328] <강호아녀>

21.06.13 11:39최종업데이트21.06.1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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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아녀 포스터 ⓒ 에스와이코마드

 
옛 도시가 무너진 자리에 휘황찬란한 새 도시가 들어선다. 쇠락한 지방의 젊은이들은 흥하는 땅으로 옮겨간다.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일어서길 반복하는 중국의 21세기, 앞만 보고 달리는 중국에서 잊혀가는 것들의 꽁무니를 바라보고 선 영화인이 한 명 있다. 오늘날 세계 영화계가 중국에서 가장 주목하는 감독을 한 사람 꼽으라면 빠지지 않을 지아 장커가 그 주인공이다.

최근 개봉한 <강호아녀>는 지아 장커의 2018년작이다. 한국에서도 개봉해 좋은 평가를 받은 <스틸라이프> <천주정> <산하고인>에 이은 장편으로, 개봉 3년만에 한국에 정식 수입됐다.

<강호아녀>는 이름처럼 강호의 여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대체 강호란 무엇인가.
직역하자면 강과 호수일 뿐이지만, 영화 속에서 말하는 강호는 그보다는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다. 속세의 것보다는 인간 본연의 멋을 좇는 사람들, 의리와 애정으로 맺어진 이들의 세계가 바로 강호다. 무협지와 누아르 영화에서 흔히 언급되는 강호가 바로 그것인데, <강호아녀>에선 뜻을 같이하는 조직의 정신 같은 것을 가리키는 듯도 하다.
 

▲ 강호아녀 스틸컷 ⓒ 에스와이코마드

 
남자 대신 감옥에 간 여자

영화는 2001년 산시성 다퉁(大同)에서 출발한다. 치아오(자오 타오 분)는 이 도시를 꽉 잡고 있는 중간보스 빈(리아오판 분)의 애인이다.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고 무리를 이끌며 여러 사업을 함께 하는 빈은 의리가 있고 비겁하지 않은 사내로 정평이 나 있다.

문제는 빈의 조직을 다른 조직이 위협하며 벌어진다. 영화가 차근히 그리고 있진 않지만 그의 조직을 위협하는 건 젊은 청년들로 구성된 신생조직처럼 보이는데, 빈이 모시는 두목은 이들의 습격에 목숨을 잃고 빈 역시 위험에 직면한다.

빈과 치아오가 탄 차가 이들에게 둘러싸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순간, 치아오가 빈에게서 받은 권총 한 자루를 뽑아 빈을 구해낸다. 빈은 겨우 생명을 건지고, 치아오는 불법무기 소지죄로 징역 5년형을 받는다.

영화가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 이후다. 5년만에 출소한 치아오가 빈을 찾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다. 어렵게 빈을 찾았는데, 그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다. 직접 만나 이별을 고하는 것조차 회피했던 빈은 치아오와 대면한 자리에서까지 비겁함을 감추지 않는다.
 

▲ 강호아녀 스틸컷 ⓒ 에스와이코마드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진 세상

치아오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어디에도 강호의 도리가 남아 있지 않다. 의리와 애정이 모두 배신당하고, 손에 쥔 것도 얼마 없다. 권총을 준 것이 빈이라고 밝히지 않아 5년형을 살았는데, 빈은 그 시간 동안 저를 완전히 잊었다. 그러면서도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부하들은 더 크게 성공했고 저를 아는 척 하지 않았다며 억울해한다.

영화는 2001년 빈과 치아오가 다른 조직에게 위협을 당하던 순간부터 2006년 치아오가 감옥에서 출소한 때, 다시 2018년 몸이 망가진 빈이 치아오의 품으로 돌아왔다 다시 떠나는 모습까지를 찬찬히 담아낸다. 그 시간 동안 쇠락했던 다퉁은 재개발돼 화려한 도시가 되었고, 그 도시를 차지한 이들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뜨내기들이다.

치아오가 빈을 찾아, 다시 고향을 찾아 드넓은 중국 땅을 오가는 동안 산시성의 어느 마을이 산시댐 준공으로 수몰을 앞둔 풍경, 의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차곡차곡 담아낸다. 출소한 치아오의 가방을 같은 선실에 든 승객이 털어 도망치고, 돈이 떨어진 치아오가 비싼 식당에 들어가 성공한 아무나를 붙잡고 임신한 내연녀의 언니 행세를 해 돈을 뜯어내는 장면 등은 이 너른 고장에 의리와 정리가 바닥까지 떨어졌음을 엿보게 하는 순간들이다.

치아오가 빈에게 이별을 당하고 거리를 걷던 장면을 보자. 형편없는 가수가 거리에서 공연을 한다. 그 뒤에는 동물우리가 놓여있는데, 우리 안엔 사자와 호랑이 두 마리가 기운 없이 들어서 있다. 한때는 숲을 호령했을 맹수들이 형편없는 공연단에게 붙잡혀 기운 없이 몸을 말고 있는 것이다.
 

▲ 강호아녀 스틸컷 ⓒ 에스와이코마드

 
21세기에도 도리를 말하는 감독이 있다니

치아오는 늙어 저를 찾아온 빈이 자신을 왜 받아주었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강호에선 의리가 중요하니까. 당신은 강호를 떠났으니 이해 못하겠지만"

보고만 있어도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한탄이 절로 나오는 가운데, 지아 장커는 예로부터 가져왔던 관운장에 대한 애정을 은근슬쩍 드러낸다. 인물들이 제사를 올리며 복을 구하는 신으로 관운장을 가져온 것이다.

결의형제를 맺은 유비로부터 떨어져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그 정리만큼은 변치 않고 끝내 주군에게 돌아갔던 운장의 의리가 영화 내내 은근히 강조된다. 남의 물건을 훔치고 남의 여자를 탐하며 버렸던 사람에게 염치없이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뜻을 지키고 의리를 이고 사는 이들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드높이는 것이다.

지아 장커의 세계관은 쇠락했던 옛 도시에 최신형 열차가 내달리고, 낡은 건물들을 무너뜨려 대규모 주택단지를 조성한 광경 가운데서 본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변하는 와중에도 결코 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있다는 지아 장커의 세계관이 치아오라는 연약한 여성 안에 온전히 깃든다.

영화의 말미에서 돌아보자면 치아오야 말로 땅에 떨어진 강호의 도리를 몸소 지켜낸 여성이다. 그런 그에게 강호아녀라는 칭호는 결코 과하지 않다. 치아오가 있음에 강호의 도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치아오가 있어 강호엔 의지할 지붕이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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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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