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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신세계, 카스텔라 감자 맛보면 다른 건 못 먹어요

[강윤희의 제철 1인 식탁] 홍감자 뢰스티

등록 2021.06.12 18:07수정 2021.06.1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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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생명을 가득 담고 있는 제철 식재료를 먹는다는 것은 자연의 기쁨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 계절도 생명도 드러나지 않는 무감한 매일의 밥에서 벗어나 가끔은 혼자서도 계절의 맛을 느껴보자. 철마다 나는 제철 채소를 맛있게 즐기는 법을 익혀 자연스레 채소 소비는 늘리고 육류 소비는 줄여 지구에는 도움을, 나에게는 기쁨을 주는 식탁으로 나아간다.[기자말]
"느 집엔 이거 없지? 얘 봄 감자가 맛있단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서 소녀가 으스대며 준 감자는 무슨 감자였을까? 속살이 분분이 흩어지는 파근파근한 햇감자였으리라. 암만 해도 끈적하고 쫀득한 딱딱한 감자는 그냥 먹기 영 별로니까. 어린 시절 어머니가 쪄주는 여름 햇감자의 모습은 껍질 사이로 분처럼 뽀얀 속살이 터져 나온 것. 그 포슬포슬한 감자에 소금 약간만 찍어 먹어도 그렇게 달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갈수록 찐 감자가 맛이 없어지는 것 같지?'

그 의문은 어른이 된 이후 감자도 종류에 따라 '분질감자'와 '점질감자'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풀렸다. 분질감자는 말 그대로 전분이 많아 포슬포슬한 것, 점질감자는 수분이 많고 끈적거리며, 조리했을 때 으스러지는 분질감자에 비해 단단하게 모양을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분질감자의 대표 격으로는 두백과 남작이, 점질감자의 대표 격으로는 대서가 있다.

그런데 시장이나 마트에서 파는 감자는 품종을 표기해놓지 않는다. 사는 이도 별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냥 산다. 그런데 언제, 어디에서 감자를 사도 맛이 비슷비슷하다. 그 이유는 시중에 유통되는 감자의 70% 이상이 수미감자이기 때문이다. 수미감자는 분질감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점질감자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그 중간 즈음의 특성을 가진 감자로 재배가 까다롭지 않고 저장성이 좋아 어느 순간 국내 감자 유통시장을 장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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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감자 ⓒ 강윤희

 
요즘 마트에서 사는 감자에서 어렸을 때의 파근파근한 감자 맛이 안 나는 이유는 지금 일상적으로 먹는 수미 감자와 달리, 어린 시절 먹었던 감자가 아마도 분질감자의 한 종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분질과 점질의 중간 즈음인 수미 감자는 다양한 한식 요리에 활용하기에 좋다. 하지만 꼭 분질감자가 필요할 때도 있다. 바삭바삭한 프렌치프라이나 이탈리아 감자 파스타의 일종인 뇨끼를 만들 때 등이 그렇다.

집에서 일반 수미 감자를 직접 잘라 튀긴 프렌치프라이보다 수입산 냉동감자튀김이 더 맛있는 이유는 종이 다르기 때문이다. 감자로 만든 뇨끼는 우리나라에서 '쫀득한 식감의 음식'이라는 대중적인 오해가 있는데, 이탈리아의 뇨끼는 쫀득하다기보다는 퍼석까지는 아니어도 입 안에서 잘 으깨지는 질감으로, 역시 분질감자로 만들어야 이 식감을 낼 수 있다. 반대로 매시드 포테이토나 감자조림 등은 점질감자로 만들어야 맛과 모양이 좋다.


이렇게 음식의 종류에 따라 감자의 종류도 맞춰서 요리해야하거늘, 일반 시장에서 내가 원하는 감자 품종을 찾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분질감자인 두백이나 남작은 전체 생산량의 1%도 안 된다고 하니 그럴 만하다. 한때는 분질감자를 먹으려고 농산물 직거래 카페에 알림 설정을 해놓고 두백, 남작 등을 주문해 먹기도 했는데 1인 가구가 감자 한 상자를 다 소비하기란 힘든 일이다.

국내 대형마트에서는 종종 미국산 러셀감자를 판매하는데, 이 역시 분질감자라 반가운 마음에 산 적도 있지만 국내에서도 많이 나는 감자를, 그것도 구황작물을 수입산을 산다는 것은 어쩐지 죄책감이 드는 일이라 한두 번 사고 말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빼앗긴 감자 선택권의 슬픔에서 나를 구원해주는 감자가 있으니 바로 홍감자다.

일반 감자보다 약간 작은 크기에 껍질이 붉은 빛을 띠는 홍감자는 익혔을 때 속이 샛노래 먹음직스럽다. 보기에만 먹음직스러운 게 아니다. 치밀한 입자는 어찌나 포근포근하면서도 부드러운지 별명이 '카스텔라 감자'일 정도다. 일반 감자와는 달리 은근한 단맛을 지니고 있어 아이들도 좋아한다. 분질감자에 속해 잘 쪄서 마지막에 수분을 날리고 냄비를 마구 흔들면 껍질이 멋진 모습으로 터지면서 샛노란 분이 잔뜩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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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 홍감자 ⓒ 강윤희

 
홍감자는 우리 토종 감자 중 하나로, 어느 지역에서 최초로 재배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울릉도의 먹을거리로 유명하다. 울릉도 개척 초기, 쌀을 대신해 옥수수와 함께 울릉도 주민이 먹던 구황작물이라고 한다. 한때는 울릉도 대부분의 농가가 생산했으나 많은 농가가 판로개척 등의 어려움으로 산나물 재배 농사로 돌아서며 현재는 30정도 농가만이 홍감자를 생산하고 있다.

2014년에는 슬로푸드 국제협회의 '맛의 방주'에 울릉도의 홍감자가 칡소와 섬말미나리, 손꽁치 등과 함께 오르기도 했다. '맛의 방주'는 잊혀져가는 음식의 맛을 재발견하고 멸종위기에 놓인 종자와 품목을 찾아 기록하는 인증 프로젝트로 1997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맛있는 홍감자를 알게 된 것이 십년도 채 안 된다. 육칠년 전부터 농부 시장 등에서 간간이 비쳐 그 맛에 완전히 빠지게 된 뒤 마트나 시장에서 쉽게 살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러다 작년 즈음부터 일반 마트나 시장에서도 홍감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잊혔던 토종감자인 홍감자가 종을 지키려는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다시 대중적으로 사랑받기 시작한 것 같아 내가 홍감자 재배 농부도 아니건만 기분이 좋다. 올해는 강화도의 풍물시장에서 처음으로 홍감자를 발견했다.

"강화도에도 홍감자가 나요?"
"……그냥 전국에서 다 나는데 종자가 비싸서 잘 없어. 근데 진짜 맛있어. 이거 한 번 먹으면 다른 감자 못 먹어."


대답을 은근히 회피하는 시장 사장님을 보니 아마 강화도에서 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홍감자의 맛이야 사장님의 말대로 익히 알고 있으니 모르는 척 기분 좋은 마음으로 홍감자를 한아름 사서 돌아왔다.

홍감자는 그냥 쪄먹어도, 소금이나 설탕으로 간을 해 삶아도, 마지막에 버터를 올려 먹어도 정말 맛있지만 그렇게 먹어도 홍감자가 남았다면 할 만한 요리를 소개한다. 지금은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스위스의 감자전 '뢰스티'가 그것. 달콤한 홍감자를 얇게 채쳐 바삭하게 부쳐 겉은 바삭, 속은 파근하고 촉촉한 것이 앉은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한 판을 다 먹게 된다. 차가운 화이트와인이나 맥주, 막걸리하고도 아주 궁합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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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감자 뢰스티 ⓒ 강윤희

 
♣ 홍감자 뢰스티

- 재료(2인분)

홍감자 2개, 베이컨 1줄, 버터 1큰술, 소금 1꼬집, 달걀 노른자 1개분, 파마산치즈·쪽파·후춧가루 적당량씩

- 만들기

1. 홍감자는 껍질을 벗겨 얇게 채썬다. 강판으로 얇게 저민 뒤 썰면 더 편하다. 베이컨도 얇게 채썬다.
2. 채썬 홍감자에 버터 1큰술과 베이컨, 소금 한 꼬집을 넣고 잘 섞는다.
3. 달군 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2의 반죽을 넓게 펴 중불에서 앞뒤로 노릇하게 부친다.
4. 그릇에 뢰스티를 담고 송송 썬 쪽파와 파마산치즈 간 것을 보기 좋게 뿌린다. 달걀 노른자를 생으로 올리고 후춧가루를 뿌려낸다. 트러플오일이 있다면 뿌려내도 좋다.
 
#햇감자 #홍감자 #뢰스티 #분질감자 #감자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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