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우리 또 볼 수 있겠지?" 눈물 쏟은 자매들

어머니와 이모님들의 오랜만의 외출... '마음의 언어'를 나눈 1박 2일

등록 2021.06.13 18:15수정 2021.06.13 19:21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머니는 6남매 중 셋째다. 딸로는 둘째다. 바로 위 언니, 그러니까 내 큰 이모와는 두 살 터울이다. 셋째 딸은 전체 형제의 막내다. 어머니와 열세 살 차이가 난다. 당사자들은 기분 나빠하실지 모르겠지만 셋은 많이 닮았다. 길에서 만나도 자매들인 걸 알 정도다. 덩치는 아담하지만 얼굴은 갸름하니 미인형이다. 그렇게 외모는 비슷할지라도 각자의 개성은 천지차이다.


큰 이모는 장녀답게 씩씩하고 용감하시다. 뼈대있는 집안 장손에게 시집가 평생 시부모를 모셨다. 당신의 시어머니는 치매를 오래 앓다 돌아가셨다. 고초당초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하셨다. 참 많이 울었다며 지금도 눈물을 흘리시곤 한다. 하지만 당신은 들장미 소녀 캔디처럼 참고, 참고 또 참으며 일곱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내셨다.

막내 이모는 싹싹하고 상냥하며 예의 바르다. 언니 오빠들에게 두루 잘 한다. 어렸을 적부터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해 왔다. 포항으로 시집을 가 1남 1녀를 두었다. 둘 다 선생이 됐고, 출가해 가정을 꾸렸다. 자식농사 알뜰하게 잘 지었다고 주변에서 칭송과 부러움이 자자하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아직 자동차 운전을 한다.

6남매 중 네 분이 고향 경주를 든든히 지키고 있다. 우리 어머니와 막내 이모만 타향살이 중이다. 인천으로 시집오신 어머니는 친정 경조사 아니면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조카들의 혼사는 반드시 챙기신다. 그럴 때에야 그리운 형제들과 만날 수 있어서다. 그런 날이면 세 자매는 모처에 모여 하루 밤을 꼬박 새우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썰렁한 결혼식장 코로나로 인륜지대사마저 연기되는 세상. 하객들로 가득한 결혼식장은 다시 볼 수 있을까. ⓒ 이상구

 
얼마 전 코로나가 조금 주춤한 틈을 타 막내 외삼촌의 막내아들이 결혼식을 올렸다. 이미 두어 차례 미룬 끝이었다. 어머니는 한 달 전부터 나에게 함께 가줄 수 있는지를 물으셨다. 건강하실 때는 직접 운전해 내려가셨지만 수술까지 한 지금이야 어불성설이다. 내가 모시고 가는 건 당연했다.

당신은 달력에 빨갛게 표시를 해 두고 그 날을 기다렸다. 아마 결혼식보다 자매들의 상봉을 더 기다리시는 것이리라. 막내 이모 아들이 콘도를 잡아 주었다고 귀띔하시며 설레하셨다. 게다가 이번 혼사로 모두 열여섯 명의 자손 모두가 출가한다. 더는 집안 잔치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일 식장은 썰렁했다. 홀은 큰데 좌석은 절반도 차지 않았다. 식구들이 거의 다였다. 예식도 사뭇 긴장감 속에 진행됐다. 혹시 또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혼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서운한 노릇일지 몰라도 때가 때인 만큼 조심 또 조심하는 게 맞았다. 다행히 행사는 무사히 끝났다. 하객들을 모두 보내드리고 마무리까지 마친 자매들은 미리 마련된 제2의 행사장으로 향했다.


결혼식 끝나고 만들어진 자매들의 토크쇼

나는 그날 어머니 수행원이자 방청객으로 그 이벤트에 처음 동석할 수 있었다. 이미 들은 바는 있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어 나도 내심 기다려졌다. 숙소에서 편한 옷을 갈아입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숨고르기를 한 그녀들은 저녁식사를 할 때부터 슬슬 시동을 거셨다. 주로 큰 이모가 이야기를 주도하고 어머니가 뒤를 받히고 막내 이모는 주로 들어주고 리액션하는 역할을 맡았다.

말하자면 큰 이모가 메인 MC, 어머니는 게스트, 막내 이모는 제2의 게스트 겸 밥 차리고, 술상 준비하는 FD 역할까지 하신 것이다. 큰 이모는 거침없는 입담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액션은 크고 화려했으며, 성대모사도 발군이었다. 이야기 속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수십 명의 인물이 등장했다. 리얼리티를 한껏 살린 대사는 걸쭉했다. 비방 멘트마저 속출했다.

처음엔 나 역시 흥미진진하게 그녀들의 쇼를 지켜봤지만 그들의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나는 집중력이 떨어졌다. 문제는 '말'이었다. 어머니의 아들이니 나도 경상도의 후예인 것은 분명했지만 네이티브 스피커들의 진짜배기 사투리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녀들이 흥에 오르면 오를수록 난이도는 점점 더 심해졌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전체의 30%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신들의 대화의 대부분은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사건과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다. 내가 모르는 낯선 사람의 이름과 지명과 고유명사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그 주제와 흐름도 종횡무진, 변화무쌍했다. 이 얘기를 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새 주제가 바뀌고, 소학교 때 추억을 되짚다가도 느닷없이 한 많은 시집살이가 등장하는 식이었다.

종국엔 그 세 분이 모두 각자 제 얘기만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도 자기들끼리는 희한하게 뜻이 통했다. 웃을 땐 함께 깔깔거렸고, 울어야 할 땐 동시에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 풍경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방언기도를 올리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토크쇼는 달아올랐다. 출연진의 신명이 오를수록 방청객은 점점 더 소외되어 갔다.

한편으로 그들은 나를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그쯤에서 빠져줘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너무 피곤했다. 다음날 운전도 해야 하니 먼저 들어가 자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들은 더 있으라고, 뭐라도 더 먹으라며 만류했지만 그 말에 진정성은 1도 없어 보였다.

불성실한 방청객이 빠지자 쇼는 더욱 활기를 띠고, 점점 더 '버라이어티'해지는 것 같았다. 웃음소리는 더욱 높아졌으며 중간중간 노래도 끼워 넣었다. 아마 미스터 트롯의 이야기가 나온 듯했다. 

토크쇼는 새벽 서너 시까지 이어졌다. 낼모레 일흔에서 곧 아흔인 할머니들이 기운도 참 좋았다. 저러면서 이제껏 어떻게 그동안 떨어져 살았나 싶기도 했다. 날이 밝자 거뜬히 일어나신 세 분은 조반을 드시면서도 간밤의 흥분을 곱씹으셨다. 하지만 분위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곧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이리라.

따뜻한 '마음의 언어'를 나눈 하룻밤
 

낼모레 일흔에서곧 아흔인 할머니들이 기운도 참 좋았다. 저러면서 이제껏 어떻게 그동안 떨어져 살았나 싶기도 했다. ⓒ elements.envato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현관에 나온 세 자매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애틋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셋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오직 눈빛과 손의 온기로만 이야기하는 듯했다. 마침내 큰 이모께서 "우리 또 볼 수 있겠지?"하셨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셋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아내셨다. 그걸 지켜보는 나도 콧등이 아렸다.

화제의 영화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은 골든 글로브 최우수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면서 이런 소감을 남겼다고 한다.

"미나리는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가족의 이야기이고 그 언어는 단지 미국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언어(language of heart)다."

미나리를 외국어 영화로 분류하는 건 옳지 않다는 뜻일 게다. 감독은 그걸 정면으로 비판하기보다 점잖지만 날카롭게 타이른 거다. 영화제 관계자들은 더 뜨끔했으리라. 특히 그의 말 중 '마음의 언어'란 대목은 울림이 크다.

그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말이다. 별 말이 아니어도 그 뜻이 상대의 마음에 너끈히 가 닿는 말이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같은 말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난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당신들이 쓴 언어는 그거였다. 늘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절절히 사랑하는 심정이 오롯이 담긴 따뜻한 '마음의 언어'로 세 자매는 하루 밤을 지새운 거였다. 그렇게 요란했던 그녀들의 수다와, 아무 말이 없던 애절한 이별에도 그녀들이 주고받은 것은 서로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었다. 나 같은 이방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토크쇼 #자매들 #마음의 언어 #사랑 #가족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